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농 Oct 29. 2021

일터에서 만난 연인. (2/2)

치과대학생 커플의 이색 데이트.

  설정과 연출이 판치는 드라마 속에서도 약간의 리얼리티는 살아있어야 한다. 예를 들면, 극 중 사망한 사람이 레게머리를 하고 살아 돌아오는 일은 없어야 하며, 마지막화 전까지 러브라인이 없던 남녀가 갑자기 결혼하는 일 역시 있어서는 안 된다.


 여자 친구와 내가 즐겨봤던 드라마 '슬기로운 의사생활'에서도 몇몇 리얼한 설정들이 등장한다. 그중 하나는 같은 과, 같은 연차에 러브라인이 없다는 점이다. 병원이 돌아가는 사정을 고려해보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첫째로, 각각의 임상과(ex. 신경외과, 산부인과)에서 뽑는 레지던트 인원은 기껏해야 2명이기에 둘만의 러브라인은 시청자들에게 자칫 작위적으로 보일 수 있다. 둘째로, 만약 작위적이라는 오해를 피해 러브라인을 이어가려 해도 메디컬 드라마의 필수 등장 장소인 수술실에 동기가 같이 들어가는 일은 드물다. 레지던트 때는 각자 다른 교수님 수술 보조해야 하며, 시간이 지나 펠로우 또는 교수의 자리에 올라가서도 수술실에 들어갈 때는 한참 어린 레지던트가 어스스트를 해주지 교수가 된 동기가 수술방에 보조하러 들어오는 일은 흔치 않다. 고로 작가가 동기 남녀를 커플로 만들기에는 인원 수도 너무 한정적이고, 수술방에서 만날 일도 없어서 케미스트리가 터지기 어렵다는 게 내 분석이다.


 그래도 메디컬 드라마 내에서 동기간 커플을 기어코 만들고 싶은가? 좋다. 하지만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커플이 될 두 주인공이 서로 진료-어시스트를 하는 장면은 되도록이면 빼야 할 것이다. 특히 수술 집도 경험이 부족한 레지던트 간의 진료-어시스트는 자라나는 사랑의 싹을 자르는 위험한 설정이 될 수 있다. 

 

 우리 커플의 실화들을 바탕으로 상기 의견을 갖게 되었다. 비록 슬기로운 의사생활에 나오는 인물들처럼 목숨이 위험한 환자를 구해내지는 않지만, 여자 친구와 나는 작년부터 슈퍼바이저 지도 하에 환자들에게 치과 치료를 하고 있다. 학생 치고는 생각보다 할 줄 아는 게 많다. 잇몸치료로 환자에게 코랄 핑크빛 잇몸을 되찾아 주고, 큰돈 깨지는 신경치료가 되기 전에 후딱 충치치료도 해준다. 물론 충치가 악화되어 신경치료를 해야 하는 상황에 닥친 환자에게는 먼저 심심한 위로를 건네고, 치료가 시작되면 얼굴에 물이 튈 수 있으니 포를 덮어 드린다는 배려심 깊은 이야기와 함께 환자의 걱정을 덜어준다. 포를 얼굴에 덮어드린 후에는, 졸업이 가까워졌다는 기쁨에 빠져 세상 행복한 표정으로 신경치료를 시작한다. 치과 치료할 때 물이 나와서 참 다행이다. 신경치료가 끝난 치아는 번쩍이는 금이나 뽀얀 도자기로 크라운을 씌워준다. 더불어 치아가 군데군데 빠진 분들에게는 사회생활과 음식 섭취가 가능하도록 틀니도 제작해드린다. 별미로 사랑니 발치도 한다. 나도 내가 미친것 같지만 치아를 뺄 때 순간의 손맛은 한번 경험해보면 잊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이다. 


 누군가 위의 치료들을 많이 해보았느냐고 물을 수 있는데, 사실 우리 수준에서는 각각의 술식을 기껏해야 열댓 번 하면 많이 해본 축에 속한다. 이 열댓 번이라는 숫자가 굉장히 오묘한데, 아무 사고 없이 열댓 번을 하면 우리는 우매함의 봉우리 위에 서게 된다. 책 한 권 읽은 사람의 자신감이 가장 높은 것처럼 어느 순간 술식에 대한 자신감만큼은 월드클래스가 되어버린다. 자신감만 치솟는 건 아니다. 훈수질도 덩달아 월드클래스가 된다. 


