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라는 무례함>
어른들이 하는 말들은
다 걱정인 줄 알았다.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된다"
"왜 취업 안 하고 이걸 하니?"
"결혼은 언제 할 거니?"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라며
시험지를 만들어 놓고서는
하나씩 체크하며 점수를 매긴다.
처음엔 무덤덤했다.
다들 이러는 건 나에 대한 관심이라고,
어머니가 그렇게 말했으니까.
하지만 그 말이
반쯤은 거짓임을 깨닫기까지
오래 걸리진 않았다.
얼마 전, 누나와 매형,
그리고 어머니까지
네 식구가 함께 밥을 먹었다.
카페로 자리를 옮기고
대화가 길어질수록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도망치고 싶어졌다.
“취업은 어떻게 할 거냐?”
“공장이라도 가서 사람들과 어울려라.”
“외국 봉사활동은 어때?”
“운동 좀 해라.”
“이렇게 말하는 건 다 걱정돼서 그래.”
걱정이 과도해서였을까.
아니면 아이스 아메리카노로도
가시지 않는 피로 때문이었을까.
그날 밤,
나는 자꾸만 눈을 떴다.
한 시간마다 깨어나 발을 구르고,
새벽 네 시가 되었을 무렵엔
몸보다 마음이 더 무거웠다.
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까
왜 걱정인데도, 예민하게 반응할까
...
사실, 걱정이라는 무례함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속히 말하는
인생의 로드맵이 있다.
10대는 수능 점수가 좋아야 하고,
20대는 좋은 대학과 안정적인 직장을 가져야 하고,
30대는 적당한 나이에 결혼해 아이를 낳고,
40대는 육아와 일에 매진하고,
50대는 자녀 결혼을 바라보며 은퇴 준비를 하고,
60대는 은퇴 후 인생을 즐겨야 한다고.
“평범한 인생을 위해,
정해진 길을 따라야 한다.”
이 말은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의 신념처럼 굳어졌다.
그래서 어른들은
그 길을 벗어나려는 자식을 보면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되돌려 세우려 한다.
전쟁과 IMF를 지나온 세대.
그들이 자식의 미래를
염려하는 마음은 안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그때와 다르다.
나라 간의 분쟁,
AI와 불확실성,
계속되는 사회 분열,
그리고 차가운 취업시장.
그런데도 여전히
“정해진 길을 따라야 한다”는 말은
더 이상 걱정이 아니다.
이제는 무례다.
이른 아침,
스터디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책상 위에 쌓인 책들이 보인다.
수능 교재,
자격증 교재,
공무원 교재.
모두가 열심히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문득,
이 열정이 각자의 꿈에 쓰였다면 어땠을까
라는 먹먹함이 찾아온다.
사람은 다르다.
누군 글을 좋아하고,
누군 공구를 좋아하고,
누군 청소에 마음이 놓일 수도 있다.
그런 다양성을
‘평범함’이라는 기준으로 통일하려는 걱정은
때로는 우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족쇄가 된다.
“이 길이 아닌 것 같다”라고
어머니께 털어놓았던 날,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대학은 꼭 가야 한다.”
나의 불안보다
사회의 시선을
더 먼저 걱정하는 목소리였다.
그제야 알았다.
그 걱정은,
정말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걸.
그리고 나는 그날,
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내가 누군가에게 건넸던 말 중에도
‘걱정’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무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
나조차도 사람의 삶을
내 방식대로만 더듬었던
눈먼 자였을지 모른다.
이 에세이는
그런 나와, 내가 겪은
걱정에 대한 회고록이다.
당신도, ‘걱정’이라는 무례를 겪어본 적이 있는가?
매주 수요일 저녁 8시에 연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