ID. Ghost (60대, 남)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평일 아침, 수화기로 전화가 울렸습니다.
“난데, 오늘 바빠?”
“응 오늘은 입사 동기끼리 회식이 있어.”
“그래?”
평소 같았으면 기운 없이 전화를 끊었을 그녀입니다.
“나 할 말이 있는데 오늘 좀 볼 수 있을까? 늦더라도 기다릴게.”
전화선으로 닿는 그녀의 단호함에 덜커덩 심장이 내려앉았고, 애써 대답하는 와중에 전화가 끊겼습니다. 뚜뚜뚜우. 시퍼렇게 울리는 통화 종료 음에 나는 철커덩 목구멍이 막혔습니다. 나는 평소와 달리 회식을 취소하고 퇴근 후 바로 그녀를 만났습니다. 차에서 그녀는 내가 예상하고도 남은 말을 비교적 가볍게 내뱉었습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붙잡고자 그녀처럼 시퍼런 바다를 향해 운전을 했습니다. 우리가 처음 시작을 말했던 그 바다를 이용해서라도 그녀에게 매달리고 싶었습니다. 영문도 모르는 바다는 우리의 족적을 지운 지 오래였지만, 추억은 여전히 펄럭이며 반겨주었습니다.
“굳이 여기까지 와서 서로 더 힘들게 하는 거야? 그만 애써도 돼.”
생기 없이 얇은 그녀 목소리가 줄곧 단호합니다. 멀리서 보면 남녀 둘이서 한 차에서 밤바다를 보고 있는 풍경 일 텐데 그녀의 말은 나로 인해 차디찹니다. 한때는 근경에서 봐도 풍경이었을 우리가, 오늘은 원경에서 봐도 우리가 조용히 전쟁 치르는 것 보였을지 모릅니다.
그녀와 처음으로 손잡고 모래둑을 거닐던 이곳. 차 문을 열자 보드랍던 촉감의 바람은 오늘따라 심해의 포말을 닮아 비릿하게 코끝을 긁습니다. 우리는 한 발자국 정도 떨어져 절벽을 향해 모래사장을 걷습니다. 켜켜이 색을 달리하며 유구한 시간을 증명하는 절벽과 달리, 렌즈 속 그녀의 미소와 파도의 하얀 진심은 내가 수없이 파도쳐서 부수어진 것이겠죠. 한때는 우리가 바다와 절벽 같은 줄 알았는데, 절벽도 결국엔 깎여서 회상의 파편들만 포르르 새하얗게 모래사장까지 밀려옵니다. 가벼이 바닷가를 누비던 그해 여인은 이젠 초췌한 눈빛으로 남았습니다. 사상누각이란 소리를 들어도 둘만 괜찮으면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함께 지은 모래성이, 한순간 올 풀린 모래가 되어 오돌토돌 심장에 박힙니다. 절벽도 무너뜨린 나인데, 모래성이 어찌 버티겠습니까. 나는 이렇게 어리석습니다.
“함께 한 시간이 있는데 어떻게 쉽게 헤어져. 다시 한번 생각해 줘.”
간절함이 묻은 내 목소리가 썰물이 되어 빠져나갑니다. 찰박거리던 바닷물이 빠져나가고 뭍이 드러나 바닷길이 되어 반짝이며 드러납니다. 지금껏 내가 디뎌온 무수한 발자국이 저기에 드러난다면 그녀와 나란히 걸었던 길이 가장 반질거리며 빛날 겁니다.
평소 나의 부탁에 약하던 그녀는 오늘만큼은 고개를 내젓습니다. 대신 그녀의 손가락에서 빼낸 반지를 내 손바닥 위에 건넸습니다. 내 손 위 두 개의 반지를 보며 그녀는 말했습니다.
“나 수백 번 고민하고 어렵게 꺼낸 거야. 우린 함께하며 웃었던 순간 보단, 떨어져서 울었던 순간이 더 많았던 것 같아. 다음에는 나보다 마음 넓고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랄게.”
허물어진 모래성처럼 한순간 내 몸에서 모든 기력이 빠져나가는 걸 느꼈습니다. 어떤 맹세에도 그녀를 더는 붙잡을 수도 없다는 걸 그녀 눈빛이 말해주고 있었습니다.
“그래... 근데 우리 반지를 집에서 혼자 보게 되면 가슴이 너무 아플 것 같다. 자기가 상관없다면 차라리 여기에 남겨두자.”
그녀는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차에 올라타 절벽 꼭대기로 올라갔습니다. 탁 트인 수평선 너머로 우리 이야기 정도는 다 잊어줄 것만 같습니다.
“각자 정리하는 게 낫겠지?”
그녀는 승낙했고, 곧 있어 절벽 위에 서 있던 그녀에 의해 먼바다에 작은 파문이 일었습니다. 다시 넘겨준 그녀 손에서 반지가 사라진 걸 확인하고, 나는 홀로 차 뒤로 이동했습니다.
나는 반지를 던지는 대신, 흙을 조금 파서 내 반지를 묻었습니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다면, 파도에 의해 나의 반지는 바다로 떨어지겠지요. 또다시 밀려드는 미련 같은 파도는 반짝이는 사빈의 자국을 말없이 쓰다듬습니다. 바다는 거친 소리를 내며 언제나 절벽을 부수어댑니다.
세월이 흘러 사진 동호회에서 그 바닷가로 가자는 결정이 났습니다. 관광버스를 타고 도착해 무릎을 짚으며 차에서 내리자, 당시 한산하던 바닷가가 사진 명소로 부쩍 유명해졌는지 사람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전문 장비를 든 동호회 사람들 근처에 젊은 연인들이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으며 웃고 있습니다.
“자기야 여길 좀 봐봐.”
나의 모든 카메라 장비를 사용하더라도, 저 피사체 이상의 결과물을 얻어낼 자신은 도무지 생기지가 않습니다. 아무리 장비가 바다를 선명하게 하더라도, 웃음이 없다면 햇빛의 따스함을 담을 수가 없으니까요.
그랬기 때문일까요. 나는 사진 찍는데 여념이 없는 다른 동호회 사람들 사이에서 말없이 카메라를 내렸습니다. 대신, 지층마다 비밀을 간직한 나지막한 바위에 올랐습니다. 다리가 아픈지도 모르고 올라선 둔덕에서 나는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한쪽 눈을 감은 채 카메라 렌즈를 들여다보는 나를 향해, 그녀가 나타나 곧 쓸려버릴 두 이름과 하트 앞에서 검지와 중지로 브이를 만들었습니다. 파도에도 쉽게 지워지는 모래 위에다 영원을 새기는 그녀가 나를 향해 환히 웃었습니다.
“자, 하나 두울 셋. 찰칵.”
절벽 위에 묻힌 반지도 억겁이 지나면 바다에 떨어지겠지요. 나는 둔덕 위에서 한동안 파도의 왕래를 지켜봅니다. 사진은 영원히 웃는 그녀를 남겼고, 영원한 연인은 한쪽이 찢긴 사진의 쓰라림을 오롯이 간직한 채 오늘을 살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