 치과치료는 신체의 일부를 째거나 깎기에 외과술식에 가깝다. 그럼에도 외과술식과 치과술식의 몇 가지 차이가 있는데 먼저, 전신마취를 주로 하는 외과와는 달리 치과는 부분마취를 하기에 환자의 의식이 깨어있다. 또한 환자와 술자의 얼굴 간 거리도 치과가 훨씬 가깝다. 외과 치료는 얼굴끼리 가까워 질은 거의 없지만, 치과치료 시에는 교과서적으로 30-45cm 정도 떨어진 거리에 서로의 얼굴이 위치해야 한다. 하지만 자신감만큼 실력은 올라오지 않았기에 조금이라도 시야를 확보하고 싶어서 나도 모르게 고개는 환자의 입을 향해 점점 쏠리게 된다. 지난날의 나의 치료들을 되돌아보면 실제 얼굴 사이 거리는 20-30cm 정도 되었던 것 같다. 누군가와 20-30cm 떨어진 곳에서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해본 적 있는가? 잘하면 상대방 숨결도 느낄 수 있는 거리다. 이처럼 가까운 거리, 환자의 또렷한 의식, 치과치료를 당한다는 불안감, 3가지 조건 속에서 어시스트가 던지는 훈수질은 잔뜩 모아둔 콜라에 눈치 없이 멘토스를 쑤셔 넣는 것과 똑같다. 거품이 하늘 위로 솟구치는 듯이 술자의 짜증도 폭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안다. 어시스트의 덕목 중 하나는 술자를 향한 신뢰이며(물론 환자에게 위해가 가해질 상황이라면 술자를 저지한다) 쓸데없는 말로 환자를 불안하게 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타인의 어시스트를 할 때에는 이러한 선을 잘 지켜는 편이지만 유독 여자 친구에게는 만큼은 훈수가 많아진다. 다른 기구를 쓰라는 둥, 거기서 그걸 바르면 안 된다는 둥 사랑을 핑계로 여자치구의 진료를 지나치게 간섭한 적이 몇 번 있다. 내 기억이 맞다면 눈치 없는 훈수질로 두 번 여자 친구에게 크게 혼났는데, 그중 한 번은 쓸데없는 자존심이 불쑥 튀어나와 

"너 때문에 치료시간이 늦어졌으니까 너도 사과해!" 

라는 택도 없는 소리를 한적도 있다. 나도 참 가관이다. 물론 그 말을 내뱉은 직후의 기억은 왠지 흐릿하다. 내 특기 중 하나가 힘들었던 기억을 빨리 잊는 것인데, 그때 나를 향한 여자 친구의 행동교정 이 꽤나 따끔했었나 보다. 


 그 이후 텔레비전에 나와 비장한 목소리로 당을 쇄신하겠다고 말하는 국회의원처럼 나 역시 회초리를 달게 받고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를 다짐했다. 그러고 나서 지금까지는 여자 친구를 보조했을 때, 그녀의 만족도가 높아졌다고 느낀다. 물론 여자 친구의 의견은 물어보지 못했지만 무소식이 희소식 아니겠는가? 


 어떻게 우매함의 봉우리에서 내려와 훈수질을 그만두었느냐고 묻는다면, 사실 훈수질은 확실히 줄었지만 여전히 남아있고 전략을 조금 바꿨을 뿐이다. 여자 친구 행동을 참견하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해지면, 이제는 권유 또는 명령 형태의 말투가 아니라 질문 형태로 말을 건다. 예를 들어 내 생각에 당장 이 기구가 필요할 것 같으면 

"이 기구 쓰실 건가요?"

교수님께 체크받아야 할 것 같은 상황이라면

"교수님께 체크받으실 건가요?" 

물론 이런 질문 형태는 안된다. 

"이 기구 쓰셔야 하지 않아요?"  또는 "교수님께 체크받으셔야 할거 같은데요?"

이럴 거면 어차피 똑같이 혼나는 거, 내 속이라도 시원하게 그냥 훈수질을 하는 게 낫다. 

 

 일터에서 만난 또는 만날 사이라면 우리 모두 훈수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상대방이 잘할 것이라는 믿음과 함께 이 또한 데이트라는 생각으로 그 순간을 즐기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고 좋은 결과를 이끌어 내는 것이야말로, 리얼리티가 판치는 내 삶 속에서도 여전히 남아있는 약간의 설정과 연출 아닐까? 

 

작가의 이전글 일터에서 만난 연인. (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