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수 클리닉
"오늘이 며칠 이더라... 16일이네. 16번 대답해봐! 왜 10년 동안 등록자 수가 크게 늘었을까?"
16번 친구는 당당히 모르겠다고 이야기한다.
"혹시 대답해 볼 사람 있나?"
지금은 소아치과 수업 시간이다. 흰머리가 듬성듬성 난 교수님께서 장애인의 치과치료에 대해 설명하시다가 갑자기 학생들에게 퀴즈를 내셨는데, 아무리 봐도 신기하다. 왜 특정 기간에 연도별 장애인 등록자 숫자가 이토록 늘었을까?
여러분도 밑에 표를 보고 한번 생각해보시라. 1997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에서 연도별 장애인 등록자 수가 5배 늘었다.
여러분이 생각한 답은 무엇인가? 환경 호르몬과 노산 때문에 장애를 가진 신생아 수가 많아진 것일까? 또는 2000년부터 고령화 사회로 진입해서일까? 바로 뒤에 제시될 데이터들을 보면 상기 이유들 때문에 장애인 등록자 수가 늘었다고 말하는 것이 논리적이지 않다는 걸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1997~2007년 같은 기간 동안 합계출산율은 1.52명에서 1.25명으로 줄었고, 고령화 속도가 더욱 빨라진 2007~2020년 동안 장애인 등록자 수는 소폭 상승했을 뿐 1997~2007년 기간처럼 급격하게 늘어나지 않았다. (참고로 2020년 장애인 등록자 수는 2600명이다.)
결국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사이에 어째서 장애인 등록자 수가 급격히 늘었느냐에 대한 교수님 질문에는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이 수업은 2019년 본과 2학년 때 들었다. 그 당시 문제에 대한 답이 매우 인상 깊어서 언젠가는 이 내용을 글로 써야겠다고 다짐했는데, 2년이 지난 2021년, 드디어 장애인 치과치료에 대해 글을 쓴다. 서론이 길었다. 이제 여러분께도 답을 공개할 차례다. 정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바로 '장애 범주가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1997년부터 2007년 사이 우리나라는 크게 두 번 장애 범주를 확대했다. (장애 범주를 확대하기 전에 공식적인 장애는 지체장애, 시각장애, 청각, 언어장애, 지적장애 밖에 없었다.) 1차 장애범주 확대는 2000년도에 이뤄졌는데, 이때 5가지 장애 종류를(뇌병변장애, 자폐성 장애, 정신장애, 신장장애, 심장장애) 장애 범주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3년 뒤 2003년 2차 장애범주 확대가 이뤄졌는데 이때 역시 5가지 장애(호흡기 장애, 간장애, 안면장애, 장루 요루장애, 뇌전증 장애)를 포함시켰다. 장애 범주를 확대시켰다는 것은 곧 복지의 보장성 확대를 의미한다. 장애인으로 등록하게 되면 장애인 연금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속해있는 치과대학병원 1층에는 특수 클리닉이 있다. 지금 일하고 있는 원내생 진료실과 같은 층을 공유하기에 분명히 그 앞을 자주 지나다녔다. 하지만 2021년 초반까지만 하더라도 특수클리닉이 특수클리닉인지 모르고 살았다. 써놓고 보니 말이 웃긴데, 예를 들어 병원 내원객이 나에게 특수클리닉이 몇 층인지 물었다면 치과대학병원에 특수클리닉이라는 곳도 있냐고 되물었을 것이다. 2021년 본과 4학년이 되고 특수클리닉으로 교수님 진료를 어시스트하러 들어가서야 그곳이 어떤 환자를 대상으로 하는지, 어떤 종류의 치료를 제공하는지 알게 되었다. 특수클리닉은 정말이지, 지금껏 내가 보지 못했던 세상이었다.
특수클리닉에 첫 발을 들여놓은 날 두 가지 사실에 놀랐다. 첫 번째로 이렇게 많은 수의 장애인이 내 곁에 있는지 처음 알았다. 지체 장애인, 지적 장애인 등 다양한 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 앞에 문전성시를 이룬 모습을 보고, 여태껏 같은 층에 있었으면서도 왜 이들을 보지 못했을까 싶었다.
두 번째로 놀라웠던 사실은 여성 보호자들의 힘이었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덩치 되는 아이들을 비슷한 체구의 보호자들이 온몸을 이용해 휠체어에서 번쩍 들어서 치과 의자에 앉히는 모습은 정말 대단했다. 평소에 헬스를 하며 무거운 바벨, 덤벨을 자주 드는 내가 보기에 저런 식으로 아이를 들면 보호자의 허리에 굉장한 부담이 갈 것 같지만, 그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아이를 드는 것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중 아직까지도 기억 남는 초등학교 저학년 남자 환자가 있다. 휠체어를 타고 진료실에 들어와 자리에 누워 입 안을 살펴보니 치아 뿌리 끝에 염증이 잡혀 잇몸으로 고름이 나와 당장 이를 빼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때 보통 저 나이대 아이들이면 양치 똑바로 해야 한다고 잔소리 한번 하고 이를 뽑으면 된다. 그런데 특수클리닉에 찾아올 정도의 지체 장애를 가진 아이들은 다른 장기에 문제가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교수님이 아이의 전신 병력 차트를 보더니 아니나 다를까 한숨을 푹 쉬신다. 어깨너머로 언뜻 보니 심장 쪽에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코로나 때문에 1달간 진료를 미뤘던 아이의 부모님은 교수님께 치아를 꼭 빼주시면 안 되느냐고 간곡히 사정을 한다. 교수님의 미간은 잔뜩 찌푸려진다. 심장 장애가 있는 환자를 함부로 발치했다가는 감염성 심내막염에 걸려 생명이 위험해질 수 있다. 환자의 보호자도 마음이 급하겠지만, 좋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온전히 리스크를 교수님이 감당해야 되는 상황이다.
