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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가다 Sep 27. 2024

엄마를 이해하기 위하여

언니, 단 하루만이라도 엄마와 같이 있을 수 있는 날이 우리들에게 올까? 엄마를 이해하며 엄마의 얘기를 들으며 세월의 갈피 어딘가에 파묻혀있을 엄마의 꿈을 위로하며 엄마와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내게 올까? 하루가 아니라 단 몇 시간만이라도 그런 시간이 주어진다면 나는 엄마에게 말할 테야. 엄마가 한 모든 일들은, 그걸 해 낼 수 있는 엄마를,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엄마의 일생을 사랑한다고, 존경한다고.

- 신경숙, ‘엄마를 부탁해’ 中 


   짧은 커트 머리에 카라넥 반팔 티셔츠 차림으로 민트색 바구니를 들고 활짝 웃고 있는 사진 속 여자. 바로 나의 엄마다. 엄마는 그때 30대 초반이었고, ‘성민’이라고 하는 봉제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공장 사람들과 단체로 간 야유회의 노래대회에서 2등을 한 엄마는 상품으로 민트색 바구니를 받아 들고는 카메라 앞에서 활짝 웃어 보였다.


  그 사진을 설명하던 엄마의 목소리는 꽤나 들떠 있었다. 그러다 신이 나셨는지 국민학교와 중학교 시절, 체육 대회에 나가 받은 공책이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 웅변대회와 노래대회에서 어떻게 쟁쟁한 경쟁자들을 제치고 상을 휩쓸었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하셨다.     


“그때는 진짜 나도 한 따까리 했지! 어디 가서 주눅 드는 법이 없었으니까! 악바리처럼 달려드는데 누가 나를 이기겠어!”

     

  엄마는 그렇게 말하면서 기분 좋게 상기된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남학생들도 자기한테 한 번 걸리면 얻어터지는 일이 많았다는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늘어놓으며 호탕하게 웃는 사람. 엄마는 항상 에너지와 흥이 넘쳤고, 친구가 많았다. 또 어릴 때부터 집 안에 손님이 많아 음식을 많이 해야 했던 엄마는 화통한 성격만큼이나 손도 컸다.     


  엄마는 시골 마을의 4남 2녀 중에 다섯 번째 딸로 태어났다. 첫째였던 큰 이모는 일찍이 서울에 식모살이로 갔다가 그 집 사람들의 눈에 들어 운 좋게 대학까지 가게 됐다고 한다. 둘째 삼촌까지는 서울로 대학을 갔고, 아래 삼촌도 고등학교까지는 나왔지만 집안 환경으로 대학에는 가지 못했다. 첫째도, 아들도 아니었던 엄마가 초등학교 때와 중학교 때의 무용담만 꺼낼 수 있는 이유는 고등학교에 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외할아버지한테 맞으면서도 고등학교에 보내 달라고 울며 불며 떼를 썼지만 끝내 입학할 수 없었다.


“그때 내가 두드려 맞으면서 고등학교에 가겠다고 소리를 지르는데 엄마도 아빠도 돈이 없다는 거야. 분명히 부엌 위 선반 솥 안에 돈이 잔뜩 있는 걸 봤는데. 내가 악에 받쳐서 부엌에 돈 있잖아요! 하고 소리 질렀더니 그건 니 오빠 학비라고 얼마나 혼내는지 몰라. 아우 진짜 그때 얼마나 서러웠는지 참.”

엄마는 말끝을 흐리고 아무것도 없는 방의 벽 한 면을 얼마간 흐릿하게 바라보셨다.      

 

  그렇게 엄마는 중학교 졸업 후 고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하고 일찍부터 도시로 나와 삼촌의 소개로 공장 일을 시작했다. 필름 회사부터 봉제공장까지 닥치는 대로 일을 했던 그야말로 막무가내 소녀였던 엄마는 그 시대의 다른 여자들처럼 중매로 아빠를 만나 결혼하면서 일을 그만두었다.


  1985년. 아빠의 사업이 실패하고 아빠 혼자 집을 나가 연락이 끊긴 시간이 3년 정도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엄마에게 몇 만 원을 쥐어 주며 조금만 버티고 있으면 금방 본인이 사태를 수습하고 돌아온다고 했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아빠는 오시지 않았다. 엄마는 내내 아빠를 기다리다 쌀이 떨어질 지경에 이르자 아이들을 굶길 수 없어 5살 아들과 3살 딸을 두고 걸어 다닐 수 있는 공장에 나가기 시작했다. 딱히 아이를 돌봐 줄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점심시간이 되면 마음 졸이며 집으로 뛰어와 우리에게 점심을 차려주고는 다 먹는 걸 지켜볼 새도 없이 또 황급히 공장으로 향하는 생활을 3년 동안 반복했다.


  엄마는 집에 들르다가 가끔 골목 뒤에 숨어 3살 딸아이가 싼 똥을 신문지로 돌돌 싸서 동네의 공동 쓰레기통에 버리는 5살 아들의 모습을 훔쳐보며 많이 울기도 하셨단다. 오빠가 동생을 잘 챙기는 것을 확인하며 엄마는 악착같이 일했다. 화장실도 없는 단칸방에 빚쟁이들이 찾아왔을 때는 그저 "죄송하다, 미안하다, 갚을 돈이 없다."며 있는 것을 내주었다. 그러다 빚쟁이들이 죽도 쑤어지지 않는 정부미까지 싹 다 퍼갔을 때부터는 이판사판으로 악다구니를 쓰며 욕지거리를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일을 겪고도 단 한 번도 세상을 등지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생에 대한 욕구가 에너지가 되어 살아내고 살아내었다. 그렇게 엄마는 기약 없는 3년 동안 한 가정을 책임지고 이후에도 계속 일을 놓지 않으셨다.


