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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Aug 15. 2024

특이한 조합, 광란의 미케비치로.

  고등학교 때는 살던 동네가 싫어 다른 동네로 지원해 학교를 다니다 보니 친한 친구가 몇 없었다. 대학교 친구들은 결혼을 하면서 공대 나온 남편들의 직장 쪽으로 다들 이사를 가면서 차츰 멀어졌다. 초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들은 부모님들이 학군이 좋은 곳으로 옮기는 바람에 우리 동네를 떠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때는 삐삐도 핸드폰도 없던 시절이라 다시 연락이 닿지 않았다. 그래서 그나마 중학교 때 친구들이 많이 남은 편이다. 중학교 때까지 동네에 남은 친구들은 부모님이 그 동네를 떠날 마음이 없거나 떠날 수 없었던 사정들이 있었다. 그 바람에 우리는 구로동 토박이라는 공통점으로 묶여 서로의 속상한 가정사와 비밀들을 공유하며 끈끈해졌다. 우리는 대개 구로동에서 고등학교까지 나오거나 선지원을 해서 다른 동네의 학교에 갔다. 나는 다른 동네의 학교를 갔지만 계속 동네 친구들과 어울렸다. 동네 친구들 여럿과 몇 년을 어울리다 보니 사실상 멤버가 추려졌다. 

  우리는 고등학교 때 같은 도서관을 다니면서 모의고사를 본 날은 서로 힘들어하기도 하고, 속상한 날은 바깥에서 종종 술을 마시기도 했다. 이 친구들은 전부 남자친구들인데 여태까지 내가 사귀었던 남자들이 전부 이 친구들을 싫어했고, (서로의 남사친과 여사친을 좋아하는 연인은 굉장히 드물기에) 유일하게 이 친구들과 잘 어울렸던 단 한 명의 남자친구가 지금의 내 남편이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 모임이 신기하게 잘 유지되고 있다.

  선은 내 소개로 내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했다. 결혼식 때 고맙다고 내게 선물을 주었을 때 이상한 책임감에 어깨가 무거웠다. 그들이 제발 잘 살아서 나를 원망하는 날이 없기를 바라면서 중매쟁이들은 이런 부담을 어떻게 견디는지 새삼 궁금했다. 호는 중국에서 일을 하다가 현지에서 만난 어리고 참한 사람과 결혼을 했다. 이후 친구 부부는 중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우리의 친한 친구가 되었다. 성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유창한 영어 실력을 선보이던 동갑내기 여자에게 반해 일찍 결혼했다. 그 바람에 돈 없던 우리는 성에게 허접한 웨딩카를 꾸며주었다. 그리고 나는 해산물을 잘 사주는 오빠와 결혼했다. 신기하게도 우리 넷은 아이를 하나씩 낳고 지금껏 만나고 있다.

  만남이 유지되려면 무조건 회비를 걷어야 한다는 누군가의 말에 꾸준히 회비를 걷으면서 어떤 날은 술을 마셨고, 어떤 날은 풀빌라를 빌려 아이들을 왕창 데리고 와 보물찾기 프로그램과 에어바운스를 태우며 1박으로 술을 마셨다. 그러다 이번에 처음으로 충동적인 해외여행을 함께 하게 되었다. 시작은 우리 가족이었다. 

(카톡) 우리 이번에 베트남 다낭 갈 건데 같이 갈 마음 있음?

         어디로 갈 건데? 비행기 얼마야?

         링크 보낼게.

         가격 좋은데? 우린 콜. 다른 애들한테도 물어볼까?

         단톡에 남겨보지 뭐. 다른 애들 안되면 그냥 우리 두 가족이라도 가자.

         좋아!

  이 대화를 시작으로 하루 만에 네 가족이 너도나도 뭉친 것이다. 여행 일자가 다가오자 이상하게 설레고 신기했다. 결혼하면 남사친들 다 끊긴다고 그렇게 여러 사람에게 들어왔는데 그 부인들하고 합심해서 아이들까지 몽땅 데리고 해외여행이라니. 아침 일찍 공항에서 만난 친구들의 얼굴이 낯설었다. 중학교 때부터 25년 동안 꾸준히 만나면서 서로의 역사를 위로하고, 가끔은 크게 싸우고 안보기도 하면서 그렇게 지내왔다. 이성 친구가 생겼을 때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개는 1년이면 다시 술 마시자며 연락을 해왔었다. 그리고 이렇게 인천공항에 어색하게 모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제, 미케비치 해변이 보이는 펍에 다들 길게 앉아 있다. 다 같이 한시장으로 몰려가 베트남 전통 의상인 아오자이를 입고. 오늘 하루 빡세게 호이안 올드타운 스케줄을 소화한 우리는 마지막 밤을 이렇게 끝낼 수 없다며 늦은 시간에 도착한 그곳에서, 테이블에 무수한 음식과 엄청난 술병들을 놓고, 기억나지는 않지만 재밌는 이야기에 한껏 웃으며, 구로동 살던 애들이 이렇게 해외여행도 오고 성공했다며 서로를 격려했다. 

  다음날 한국에 돌아가기가 싫었다. 친한 사람들과 일상을 떠나와 새로운 생활을 공유한다는 기쁨이 이렇게 크다는 걸 여태껏 몰랐다. 그러니 지금까지 못해본 좋은 경험이 얼마나 더 많을까?


  그날 살면서 단 한 번도, 아무리 취하더라도 샤워는 반드시 하고 잔다는 성은 샤워는 고사하고 소파 위에서 허리가 꺾인 채 잠들었다. 술을 잘 마셔서 밤을 새우고도 늘 새벽 운동을 하던 선은 다음날 운동을 가지 못했다. 나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바닥에 있는 대왕 달팽이를 보지 못하고 밟고 말았는데 그 죄 때문인지 아침에 일어나니 왼쪽 손가락에 감각이 없었다. 머리도 묶을 수 없어 덜컥 겁이 나는 바람에 아침부터 친구들 사이에서 호들갑을 떨던 나는 인터넷을 찾아보다 어느 의사의 답변을 발견했다.

‘보통 주무시는 과정에서 척골신경이나 요골신경 쪽이 눌리면서 발생하는 증상입니다. 엄청나게 피곤할 때나 술 먹고 깊이 자고 난 이후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왠지 조금 창피했다. 


  곧 있으면 우리는 모두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고, 내 손가락도 정상으로 돌아오겠지. 이런 경험이라면 앞으로도 많이 하고 싶다. 손가락 마비는 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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