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계획한 일은 꽤 계획적이고 끈기 있게 잘 하지만 흔히 말하는 일상적인 습관들은 여전히 몸에 붙질 않는다. 특히 뭘 챙기는 데는 정말 꽝이다. 빈 틈이 많은 정도가 아니라 그냥 바닥이 뚫린 주머니를 들고 다니는 것처럼 뭐든 다 줄줄 새어나간다.
초등학교 때는 어지간한 준비물들은 학교에서 제공을 했기 때문에 특별히 챙기는 게 없었다. 가방을 놓고 가는 일도 있었는데 그래도 별 문제가 없었다. 게다가 내가 같이 다녔기 때문에 자신이 챙기지 않아도 불편함이 없었다.
중학교에 올라가면서 그런 부분이 항상 걱정이었긴 했지만 나로서는 '미리미리 챙겨라'는 잔소리밖에 달리 해 줄 일이 없었다. 아이도 새로운 환경 탓에 나름 긴장하는 것 같긴 했다. 뭔가 덜 챙긴 게 없는지 항상 불안해했다. 하지만 천성이 야무지지 않은 남자아이였기에 한 번씩 '빵구'가 났고 그때마다 엄마 찬스를 쓰는 대신 폭풍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
이해가 안 되는 일도 있었다.
코로나로 원격수업과 등교 수업이 번갈아가며 있었는데 원격수업이 끝나고 등교를 하는 날은 숙제와 준비물이 엄청났다. 저걸 다 챙길 수 있나 싶었는데 웬걸, 학급 카톡방을 살짝 보니 이안이가 친구들에게 준비물 목록을 친절하게 정리해 주고 있었다. '내가 반장도 아닌데 왜 이러고 있지?' 스스로도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숙제를 못한 아이를 위해 자신이 한 숙제를 찍어서 보내주기까지 했다. 이 놈 봐라, 중학생이 되더니 군기가 바짝 들었는데? 이제 맘 놓아도 되는가 했는데 역시 못 믿을 것이 사람이다. 친구들에게 숙제와 준비물 목록을 꼼꼼히 알려 주었지만 정작 자신은 영어 숙제를 안 가져갔대나 어쨌대나..그걸 나에게 웃기다며 말하는 대담함이란..!
어느 날 아침, 출근 준비에 두 아들 등교 잔소리에 정신이 없는데 뜬금없이 이안이가 말했다.
"엄마, 마니또에게 선물 뭐 하면 좋을까요?"
학교에서 친구사랑 행사로 마니또 하는 것은 알았는데 오늘이 마지막 날인가 보다. 그 순간 예열 없이 폭발하고 말았다.
왜 그걸 이제 말하냐고! 어제 말했으면 뭐라도 챙기든지, 챙기게 하든지 구색은 갖추게 했을 텐데 바쁜 이 아침에 갑자기 선물이라니.. 한두 번도 아니고 왜 미리 안 챙기고 항상 아침에 말하는 거야!
급하게 애들 책상부터 싱크대 서랍, 화장대 서랍까지 뒤져서 있는지도 몰랐던 볼펜세트와 지우개를 챙겼다. 누가 봐도 집에서 굴러 다니는 것 가져온 듯한, 정말 선물이라 하기엔 너무 하찮은 것들이었다.
화가 났다.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데 못했다는 것에 일단 화가 났고 그 허접한 선물을 받을 마니또 친구를 생각하니 미안함이 또 화로 변했다. 누군지 몰라도 학급 친구일 텐데 친구 한 명을 사귈 기회를 이렇게 날려 버리다니. 그것만으로도 화가 나는데 바로 눈앞에서 챙겨준 도화지도 찾지 못해 결국 나를 지각하게 만드는 이안이 때문에 나는 정말 내 입에서 불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기가 죽어 등교하는 이안이를 보고도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아이가 가장 속상할 거라고 생각해 보지만 감정은 이성을 우습게 밟아 버린다.
그 무시무시한 감정 폭풍을 이기는 힘은 또 시간이다. 하루를 정신없이 보내고 나니 아침의 그 분노 괴물은 녹아서 사라지고 궁금증이 고개를 들었다. 이 아이는 하루를 어떻게 보냈을라나?
"너 마니또한테 선물 줬어?"
"네." (받은 아이는 얼마나 실망했을까? 이게 무슨 개매너야.)
"그럼 너는 마니또한테 선물 뭐 받았어?"
"줄넘기 잘한다고 칭찬하던데요."
"엉? 선물이 칭찬이야?"
나는 순간 빵 터졌다. 아, 여긴 중딩 남학생 반이었지! 이안이도 딱히 서운해하는 눈치가 아닌 걸 보니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랬나 보다.
"야, 그 친구에 비하면 너는 양반인 거네. 너는 최소한 눈에 보이는 선물은 했으니까."
"그니까요. 마니또는 여학생들이랑 하는 거죠. 남자애들끼리 무슨."
오, 친구들 말을 주워들은 것 같은 이안이 답지 않은 어색한 멘트. 그래도 받은 것보다는 준 것이 더 나아 보이니 마음은 편하다.
지나고 나면 모든 것이 별 일 아닌데 아침부터 분노 폭발이었던 내가 무안해진다. 남녀공학이지만 여학생 볼 일은 별로 없고 이상한 뇌구조를 가진 남학생만 30명이 모여 있는 중학교 교실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공간인 것은 확실하다.
그래도 좀 좋은 걸 챙겨가지 싶은 마음은 여전히 남는다.
이상하게 친구들 이름을 알려 주지 않는 이안이 때문에 반 친구들 이야기를 할 때면 우리만의 별명으로 부른다. 그 친구 별명은 그때부터 '마니또'가 되었다. 학교 갔다 와서 종종 '엄마, 그 마니또가요...' 하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을 보니 그 허접한 선물이 효과가 있었던 건지, 아니면 영향이 없었던 건지(실망 같은) 일단은 잘 지내는 것 같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