교수님은 잠시 아이와 부모님을 밖에서 대기하라고 말한 후, 핸드폰을 꺼내 들어 아이가 가진 심장장애에서 발치를 해도 되는지를 검색하기 시작하신다. 한 5분쯤 흘렀을까?
"발치 하자."
교수님이 입을 여셨다. 아이를 다시 진료실 안으로 부르고 나서 부모님께 발치 후 일어날 수 있는 위험성을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하신다. 일반 젖니 발치 주의사항에서 들을 수 없는 생명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가 가득하다. 그렇게 발치를 마친 후 아이는 진료실을 빠져나갔고 교수님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또 다른 장애를 가진 환자를 진료실로 불러들였다.
특수클리닉이 모두 끝나고 그날 봤던 치료 중에 돈이 되는 치료가 뭐였는지 생각해봤더니, 충치 치료 1개 한 게 전부였다. 그것도 보험 되는 재료로 했으니 8만 원 정도 번 셈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장애인 환자들에게 금니, 지르코니아 크라운 등 돈 되는 치료는 엄두도 못 낼 것 같다. 1분도 제대로 입 벌리고 있는 게 힘든 애들을 데리고 몇십 분이 걸리는 고난도 치료를 어떻게 하겠는가. 기껏해야 스케일링, 발치가 대부분이고 협조도가 좋다면 최대한 빠른 시간 내에 레진으로 충치를 때우는 게 최선이다. (요즘은 전신마취를 해서 치료를 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그 또한 장애를 가진 환자들에게는 부담되는 옵션이다.)
돈벌이만 문제가 되는 건 아니다. 몸도 고생이다. 특수클리닉을 전담으로 맡고 계신 교수님이 이야기해주신 건데, 한 번은 환자가 엄지 손가락을 물어서 골절이 발생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만큼 행동조절이 되지 않는 아이들을 치료하다 보면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나게 된다. 그렇게 특수클리닉에서 4시간 동안 서있으며 느낀 총평은 '특수클리닉은 아무나 못하겠구나'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날 이후부터 보였다. 특수클리닉에 찾아온 수많은 환자들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아이를 보며 장난감을 흔들어 주는 보호자의 모습도, 특수클리닉에 들어가기 전 급하게 이에 낀 음식이라도 빼려고 어설픈 칫솔질을 하는 환자의 모습도, 그때부터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보지 못했던 세상을 보게 된 것이다. 신기하게도 보지 못한 세상을 보게 되니, 듣지 못한 세상의 이야기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우리 학교 치과대학병원 외과에서는 구순구개열 수술을 굉장히 많이 한다. 언청이 수술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언청이라는 표현은 누군가에게 모욕적으로 들릴 수 있으니 구순열 또는 구순구개열이라고 표현하는 게 좋다. 아무튼, 구순구개열 수술 케이스가 많다 보니 수업시간에 자연스레 깊이 있게 배우게 된다. 하루는 교수님께서 쉬어가는 이야기로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다. 2019년 3월부터 우리나라는 구순구개열 환자의 보험 보장 범위가 크게 확대되었다고 한다. 그간 나라에서는 구순구개열 수술 후 발생하는 흉터를 없애는 치료만 보험으로 보장해 주었는데, 앞으로 코나 치아의 비틀림 교정 치료도 보장해 주는 식으로 바뀐 것이다. 그랬더니 본원 산부인과에서 구순구개열 신생아 출생률이 급격히 늘었고 더불어 치과대학병원 외과에서도 구순구개열 수술 횟수가 크게 늘었다고 한다. 정확한 통계를 내보지는 못했지만, 보험제도가 바뀌고 나서부터 눈에 띌 정도라고 한다. 교수님은 이렇게 1분 정도 가벼운 이야기 하시고 곧바로 수업을 재개하셨다. 평소라면 그리 중요한 내용이 아니기에 머릿속에 남지 않았겠지만, 이 날은 유독 다른 수업 내용보다 제도가 바뀌니 구순구개열 신생아 수가 늘었다는 말이 기억에 남았다.
'장애인 복지에 대한 보장성을 늘리자' 또는 '낙태를 금지하자'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어서 글을 쓰기 시작한 건 아니다. 단지 내가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불과 몇십 미터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세상을 보지 못했고 몇 층 위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듯, 당신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세상이 있지 않느냐고 묻고 싶었다. 비전문가인 내가 다루기에 조금 무거운 주제여서 어떻게 글을 마무리 지을까 고민하다가 과거 목사님과 나눈 대화가 생각나서 소개해보려 한다.
목사님께는 아픈 딸이 있었다. 따님이 사모님의 뱃속에 있을 때부터 선천적인 장애를 가졌다는 것을 목사님 부부는 이미 알고 계셨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를 낳았고, 여러 번의 어려운 수술 속에서 아이와 함께 씩씩하게 병을 이겨내는 중이셨다. 문득 궁금했다. 보통 너무나 힘들게 예상되면 피하기 마련이지 않은가? 느닷없이 어려움이 닥쳐도 피하고 싶을 텐데, 목사님은 예고된 고난을 피하지 않고 온 몸으로 받아냈다. 그래서 조심스레 여쭤봤다. 따님을 낳고 키우는데 힘들지는 않으시냐고. 그때 목사님이 웃으시며 짧은 성경 구절을 소개해 주셨다.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요한복음 9: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