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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여름 Mar 26. 2022

쓸데없는 시간의 힘

우연히 유튜브에서 중학생이 한 강연을 들었다.


"어떻게 열네 살이 쓸데있는 일만 하나요? 쓸데없는 시간이 모여야 튼튼한 어른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5학년인 둘째는 벌써 꿈을 정했지만 큰 아이는 중학교 2학년인데도 아직 꿈이 없다. 꿈이 없다기보다 아직 정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꿈이 뭐냐고 묻는 질문이 너무 자연스러운 세상에서 꿈이 없다는 것은 참 불편한 일이다. 한 때는 나도 꿈이 없다는 아이들을 보며 뒤에서 한숨 쉬었던 적이 있었다. 한창 꿈 많을 나이에 왜 꿈이 없다고 하는 걸까? 그런데 아이를 키워 보니 그 아이들은 꿈이 없는 게 아니라 아직 못 찾았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일이 없어서 꿈이 없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아도 꿈을 정하지 못한다.


꿈을 정하고 그 꿈을 향해 한 길로 달려가는 것도 좋지만 꿈이 없다고 갈 길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이에게는 여러 길이 가능성의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 최대한 많은 문을 열어 보고 많은 것을 경험해 보면 언젠가 나를 향해 열린 진짜 문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조급함의 눈으로 보면 그 과정이 의미 없고 시간낭비로 보일 때도 있다. 여러 번 열어 볼 것 없이 가장 크고 안전한 문으로 들어가면 더 많은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수많은 아이들이 여기저기 기웃거릴 자유를 잃고 한 문으로 몰리고 있다. 자신의 가능성이 어디서 터질  알고..


큰 아이가 6학년일 때 이 녀석이 어느 날은 원주율에 꽂혔다. 흔히 3.14로 알고 있는 그 값이 원래는 무한으로 이어지는 수라는 것을 알고는 한동안 그 얘기만 했다. 그게 뭐 그리 신기한지 학교에서 컵 꾸미기를 했는데 그 컵 표면에 원주율을 빼곡히 둘러 써 놓기도 했다. 원주율에 대한 관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급기야 그 숫자들을 외우기 시작했다. 내가 확인한 것으로만 60자리까지 정확하게 외웠다. 나는 경이로운 눈으로 아이를 보았고 아이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뿌듯해했다. 아이를 통해 3월 14일이 화이트데이가 아닌 파이데이(3.14)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원주율 외우기 대회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진짜 세상에는 특이하고 다양한 사람들이 참 많았다.

 

내 딴에는 아이가 대견하고 기특해서 담임에게  이야기를 했더니 담임은 한마디로 잘라 말했다.


"그러게요. 뭐 그리 쓸데없는 짓을 하고 있지?"


이가 지금까지 빠진 것 중에 제일 쓸데 있는 일(공부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같구먼 담임 한마디에 나는 더 이상 다른 말을 할 수 없었다.


아이어릴 때부터 자주 뭔가에 빠다.

5학년 때는 페트병에 물을 담고 그것을 던져서 바로 세우는 에 빠졌다. 생수병을 늘 들고 다니며 틈나는 대로 연습을 했다. '휘리릭 툭, 휘리릭 툭' 집이고 학교고 거리고 할 것 없이 미친 듯이 연습했다. 본인은 좋아서 했겠지만 나는 아주 시끄러워서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아무리 내가 고슴도치 엄마라도 이건 정말 쓸데없는 짓이었건만 이 짓을 중 1때까지 3년을 했다. 그 결과로 10번 연속 성공하거나 페트병 위에 페트병 하나를 더 거꾸로 세우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중학교 가서도 얼마나 돌려댔는지 학급에서 아이의 이름을 딴 챌린지까지 생겼다. 원격수업하고 시간이 남아돌았던 어느 날 아이는 페트병 세우기를 영상으로 찍어 작품 하나를 만들어 냈다. 음악이며 영상편집이며 꽤 그럴싸했다. 미션을 다 완수한 듯 아이는 그 일을 끝으로 더 이상 페트병 던지기를 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종이비행기 접기에 빠져 몇 날 몇 일 종이를 접다가 우연찮게 종이비행기 날리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 오기도 했고 큐브 맞추기에 빠져 온갖 큐브를 다 사모으기도 했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어 할 정도로 축구도 좋아하고 줄넘기도 미친듯이 연습하더니 도대회에서 상을 타왔다. 피아노를 가르쳤더니 유튜브에서 혼자 곡을 연습해서 음악시간에 연주하기도 했다. 이모티콘 만들기에 빠져 자신이 만든 수제 이모티콘을 카톡에서 쓰기도 하고 어느날은 움직이는 영상(이름이 뭔지 모름)을 만드느라 몇 시간씩 보내기도 했다. 학교에서 배운 컴퓨터 프로그램에 한동안 빠져 있기도 하고 그리기 어플로 픽토그램을 그리기도 했다. 진짜 공부 빼고는 다~ 열심히 하는 아이다. 