   강한 엄마는 늘 아빠 앞에서만 약했다.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보내며 가끔 엄마 아빠가 부부싸움 하는 모습을 보면 아빠는 논리에서 밀리면 언성을 높이는 듯했다. 아빠의 입장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으나 행위만 놓고 볼 때 분명 엄마가 더 옳음에도 아빠가 큰 소리를 내기 시작하면 엄마는 입을 꾹 다물고 말끝을 흐렸다. 그럼 아빠는 뭔가 기세가 더 등등해져서 기분이 풀릴 때까지 몇 번 더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나중에 의아해서 물었다.


“엄마. 내가 보기엔 아빠가 훨씬 더 잘못했는데 왜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해?”      

“그래야 끝나. 아빠 성격 알잖아. 아빠가 나보다 나이도 많고.. 아빠니까. 그냥 내가 참는 거야.”라고 했다.     

엄마는 자기가 부모에게서 받아왔던 대우를 그대로 체화해 버렸다. 그래서 내게도 그 유산을 물려주고자 했다.     

“그래도 오빠가 너보다 더 잘 돼야지. 넌 시집가버리면 그만이지만 오빤 그게 아니잖아. 남잔데.. 한 가정을 책임지려면..”     

  나는 한 번도 아빠가 우리 가정을 책임지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건 누구보다 엄마가 더 잘 알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게,     

“정말 너 안 낳았으면 어쩔 뻔했냐? 답답해서 죽었을 것 같다 야.”     

하고 소통 없는 아들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답답함을 하소연하시고는 했다.


  오빠는 아직 미혼으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다. 그렇게 사랑하는 아들 욕은 죄다 딸한테 하면서도 웃으며 오빠를 대하는 엄마를 보면 그저 신기했다. 아마도 엄마는 아들의 부족한 면을 아픈 손가락이라는 미안함으로 빼곡히 채우시는 듯했다. 힘들었던 시절, 첫째인 아들에게 동생을 돌보도록 큰 짐을 지운 것 같아 안타깝고 나보다 2살이 많다 보니 기억하지 않아도 될 아픈 장면들까지 대부분 기억하고 있는 오빠가 가엽다는 말을 늘 달고 다니셨기 때문이다. 엄마의 무심한 말도, 이해할 수 없는 하소연도 이제는 엄마가 우리를 사랑하는 방식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는다.


   아무튼 그렇게 항상 아빠에게 지던 엄마가 크게 이긴 적이 있다. 엄마는 이혼 직전의 싸움에서 여태까지 아빠와 다투면서 조금씩 모아두었던 에너지를 모두 쏟아부었다. 당시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부부싸움 후의 집의 몰골은 처참했다. 큰 도자기가 깨져있었고, 집 안이 온통 엉망이었다.


“뭘 집어던지길래 내가 확 도자기를 그 앞에서 깨버렸어. 그리고 멱살을 잡고 막 흔들고 확 패대기쳐버렸어. 니 아빠 힘센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 확 나자빠지더라고. 내가 그렇게 나오니까 당황했는지 아무것도 못하는 거 있지? 어찌나 속이 시원한지!! 정말 속이 다 시원하더라! 아이고 시원해라!!!”


  난 멍하니 그 얘기를 들으며 아빠를 만날 때부터 차라리 지금처럼 해왔다면 어땠을지 생각했다. 누가 뭘 던질 때 더 큰 것을 던지라는 뜻은 아니지만 그냥 엄마의 생각을 엄마의 성격대로 말해 왔다면 지금 이렇게 큰 한 방으로 터지진 않았을 것이다. 엄마는 이혼을 결심하자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아빠에게 보였다. 마치 남자애들을 꼼짝 못 하게 두들겨 패던 국민학생 때의 엄마처럼. 아빠는 엄마를 몰랐다. 적어도 내가 보기에는 지는 게 이기는 거라는 말 속에 가부장적 윤리를 꾸역꾸역 쑤셔 넣어 실행에 옮겼던 엄마의 노력을 아빠는 보지 못했다.


  엄마는 70이 가까워진 지금도 경제활동을 하신다. 돈을 벌지 않으면 불안하다시며 N번째 직업인 요양보호사로 고군분투 중이시다. 엄마는 요양보호사로 겪게 되는 하찮고도 서러운 이야기들을 아직도 내게 한 움큼씩 쏟아내신다. 그리고 가끔 내가 집에 가면 오랜만에 딸내미가 온다고 만들기 귀찮다던 만두를 당신의 큰 손으로 몇백 개는 만드신다. 그럴 때면 나는 괜히 고생스러운 일을 한다며 엄마를 타박하고는 엄마의 손만두를 두 손 가득 싸 들고 와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는다.


  나는 이런 엄마의 행동들을 언제쯤이면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까. 신경숙의 소설처럼 엄마를 잃어버린 후에나 알 수 있을까 걱정이다. 그러지 않으려면 부지런히 엄마를 떠올리고,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부단히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야겠다. 엄마에게는 아직도 내가 한참 모르는 엄마의 삶들이 녹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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