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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라유리 Apr 12. 2022

작은 불행에 대처하는 자세

결국 불행은 없다

 모든 것이 절묘하게 '안'맞아 떨어졌다. 

과천에서 한 시간 조금 남짓 걸리는 서대문쪽으로 출장을 가야하는데 분주히 준비하고 있는 때마침 전화가 울린다. 마음은 급한데 재택근무로 착신전환으로 돌려놓은 휴대폰 응대부터 관등성명을 붙이지 않고 '여보세요~' 라고 한 것도 실수였다. 여기서부터 꼬여 말이 버벅거리며 제대로 안나온다. 

 간신히 통화를 마무리하고 열심히 지하철역으로 뛰어갔으나, 이미 4호선은 꽁무니를 보이며 떠나고 있다. 뒤 따라오는 열차는 상황판에서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경기도는 낮에 지하철이 띄엄띄엄 다닌다.) 이대로 가면 지각할게 뻔하니 급한대로 버스를 타고 사당으로 간다. 그런데 사당에서도 4호선은 내앞에서 아슬아슬하게 문을 닫으며 바로 떠나버린다. '이럴수가....!' 이제 어떻게 머리를 굴려봐도 제 시간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나는 대중교통으로 출장지에 성공적으로 도착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동원했다. 열심히 뛰어보기도 하고, 지하철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사당행 버스를 타는 대안을 선택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그게 통하지 않았을 때, 갑자기 모든 것이 허탈해지면서 마음속 깊숙히 감추어놓은 '불행'이라는 녀석이 서서히 떠오르기 시작한다. 그렇지만 그 순간 내가 들였던 노력의 댓가를 '불행'과 바꾸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그래서 선택한다. 


 바로 택시를 타는 것이다! 

'그래, 오늘 나는 택시를 탈 운명이었어. 갑자기 여름처럼 이렇게 더운날 서대문 언덕길을 삐질삐질 땀흘리며 헐레벌떡 뛰어갈게 아니지. 어차피 쥐꼬리지만 출장비도 나올거잖아? 그걸로 택시를 타고 여유있고 우아하게 간다고 생각하자' 라며 '불행'을 억지로 마음 속으로 구겨넣는다. 그렇지만 그게 그렇게 생각처럼 쉽게 되지는 않다. 

'조금만 더 빨리 서둘러서 준비할걸...'

'만약의 경우를 생각해서 시간 계산을 잘 해놓을걸....'

'아까운 택시비! 환승해서 버스타면 100원밖에 안드는데....'

'왜 하필 그 때 그 전화를 받아서, 전화를 그냥 씹을걸 그랬어...'

하는 온갖 자책과 후회와 절망이 머리속을 떠다닌다. 그러는 사이 지하철은 벌써 숙대입구에 도착해 드디어 택시를 잡기 위해 도로변에 섰다. 

 승객을 태운 택시 두 대가 빠르게 스쳐지나가고 '빈차'라는 빨간글씨에 무의식적으로 바로 손을 저었더니 어딘가를 급하게 가려다 만듯 택시가 급정거를 한다. 1분도 안 되는 시간에 택시를 잡은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잡아탄 택시 기사님을 보니 자주색 옷과 커트머리 웨이브에 선그라스 실루엣이 심상치 않다. 기사님은 할머니 택시운전사이셨다! 

  간혹 버스나 마을버스에서 여자 기사님을 본적은 있어도 택시를 운전하시는 여자 기사님은 처음이었다. 기사님은 방금 멋진 할머니 두 분을 남산에서 여의도까지 벚꽃길 드라이브를 해드리고 오는 길이란다. 신기하기도 하고 반가운 마음에 말씀을 나눠보니 자기는 70살이라며 (정확히는 올해 69세), 이렇게 나와서 돈벌이를 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셨다.

 

 "나는 딱 75살까지만 하고 은퇴할거야" 

 "앞으로 10년은 더 운전하셔도 충분할 것 같은데 아쉽지 않으셔요?"

 "75세 넘어서까지 하는 건 욕심이지."  

 그러면서 75세 이후에는 또 다른 계획이 있다고 하신다. 사람은 두 발로 걸어다닐 수 있다는 것 만으로도 행복한거라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갖고 살고, 남들한테 베풀면서 살라는 좋은 말씀도 해주셨다. 그리고 언제든 베풀수 있게 현금을 갖고다니는 여유는 있어야 된다고 하셨다. 5만원짜리는 급하게 부조할 일 있을때, 만원짜리는 이렇게 급하게 택시를 타거나 할 때, 천원짜리는 지하철에서 구걸하는 불쌍한 사람을 보면 주기 위해 갖고다녀야 한다고 덧붙이셨다. 생각해보니 나도 현금이 없어서 천원에 세개 하는 붕어빵도 못 사먹고, 비오는 날 학교 앞에서 장사를 하던 청년의 타꼬야키를 팔아줄 수 없었던게 떠올랐다. 화장실이 급해서 가려던 차에 내가 보여 그냥 태웠다고 하셔서 서울시교육청 화장실도 한번 써보시라고 안내해드렸다. 

 택시비는 정확히 6200원이 나왔다. 이만하면 괜찮다. 70세에도 주어진 인생을 나름 멋지게 만들고 계신 전문 여류 드라이버와의 만남에 낸 수업료치고는 참 저렴하다. 이번에는 현금을 드릴 수는 없었지만 다음에 급하게 택시를 타면 기사님께 드릴 수 있는 만원짜리 한 장은 챙겨서 다니는 여유도 내 삶에 장착하게 될 것 같다. 회의에는 5분 전에 도착해서 사람들과 담소도 하고, 여유있게 자료도 훑어볼 수 있었다.  

 인생에 숨어있는 우연한 사건들을 발견하는 재미를 '세런디피티'라고 한다. 인생은 이런 재미를 그냥 주지는 않는 것 같다. 몰래카메라나 깜짝이벤트처럼 불행을 가장하고 숨어있다가 갑자기 확 찾아와 놀래키는 방식을 더 선호하나보다. 


 오늘 나는 작은 불행을 마주할 뻔 했다. 불행에 그냥 휘말려들어갔으면 오늘 하루는 '불행'으로 남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때 잘 생각해봐야 한다. 

 '잠깐, 여기서 나에게 찾아오려는게 뭘까?' 

 그 순간은 바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전개될 나의 새로운 이야기에 마음을 활짝 열고, 나의 새로운 운명을 찾아보기로 마음먹어야 하는 순간이다.   

 

작은 불행에 속지 말아야 겠다. 결국 불행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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