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갈등 했던 그사람은 여기 없고 그것을 떠올리는 내 마음만 여기에..
예전에 다른 부서에서 근무할 때 갈등을 겪었던 직원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
순간, 그때의 감정이 올라오면서 원효대사의 일화가 떠올랐다.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원효는 밤에 잠을 자다가 목이 말라 옆에 놓인 물을 마시고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 지난밤 자신이 마신 물이 해골에 고인 더러운 물이라는 것을 눈으로 보자마자 깜짝 놀라 혐오감을 느끼며 구토를 했다. 그 이후 원효는 '진리는 내 안에 있다'는 깨달음을 얻고 유학을 가지 않고 대중불교를 펼쳤다는 이야기이다.
직원들과 티타임중 이야기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불쑥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는데, 그 사람을 보자마자 순간 내가 얼어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우진이었다.
우진은 상체를 약간 숙인듯 겸손한 몸짓으로 부드러운 표정을 지으며 인사를 했다.
우진 :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A : 와~ 웬일이야? 어쩐 일로 왔어?
B : 회의실에 사람들 많이 모여 있던데 일은 잘 됐어?
우진 : 행사 추진이 잘 되고 있는지 점검하러 나왔습니다.
현실적인 부분을 감안해서 몇 가지 보완하면 추진하는데 문제는 없는 것 같고.....
우진은 무릎에 두 손을 다소곳이 포개어 점잖고 겸손한 태도로 이야기를 이어갔다.
A와 B를 보며 말하다가 중간중간 옆에 있는 나에게 고개를 돌려 부드러운 눈빛을 보내며 얘기를 하곤 했다.
그의 말은 멀리서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처럼 나에게는 공허하게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그의 등장이 당황스러워 나는 그 자리를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전화를 받는 척하며 사무실을 나와 청사를 배회하며 생각에 잠겼다.
우진은 예전에 같이 근무한 팀원이었고, 이후 승진해서 나처럼 팀장이 되어 다른 기관으로 발령받아 갔다.
그의 승진으로 그 갈등은 종료될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링 위에서 끝까지 피 터지게 싸우다 경기 종료벨이 울리고 나서야 링 밖으로 내려올 수 있게 된 지친 복서의 느낌과도 같았다.
그때 나는 그에게 팀장으로서 존중받지 못했고, 일마다 거칠고 무례했던 그의 반응은 내게 큰 상처가 되었다.
중요한 업무도 팀장인 나를 건너뛰고 상위 관리자와 직접 소통하며 독자적으로 했던 그의 행동은 팀장으로서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다른 팀원들이 나를 의식하면서 그를 또 다른 팀장급으로 생각하며 그 중간에서 내 눈치를 보는 분위기까지 만들어졌고, 실제로 나는 소외감과 박탈감을 크게 느꼈었다.
그때를 떠올리면 속으로 겪었던 고통스러운 감정이 순식간에 일어나서 숨이 가빠지고 가슴이 조여 오는 느낌이 들곤 한다.
그런 그였는데 예전에 그 모습은 없고, 지금은 친절하고 겸손한 모습이 너무 낯설어서 혼란스러웠다.
그런데 문득 알게 되었다.
아, 그때 그는 이미 여기 없구나!
지금 여기 있는 사람은 과거 나와 힘든 갈등관계였던 그때의 그 사람이 아니구나!
지금 이 순간 여기 있는 것은 그때 고통스러웠던 나의 마음 뿐이구나!
그때 그와 갈등을 겪으며 혼자 속앓이를 많이 했다.
지금 그의 등장으로 고통스러웠던 그때의 감정이 다시 일어난 것이다.
원효가 전날밤에 물을 먹을 때는 아무 생각도 없다가 아침에 일어나 해골물을 보는 순간 더럽다는 마음에 혐오감으로 구토가 일어난 것처럼, 나 역시 생각지도 않다가 갈등했던 우진을 보는 순간 그때의 힘들었던 장면들이 떠오르고 그때 느꼈던 고통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일어난 것이다.
한번 발을 담갔던 강물은 이미 흘러가고 없듯이, 그때의 우진은 이미 흘러가고 없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내가 그것을 몰랐다면 그때의 그와 지금의 그를 동일시하면서 여전히 그를 비난하는데 몰두했을 것이다. 그러면 그와 또 갈등을 겪고 속앓이를 하고... 그 고통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그때 나는 시비를 가리듯 '너는 틀렸다'며 속으로 맹렬히 도 비난 했었던 것 같다.
그 상황을 그 정도로 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 그때 나의 한계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사람이 가진 성품이 셀 수 없이 다양하다는 것을 놓치고 있었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우진의 입장에서도 나의 입장에서도 그때 그렇게 했던 것이 각자에겐 최선이었을 것이다.
그때 우진은 내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너무도 선명하게 보여주는 거울이었다.
그의 모습, 그의 목소리, 그의 이름.. 그것들이 나의 감각에 도달하는 순간 나의 마음이 즉각적으로 반응하는 것을 비춰주고 있었는데, 나는 그때 바로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와 안 맞는 사람은 안 만나고 싶고, 잘 맞는 사람만 만나고 싶지만 살다 보면 안 맞는 사람도 꼭 만나야 되는 경우가 있다.
안 맞는 사람을 겪을 때 내 안에 부정적인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 지극히 정상이라는 것을 알아차리며, 상대방도 나도, 다양한 성품의 작용으로 볼 수 있다면 불협화음도 하나의 화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려웠던 인간관계를 서툴고 부족했지만, 그 마음을 겪으며 치열하게 공부했고, 그 시간을 잘 버텨온 그때의 라미 팀장을 꼬옥 안아주고 싶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그 마음을 치열하게 겪으며 버텨내고 있을 세상의 모든 라미를 열렬히 응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