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라나시(Varanasi),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 있는 도시
대학시절 나는 도서관에 책을 구경하기 위해 자주 기웃거렸던 편이다. 책장 속을 여행하듯 걸으면서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가 재미있는 책을 발견할라치면 매우 행복해하곤 했다. 그 시절 우연하게 발견해서 읽었던 책들 중에는 노베르토 엘리야스(Norbert Elias)의 『죽어가는 자의 고독』이라는 책이 있었다. 죽음의 사회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책은 죽어가는 사람이 고독한 이유가 생물학적인 죽음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자를 사회적으로 배제하는 현대문명에 있다고 진단한다. 사람들은 죽음이라는 불편하고 불쾌한 사실을 요양원과 병원이라는 시스템을 통해 일상에서 배제시킨다. 늙어간다는 것, 죽어간다는 것, 그 쓸쓸함에 대하여 생각해본다.
바라나시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는 도시, 인도의 갠지스가 흐르는 성스러운 도시, 복잡한 골목과 푸자의식이 있는 도시 그리고 한국만화를 마음껏 읽을 수 있는 라가까페가 있는 도시였다. 바라나시는 인도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도 필자가 꽤나 오랜 시간 머물렀던 도시 중 하나이다. 그 독특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서 그랬고, 편안하게 한국만화를 읽을 수 있는 가게가 좋아서 그랬다. 카페 안에서 식사를 하고 눌러앉아서 만화를 보고 있노라면 골목길로부터 장례행렬이 지나가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번듯한 관도 아닌 흰색 천으로 꽁꽁 싸매 여진 시신을 나무를 엉겨 엉성하게 만든 들것에 실어 머리 위로 들고 지나가곤 했다. 인도에서의 죽음은 지금 이곳의 현실이었다.
인도 사람이라면 누구나 갠지스를 신성하게 여긴다. 갠지스는 신의 머리로부터 흘러나와 신에게로 되돌아간다고 믿었다. 갠지스 강물에 몸을 담그는 것도, 갠지스 강물을 떠마시는 것도, 그 갠지스 강물 위로 유골을 뿌리는 것도 인도 사람들에게는 생명의 행위다. 갠지스에 실려 그 영혼이 신에게로 회귀한다는 믿음 때문에 바라나시 강가에는 화장터가 노천에 있다. 당연하게도 노천 화장터에 전시된 죽음에 대해 사진을 찍는 행위는 금지되어 있다.
대부분의 경우 화장 이후에 갠지스에 뿌려지지만 세 부류의 사람은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그대로 갠지스에 띄워 보낸다. 사제, 임신한 여인, 아기의 경우이다. 이 세 부류의 시신에 대해서는 왜 화장하지 않고 그대로 갠지스에 띄우는지에 대해서는 특별하게 기억나는 바가 없지만, 연약한 생명, 혹은 좀 더 보호받아야 할 생명에 대한 존중이 아닐까 싶다. 갠지스는 그렇게 삶과 죽음을 실어 나르는 강이다.
이른 아침 나가면 갠지스에서의 일출을 맞이할 수 있다. 이전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일출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느낌이 특별했다. 삶과 죽음의 도시에서 떠오르는 태양이라서였을까?
하지만 갠지스강은 실제로는 그렇게 깨끗하지도 않거니와 사실은 냄새가 나는 편에 속한다. 강가에서 열리는 각종 푸자의식으로 인해 사람들이 항상 넘쳐나거니와, 강가에서 빨래를 하는 사람들에, 버려진 온갖 쓰레기들이 엉켜있어서 갠지스의 거룩함을 믿는 것과 별개로 강물 자체는 우리 상상과는 많이 다르다. 인도 사람들은 플라스틱 병에 강물을 담아가 고향에 있는 가족들에게도 나눠주는 모양이자만, 여행자들이 인도 사람처럼 그 거룩한 강물을 날것으로 마셨다가는 며칠을 앓아눕기 십상이다. 갠지스는 오직 인도 사람들의 몸속에서만 흘러간다.
나는 부자도 가난한 자도 결국 죽음이라는 문으로 들어서고 나면 모두 똑같다고 생각해 왔다. 죽음은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심연이다. 적어도 바라나시 이전에 내 생각은 그랬다.
노천 화장터는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였다. 죽음을 목전에 둔 사람들이나 노인들은 갠지스에 묻히기 위해 바라나시로 향한다고 했다. 화장터에서는 언제나 자욱하게 연기가 피어올랐고, 연기가 피어오르는 화장터뿐만 아니라 바라나시 전체에 죽음의 연기가 구석구석 퍼져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바라나시 노천 화장터에서는 화장을 하기 위한 나무 장작을 유족이 별도로 돈을 주고 구매해야 한다. 그래서 금전적인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충분한 수량의 좋은 나무 장작을 구해다가, 충분한 화력으로 화장을 진행한다. 하지만 화장하기에 충분한 나무를 구매할 능력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도 그곳에 있었다.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고 남겨둔 흔적- 이미 화장에 한번 사용되어 일부가 타버린 나무들, 타다 남은 장작, 잔나무가지들, 혹은 숯더미들을 모아 와야 했다. 가난한 사람은 그 죽음마저도 초라했다. 그는 타인에게 손을 벌리지 않고서는 마지막까지 편안히 누울 수 없었다. 평생을 가난했던 그에게는 별로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남은 자들의 손을 이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빌리면 족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언제나 죽은 자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남은 자들에게 문제가 된다.
부자의 죽음과 가난한 자의 죽음은 달랐다. 그동안 내가 배워왔던 그 어떤 철학도 이 씁쓸함을 씻어낼 수 없었다.
하지만 부자의 눈물도, 가난한 자의 눈물도 결국 갠지스에 실려 떠내려간다. 흐르고 흘러가면서 갠지스는 죽음을 싣고 간다. 죽음을 싣고 가기에 갠지스는 생명을 노래하고, 생명을 노래하기에 갠지스는 신성하고 거룩하다. 그래서 갠지스는 오직 인도 사람의 몸속에서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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