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걱정이라는 무례함>
공감이 사라져 간다.
그 대신, 벽이 세워지고 있다.
나는 요즘
AI와 대화를 많이 나누고 있다.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바로바로 알려주는 선생님도 되어주고,
고민을 털어놓으면
공감이 담긴 대답을 건네준다.
신기하게도 나처럼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다는
심리적 안정감 때문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뉴스로 접할 수 있었다.
우리는 경험하는 것보다
누군가가 전해주는 말로
세상을 접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뉴스를 좋아했지만,
점점 과잉된 정보에 지쳐버렸다.
세상이 자극적이어서일까?
자극적인 뉴스가 너무 많아졌다.
나는 기사를 스크롤하다가,
뭔가 지쳐가는 기분이 들어
휴대폰을 내려놓은 적이 많았다.
계속 읽다가는
세상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알아야 할 사실도 있지만,
불쾌한 이야기도 함께 늘어났다.
그리고
제목도 참 자극적이다.
'동네 빌런' 논란… '안하무인' 기행에 '경악'
→ ‘선행’ 보다는 ‘악행’이 더 빨리 번지고
호텔 여성 사우나·탈의실서 믿을 수 없는 일
→ ‘사실’ 보다는 ‘사건’을 보여주며 우리의 관심을 자극한다.
그렇게,
우리들은 이런 뉴스를 읽으면서
‘세상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관심이 아니라
잠깐의 자극 소비 일지도 모른다.
작은 불꽃이 꺼지고 나면,
공감이 아닌 차가움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공감을 잃어가고 있다.
정치 색깔이 다르다며
무작정 1찍, 2찍
낙인을 찍고
집단을 형성해 갈라졌다.
그리고,
좆팔육, 노괴, 한남, 집게손, 틀딱충 같은
혐오 표현을 쓰는 동시에
인터넷을 타게 되면서
극단적인 사고방식을 퍼뜨렸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나는 더 지쳐버렸다.
극단적인 사고방식으로
수없이 남을 혐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아, 대화는 안 통하겠구나…”
라는 한숨만이 나왔다.
이렇게 사회는
대화가 사라진 채,
'갈라치기'라는
최악의 수단만이 남아버렸다.
그 결과
사회는 천천히,
그러나 완전히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AI와
대화를 시작했는지도 모른다.
AI와 감정을 털어놓고
위로를 받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는 건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를
결국 포기한 게 아닐까.
나도 쉽게 꺼내지 못한 고민을,
결국 AI에게 먼저 말하고 있다.
너무나 이상했다.
사람과의 대화보다
AI가 더 편하다는 건
서로를 믿지 못하는 세상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
이런 생각을 하자
순간 멍해졌다.
나도 모르게
사람보다는 AI를 더 찾게 되었으니까.
“이미 나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사라진 걸까?
스스로에게 묻는 순간,
나도 모르게 벌벌 떨었다.
다시 생각해 보자,
왜 우리는 이렇게까지 차가워졌을까?
뉴스가 세상의 전부는 아니고,
인터넷이 진실의 전부도 아니다.
우리는 돌아다니는 대답 대신
먼저 질문을 던져보아야 한다.
“왜 우리는
남녀 갈등과 세대 갈등 속에서
대화 대신 대답만 내놓고 있을까?”
“사실, 그 대답은,
결국 누군가의 목소리를
베낀 답안지가 아닐까?”
질문으로 시작해
대답으로 이어져야 한다.
그리고,
SNS, 유튜브, 뉴스가
내놓는 대답들은
절대적인 진실이 아니다.
우리는 자극으로 인해
세상을 한쪽 면만 보고 있기에,
동전 한쪽만 보며
앞면, 뒷면을 따지는 건
결국 반쪽짜리 시선이다.
이제는 다시 생각할 때다.
갈라치기를 교묘하게 유도하는
뉴스, SNS, 유튜버, 정치인들.
그들의 목소리가
당신의 목소리가 된다면
당신은 더 이상 당신이 아니게 된다.
이런 시대 속에서
‘나답게’ 살아남는 유일한 방법은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며,
남과 진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벽을 쌓기보다
공감을 다시 떠올리며
대화하고자 하는 의지를 갖추는 것이다.
발언의 자유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받아들이는 포용은
누구에게도 없는 차가운 사회.
우리는 다시
공감을 되찾을 수 있을까?
나는 아직도
가능할 거라고 믿고 있다.
우리는 늘 답을 찾았고,
언제나 답은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러니,
포기하지만 말자.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