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ID. Ghost (60대, 남)
한적한 경양식 레스토랑에서 내가 썰어둔 고기 조각을 마저 먹는 걸 보고서, 나는 뿌듯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마음의 여유가 없는지 식사량이 부쩍 줄어든 그녀가 오래간만에 접시를 비워갑니다. 나는 겉옷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그녀가 나이프를 내려놓고 물을 마실 때 즈음 자그마한 네모 상자를 그녀 앞에 내밀었습니다. 내용물을 쉬이 예상할 수 있는 작은 상자를 보고 그녀는 조금 놀란 표정으로 상자를 바라보았습니다. 볼록한 상자 뚜껑을 열고서 그녀는 물었습니다.
“언제 이걸 준비한 거야? 내 손가락 사이즌 어찌 알고.”
손마디가 거의 없는 그녀의 약지에 나는 반지를 끼우며 말했습니다.
“저번에 내가 끼고 온 반지로 자기 손가락에 끼워봤던 거 기억나? 눈대중으로 재긴 했는데 다행히 맞는 것 같네.”
그녀는 처음부터 신체 일부처럼 장착된 동그란 형태를 응시했습니다. 그녀가 맹세처럼 여기는 걸 보고도, 나는 괜히 한 마디를 덧댑니다.
“그냥 사 온 거야 그냥...”
“반지는 모양처럼 원만한 사랑을 의미한대. 나를 생각하면 모난 걸로 사 왔어야 했는데... 내가 더 잘할게.”
날이 갈수록 시들어가는 그녀를 바라보며 나는 힘주어 말했습니다.
할 말이 많은 듯한 입술이 잠시 일그러지더니 그녀는 오히려 힘주어 꾸욱 닫아버립니다. 나보다 몇 년 늦게 세상을 디디고, 그 무게만큼 나보다 늦게 세상을 배우는 그녀를 더 이해하고 싶었고 더 잘해주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정직해서 출발 시점은 상관 않고 정신없이 삼라를 굴릴 따름이었습니다. 바퀴 속에 든 돌멩이는 수없이 지치고 오해하며 서로의 시작을 자꾸만 뭉툭하게 짓이겨 갑니다.
나는 그녀의 약지를 만지작거리다, 다른 쪽 주머니에서 고민 없이 또 하나의 네모 상자를 마저 꺼냈습니다. 그녀 손가락에 끼워진 것과 똑같은 모양의 반지를 꺼내 내 손가락에 끼웠습니다. 이제 변명의 여지도 없습니다.
“그냥 산 거긴 한데... 서로 같은 모양의 반지를 꼈으니 걱정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전에는 미안했어.”
다정함이 좋다며 나의 고백을 승낙했던 그녀는 언제부턴가 다정도 병이라 합니다. 같은 회사 직원에게도, 그녀의 친구들에게도, 스치는 점원들에게도 나는 그녀 관점에서 지나치게 친절하다고 합니다. 둘만의 세상에선 따스한 작용을 일으키는 다정함이, 함께하는 세상에선 그녀에게 비수 같은 반작용을 꽂곤 했습니다. 태어나기를 그녀와 아귀가 맞지 않은 것을 서로가 바꾸어나갈 수 있는 걸까요. 우리는 수시로 부딪히며 반지 모양의 동그란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똑같은 반지를 끼고서 후식으로 나온 차를 마신 후 우린 레스토랑을 벗어났습니다. 그녀의 집으로 태워주기 위해 그녀를 조수석에 오르게 하고서 나는 이번엔 길쭉한 상자를 내밀었습니다.
“이사한 집이 버스정류장에서 멀어져서 출근길에 덥지? 점원에게 뽀얀 피부를 가진 사람에게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달라했더니 이걸로 주던데. 마음에 들면 좋겠어.”
바다의 모래알보다 무수한 사람들 중 금빛으로 반짝였기에 만날 수 있었던 그녀를 바라봤습니다. 그녀 역시 아무도 자신의 표정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에, 낯빛 하나도 스치지 않는 한 남자를 다시금 반짝이며 바라봅니다.
“반지는 그냥 준 거지만, 이건 그냥 준 거 아니야.”
반지 앞에서도 입을 굳게 다물던 그녀가 고운 빛깔을 담은 양산 앞에서 갑자기 울먹였습니다. 그녀의 언어들은 공허하게 갈려나가는 세상 속, 상대의 낯빛에도 생각이 멈추는 한 남자를 떠올리니 목구멍에 뭐가 걸린 듯 눈이 붉어졌습니다. 그러더니 갑자기 그녀는 운전석에 앉은 내 어깨를 팔로 감싸 안으며 말했습니다.
“이러다 우리 나중에 어떻게 헤어지지...”
“하나하나 잘 풀어가야지. 그러려면 눈물도 좀 아껴두자.”
지나치게 다정한 나는 오늘도 그녀를 울렸습니다. 나의 선의는 남에게 눈물을 내려고 받은 건 아니었을 텐데 나는 몇 번이고 그녀를 슬프게 합니다. 낡은 차와 늘어져 가는 카세트 테이프처럼 우리도 매일 시간에 청춘을 베이고 쾌청함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지평선 너머 저만치 그려보는 행복보단 서서히 틈이 벌어지는 벼랑 앞에서 우린 손을 잡았습니다. 같은 반지를 겹친 두 인간은 삶의 절벽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며, 몸을 떨며 한동안 흐느꼈습니다.
(마지막 3화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