많은 아이들이 그러하듯 우리 아이들도 게임과 유튜브에 빠져 산다. 유튜브를 보다가 한 곳에 꽂히면 그 부분을 파기 시작한다. 작년에는 남성우월주의 채널에 빠져서 갑자기 여성들에게 자신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면서 핏대를 세우기도 했다. 그 때문에 한동안 나랑 열띤 토론을 벌다. 그러다가 남북문제를 들고 오기도 하고 세계적인 이슈에 관심을 갖기도 하고 하여튼 이 녀석의 관심사는 스펙트럼이 넓고 다양했다.


지금 아이는 래퍼 '정상수'에 빠져 있다. 우리 아이 뿐만 아니라 중딩 남학생들 사이에서 그의 인기는 폭발적이다. 어딘가 모자란 듯 하면서도 자꾸 보니 귀여운 구석이 있는 그의 랩을 따라 하고 그 사람이 나온 영상을 찾아서 나에게 보여 주며 배꼽 빠져라 웃는다. 그의 노래를 집에서 얼마나 불러대는지 나까지 다 외울 정도다. 급기야 정상수의 랩을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곡에 맞춰 리믹스한 음악파일을 만들어서 나에게 보내줬다. 근데 이 아이가 음향제작에 소질이 있나 싶을 정도로 처음 치고는 너무 잘 만들었다. 디 쓸 것도 아닌데  번을 고치고 고치고 하는 것을 보니 꽤나 재밌나 보다.


이제 이는 중학교 2학년이다. 중간고사니 진짜 공부를 해야 하는 나이다. 이런 잡다한 것들에 빠져 있다가 혹시 중요한 공부에 소홀하게 되지 않을까, 그 정도 정성을 공부에 쏟으면 서울대 가고도 남겠다는 생각을 안 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휴대폰 그만 보고 해야 할 공부 좀 하라'고 아이와 싸울 때도 있다. 그러나 그런 순간은 내가 필요 이상으로 예민해져 있는 상황에서만 그럴 뿐 나는 되도록 아이를 내버려 둘 생각이다.


'쓸데없는 시간이 모여야 튼튼한 어른이 된다.'


나는 그 말을 100퍼센트 공감한다. 아이쓸데없는 도전은 그동안 용기와 성공경험을 얻게 했다. 쓸데 있든 없든 아이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 실제로 도전을 했고 꾸준한 노력이 쌓여 목표한 결과에 이른다는 것을 수없이 경험했다. 앞으로 할 수 없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훨씬 많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그게 얼마나 아이에게 큰 능력이 되는지는 앞으로 두고 볼 일이지만 나는 그 쓸데없는 시간의 힘을 믿는다.


아이에게 공부도 수많은 도전 중의 하나이다. 그 방법과 노력의 정도는 스스로 정할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는 시간 동안 혼자서 계획하고 노력하고 실패하고 또 도전했던 그 경험으로 아이는  공부도 그렇게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도전했던 그 많은 것들 중에서 진짜 자신의 가슴을 뛰게 할 무언가를 찾아 꿈으로 삼을 것이다. 세상을 배워 가는 아이에게 쓸데없는 도전은 없다. 쓸데없이 시계를 보며 참견하는 어른이 있을 뿐이다.

 





아이가 진단평가에서 예상보다 높은 점수를 받아왔다. 아이의 입꼬리는 또 씰룩거린다. 내가 오늘 쓸데없는 시간의 힘을 확신하고 글을 쓰게 된 이유다.

이제 또 다음 시험에서 바닥을 칠 수도 있지만 그땐 또 바닥을 친 사람의 힘에 대해서 이야기를 남길 것이다.


원주율 디자인 컵
패트병 영상 중. 3년간 연습하면 패트병을 2단으로 쌓을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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