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치지 못한 편지
선생님, 오늘은 좀 어떠신지요. 밤 새 통증으로 잠 못 이루셨을까 걱정이 됩니다.
지난주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선생님을 뵙고 난 이후 저는 요즘 시도 때도 없이 마음속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버릇이 생겼어요. 오늘은 그 마음을 둘 데가 없어 이렇게 글로나마 적어봅니다. 이 편지를 선생님께 드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선생님이 읽으시고 따뜻한 말로 제게 답장을 주실 수 있다면 또 얼마나 좋을까요.
오늘 아침에는 오랜만에 동네 뒷산에 갔습니다. 코끝이 시릴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겨울 산은 청량한 아름다움으로 저를 맞아 주었어요. 매일 새벽 산책으로 하루를 시작하시던 선생님도 이 풍경을 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마 곳곳에 이를 때마다 별 것 아닌 것에도 감탄사를 자아내며 카메라폰을 드셨을 선생님의 천진난만한 얼굴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뇌종양 수술 후 5주가 지났지만 아직 의식도 온전치 못한 채 병상에 누워 코에 꽂은 관으로 음식을 섭취하시는 선생님은 몰라보게 야위어 계셨어요. 그런 선생님의 모습에 저는 할 말을 잃고 힘없이 늘어져 있던 선생님의 손만 꼭 잡은 채 “선생님, 저 왔어요. 꽃 선생 왔어요.”라고만 되풀이했던 것 같습니다.
유난히 제가 만든 꽃을 좋아하셨던 선생님께 꼭 보여드리고 싶어 귀여운 소국 한 다발을 만들어 가져갔어요. 중환자 병동에 꽃은 금지 사항이었지만 이런 제 마음을 아신 남편분께서 몰래 가지고 들어가 “당신 좋아하는 꽃 가져오셨네.” 하시며 선생님 가슴 위에 살포시 놓아 드렸지요. 희미하게 웃으시며 ”고맙습니다.”라는 선생님의 목소리가 너무 가늘고 힘이 없어 저는 그만 울컥하고 말았습니다.
작년 9월 즈음 이던가요. 아직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로 기억합니다. 지인분의 소개로 처음 블루멘달에 오셨을 때 아이처럼 좋아하시던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50대 후반이라는 나이가 믿기지 않았던 건 아마 선생님의 천진난만한 표정 때문이었겠지요. 음악과 꽃을 대할 때마다 쏟아지던 예쁜 말들과 눈빛, 표정 속에서 저는 꽃보다 아름다운 선생님을 보았어요.
그 후로도 선생님은 종종 찾아주셨어요. 따님과 함께 또 멀리 캐나다에 살고 있는 친구분이 한국에 방문하셨을 때도 함께 오셨지요.
마지막으로 오셨던 건 작년 크리스마스 즈음, 한 해동안 고생하고 애쓴 후배에게 선물하고 싶다며 함께 오셨어요. 그때 우리는 Joni Mitchell의 깊고 우아한 목소리로 Both Sides Now를 함께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크리스마스 리스를 만들며 행복했어요.
언제 어디서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선생님은 소중한 사람들에게 추억을 선물하는 멋진 분이셨어요. 오늘 아침 라디오에서 ‘아름답다’의 ‘아름’은 ‘나다움’이라는 뜻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을 때 저는 선생님을 떠올렸습니다.
선생님이 그리신 그림 속에서 선생님은 늘 세상에 아주 작고 하찮아 보이는 것들에게도 ‘아름답다. 귀엽다 ‘말을 건네시는 것 같았어요. 저는 늘 그 따뜻함에 절로 숙연해졌습니다.
만날 때마다 “꽃 선생 주려고 가져왔어” 하며 아기자기한 선물을 양손 가득 안고 오시던 선생님. 선생님을 알게 된 건 고작 일 년 남짓이지만 그동안 선생님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던 저는 참 행복했습니다.
작년 말, 5년 전 발병했던 유방암이 뇌로 전이되어 뇌종양 판정을 받으신 선생님은 일 년 동안 항암 치료도 잘 견뎌내시며 뵐 때마다 “난 괜찮아. 아무렇지도 않아.” 하던 모습에 그저 잘 이겨내시는 줄만 알았어요.
마지막으로 뵈었던 지난 6월, 두부 정식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선생님은 몇 숟갈 못 드셨지요. 행여 우리가 걱정하고 신경 쓸까 다이어트 중이라고 하시던 선생님.
지난 몇 주간 인스타그램에 선생님 피드가 올라오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깨닫지 못했어요. 병원에 계신 지 벌써 5주나 되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토록 무심했던 제가 죄송하고 또 원망스러웠습니다.
선생님, 저는 이제 인생을 잘 모르겠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죽음은 무엇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삶을 이토록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던 한 사람의 육신이 왜 이렇게 빨리 무너져야만 하는 건지 원망스럽기만 합니다.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면 저는 이제 삶이 너무 두렵습니다.
어젯밤부터 내리던 거센 비바람에 낙엽이 다 지고 말았어요. 내일 아침부터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고 합니다. 선생님, 이제 정말 겨울이 오려나 봐요. 선생님과 함께 리스를 만들던 크리스마스도 곧 다가오겠지요.
정말 보고 싶습니다. 선생님.
선생님의 꽃 선생 블루멘달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