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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이별 공식(1)

- ID. Ghost (60대, 남)

by 지구 사는 까만별



제법 정갈한 곳에서 저녁 식사를 한 후, 그녀는 소화를 조금 시키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준비한 카세트테이프를 들으며 나는 그녀를 어느 초록의 둔덕에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녀가 소개한 장소였는데, 어느새 그곳은 떳떳한 우리들의 밀회 장소가 되었습니다. 매미도 목이 쉬어가도록 지난하게 짙푸른 여름밤이었습니다.


여기는 언제 와도 참 좋은 거 같아.”

창백하리만치 하얀 그녀 얼굴에 초록의 생기가 스며든 것 같았습니다.

“그러네. 오늘따라 바람도 좋네. 우리 잠깐 좀 앉을까?”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본 후, 나는 느리지 않은 속도로 트렁크에서 돗자리를 꺼내 펼쳤습니다. 그녀가 고른 빨간색 체크무늬의 돗자리가 초록을 가르며 두 명을 위해 펼쳐졌습니다.


“이거 예전에 네가 사줬었잖아. 너처럼 참 예쁜 것도 샀다 생각했는데.”

나는 해진 돗자리를 보며 말을 했습니다. 접고 펴기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돗자리가 자글자글했습니다.

“비슷한 걸로 새로 살까 싶다가도 그래도 네가 사준 건데 싶어 냅두게 되더라.”

그리고 나는 다음 문장을 애써 삼켰습니다.

‘그리고 요새 바빠서 돗자리 쓸 일도 잘 없기도 하고...’

그녀가 말했습니다.

“시장에서 싸게 산 거라 새 걸로 사도 괜찮아.”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선 표정 없이 저 너머의 능선을 바라보았습니다. 우리가 만나는 동안 세상은 항상 여름처럼 지독하게 습했습니다. 그녀는 더위에 약했습니다. 멀리서 가을 묻은 바람이 밤마다 우리를 쓰다듬어 주어도, 그녀는 끝나지 않는 여름에 말라갔습니다. 봄에는 늘 웃던 그녀가 여름을 겪으니 반사되는 칼처럼 서늘합니다. 내가 모르는 삶 중 무엇에 그녀의 마음이 갈렸을까요... 푸른 서늘함은 붉은 분노보다도 뜨거워서 나는 이를 애써 피하곤 했습니다.


“잠시만. 내가 음악 틀어줄게.”

나는 자동차까지 맨발로 다가갔습니다. 우리 뒤에 앉아 바람 같은 존재들을 관망하는 자동차 속으로 들어가 시동을 걸었습니다. 명상이 끝난 자동차의 실내등을 켜서 뺀질해져 가는 카세트테이프들 사이에서 새것을 찾아 끼웠습니다. 치지직. 소리가 나더니, 음악이 현실로 철썩철썩 밀려들었습니다.

“oh my love my darling

I’ve hungered for your touch a long lonely time...”

얼마 전 그녀와 극장에서 들었던 영화의 주제곡입니다. 인기가 많은 영화라 영화관 앞 리어카에서 ost 모음을 팔았고, 그녀와 함께 샀던 것입니다. 이번엔 어두운 영화관이 아닌 사방이 트인 드넓은 언덕 위에서 ost가 흘러나옵니다.

lonely rivers sigh, wait for me wait for me

I’ll be coming home, wait for me

Oh my love my darling... “


앞유리 너머로 보이는 그녀의 표정이 점점 이완되더니, 내가 좋아했던 저 환한 미소가 오랜만에 내 심장으로 걸어옵니다. 나는 볼륨을 조금 더 높이고 차의 전조등도 켰습니다. 태고의 낙원이 빛을 만나 눈부신 이파리들이 반짝거리고, 풀벌레들이 파르르 날아올랐습니다. 영문을 모른 채 뒤를 돌아본 그녀의 눈은 언덕 너머 몽환적인 풍경을 바라보고 있었는지 눈가 이슬이 수정처럼 반짝였습니다. 잘난 사람들에 치여서 야위여가고, 눈에 띄지 않는 낡은 차라 양보받지 못하던 작은 우리는 어둠에서야 우리 영역을 겨우 돌려받았습니다. 오랜만에 행복해 보이는 그녀의 미소. 나중에 여유로워진 일상에서는 이 찰나가 그리워질 날이 오겠다 싶었습니다. 나는 조수석 앞 서랍을 열어 두툼한 카메라를 꺼내 유리창 너머 그녀의 시간을 홀로 찰칵 남겼습니다.


조리개도 제대로 안 열어 엉망진창일 사진을 몇 장 찍고, 나는 자동차에서 내렸습니다. 그리고는 미소를 지으며 음악을 듣는 그녀에게 다가가, 영화 속에서 도자기를 굽던 연인을 떠올리며 손을 내밀었습니다.

“우리 춤출까?”

갑자기? 괜찮을까?”

그녀는 인적 드문 이곳에서조차 초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저 아래 반짝이는 세상 불빛에서 나로 시선을 옮겼습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 손을 잡고 일어났습니다.


적요한 시간이 포개져 당장 내일도 불투명한 연인의 실루엣이 일렁이기 시작했습니다. 둘은 영화 속 두 주인공처럼 포옹한 채 블루스를 추기 시작했습니다.

“Are you still mine? I need your love

I need your love God speed your love to me...“


아무것도 내 것이라 할 것 없는 외로운 세상에서 한 우주가 나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허공을 가르는 그녀의 공허한 손짓이 내게 비수처럼 달려드는 밤. 적어도 이 순간 그녀가 내 곁에 있습니다. 불안한 오늘들이 마주하여 서로의 내일을 기대기도 하면서, 조금씩 밀어내었습니다. 음악이 반복 재생되었고, 못내 동선을 만들며 흐느적 대던 두 그림자가 어느 순간 멈추었습니다. 그리고 무엇인가에 간절했던 두 그림자는 오랫동안 같은 자세로 멈추어 섰습니다. 테이프는 밤이 깊도록 늘어지고, 내 푸릇한 여름밤은 풀벌레 소리가 내는 이정표에 따라 가을을 향해가고 있었습니다.



(다음 화에 계속)







https://youtu.be/Zv8czIoAw5w?si=uJNNW20cXxIiKq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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