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음이 일상에 우거져 더 짙어가고, 얇은 옷조차 버겁게 내려앉는 어느 팔월. 전화 한 통을 계기로 우리는 지금 공항에 있다. 정교한 생활이 깨지는 기분이 나쁘지 않다. 야자나무 아래는 침묵조차 어색하지 않게 전해지는 오랜 친구와 여고시절의 그 친구 모습을 꼭 닮은 친구의 딸과, 내 딸이 함께 있다. 곧 낯선 차에 낯선 도로가 이어지고, 표지판만이 익숙한 섬 위를 달린다.
뉴스에서 세찬 비가 우리와 동행할 수 있다고 예고했지만, 우리 차 트렁크에 올라탄 뒤에는 유순해져 수시로 구름과 선선한 바람이 되어주었다. 그 덕에 태양 가득한 일상에서 벗어나, 선명한 수채화 속을 걸어 다녔다.
셔터에 담긴 수채화에는 자연의 색만 남아있다. 빌딩 회색 대신 돌하르방 회색이 있고, led 대신 무지개가 하늘을 이따금 장식한다. 그중에서도 카메라를 사로잡는 색은 초록색. 비로 먼지를 씻어낸 녹차밭이 더 짙은 초록으로 렌즈를 맞이한다. 초록처럼 싱그러운 딸들과 초록처럼 편안한 친구의 웃음이 초록빛으로 우러난다. 그러다 찻잎에 떨어진 빗방울이 변주처럼 내려도 우리는 리드미컬하게 신이 났다. 여행이란 것 자체가 쨍쨍한 일상에 내려온 시원한 변주이기에.
차창에도, 카페 통유리에도 시원한 리듬들이 땅을 울려댄다. 추억들이 빗물과 같이 음악이 되었다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잠시 말없이 바라본다. 내 친구도 같은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지금은 추억으로 미화할 수 있지만, 당시에는 비바람처럼 들이닥친 걸림돌들을. 당시에는 맞느라 아팠어도 어느 순간 그 돌이 디딤돌이 되어주었다.
오래전 풀잎같이 여리던 시절에는 세상이란 언덕에 서는 것조차 두려웠는데, 이제는 언덕에서 태풍을 온몸으로 맞아도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되었다. 언덕 뒤에 지켜야 할 연둣빛 가지가 우리 안에 뿌리를 내려주었으므로.
시원한 비바람에도, 무더위에도 일상처럼 소중한 가지와 친구가 마음에 더 두터운 뿌리를 내리고 있다. 무더운 여름날엔 나의 그늘이 되었다가, 비바람 치는 날에는 일평생 쌓아 올린 내 마음의 둔덕을 지켜주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