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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은 홍시가 된다 Aug 07. 2024

신치토세 공항에서 밤 비행기 놓쳤을 때 할 일

신치토세 찜질방(?)을 즐길 것

나의 회사(이제 퇴사했으니 '전'회사인 것으로...)는 교대 근무제인 대신 여름과 겨울에 각각 11일과 9일의 장기 휴가를 부여한다. 그리하여 얻은 11일 간의 귀중한 휴일.

티켓 값이 저렴하면서도 도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가고 싶었다. 약간의 현실 도피성 사고 회로일지도 모르지만. 돗토리 현이나 아오모리 시 같은 관광객이 잘 안 가는 지역에 가고 싶었으나 관광 수요가 적은 만큼 교통비가 무시무시했다. 편도가 20만 원이라니!

결국 6년 전 패키지 투어로 한 번 다녀온 적이 있는 홋카이도행 티켓을 끊었다. 왕복 10만 원도 안 하는 가격에 나름 만족하며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말 아무 계획이 없는 즉석 여행이었다.



 2박 3일이었는데, 마지막 날은 이동 시간만 10시간이 넘는 스케줄을 소화하다 그만, 도쿄로 돌아오는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홋카이도의 땅 크기는 체감상 러시아만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나 자신, 일부러 놓친 게 아닌 가 싶기도 해. 사실 그 다음 날 중요한 일이 없었으니 가능했던 '모 아니면 도 일정'이었다. 패키지 투어의 일정이 이러하였다면 그 여행사는 쥐도 새도 모르게 망해버리고 말았을 거다.

홋카이도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써 보도록 하겠다.



아무튼,



어찌저찌 이륙 직전에 공항에 도착했고, 10kg 되는 배낭을 멘 채 숨이 턱끝까지 차오를 만큼 뛰었다. 솔직히 말해 정말 토가 나올 뻔했다. 체크인 카운터의 불은 거의 다 꺼져 있었고, 딱 한 곳 불이 켜져 있는 자리에는 이제 아무도 자신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듯한 신비로운 아우라로 컴퓨터 화면에 몰두하고 있는 한 직원이 보였다. 내가 말을 걸자 털끝만큼도 예상치 못한 일이 발생한 것처럼 눈을 똥그랗게 뜬 직원은 금세 '일 모드'로 전환하여, "체크인은 이륙 1시간 전까지만 가능하시구요, 환불도 안 되구요, 다음 날 가장 이른 티켓을 알아봐드리는 것만 가능합니다." 문장에서 억양을 최대한 단순화 시킨다면 이런 느낌일 듯했다.

늦게 도착해도 이륙 전이라면 VIP통로인지 뭔지로 프리패스 시켜 준다는 출처 불명의 이야기를 은연중에 믿고 있었던 나. 하하. 어쩔 수 없지!


한 번 더 사 버린 비행기 티켓



다행히 도쿄와 홋카이도를 이어주는 비행기 티켓은 저렴한 편이다. 그래서 여길 온 것이기도 하지만, 아무튼 계획에 없던 허무한 소비를 해 버렸다는 상실감도 있었다.


그러나 공항 노숙 경력이 꽤나 두터운 나, 오히려 좋아! 하며 카운터 앞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급히 사 온 샌드위치를 먹고 있는데, 경비하시는 분이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설마 여기서 노숙하려는 셈은 아니죠? 밤 11시에 공항 문 닫아요. 노숙 안 됩니다. 공항 내 호텔이나 온천 가세요.



오, 이거야말로 정말 예상 못 했던 일이었다. 헬싱키 공항에서는 몇 번이고 공항 내 벤치에서 밤을 샐 수 있었는데, 여기는 문을 닫는구나!

티켓 값을 두 배로 지불한 것도 모자라 내일 아침 비행기를 타기 위한 숙박비마저 지불해야 한다니. 앞으로 나의 계좌 내역을 우연히라도 보고 싶지 않은 기분에 휩싸였다.




공항 내 호텔은 왠지 비쌀 것 같았다. 온천에 가기로 했다. 어딘지 몰라 네이버에 막 검색해보았다. 공항 한복판에서 묵직한 백팩을 메고 두리번거렸다.



겨우 찾은 찜질방(온천)은 4층에 있었다. 4층으로 가는 엘리베이터가 많지 않아서 더 찾기가 어려웠다. 앞에서 한 시간 정도 망설이고 있었다. 들어가면 돈을 지불해야 하는데, 그냥 아침 6시까지 몇 시간만 이 앞에서 죽치고 있으면 안 되는 건가! 입구 앞에 두 명이 있었다. 한 명은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을 보고 있었고, 한 명은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도 여기 녹아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조금 떨어진 의자에 무심히 앉아있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그 둘은 어디론가 짐을 챙겨 떠나 버리고 없었다. 밤 11시, 아무도 없는 찜질방 입구에 홀로 남겨진 나는 결국 입장을 택했다.






입장료 안에 목욕 비용과 수건, 빌려 입을 옷 등의 비용이 전부 포함되어 있었다.

1박에 5천 엔 안팎이었다.


탈의실 사물함 열쇠



46도쯤의 무시무시한 온도가 적힌 전광판이 달린 뜨거운 방이 있어서 찜질방이라 부르는 건 아니지만, 목욕탕이 있는 것 외에는 한국에서 통용되는, 그러니까 숙박을 위한 찜질방과 다를 바 없었다.

목욕탕은 물론, 남자와 여자를 구분한 휴게실이 있었고 그 내부는 꽤나 근사했다. 수십 개의 1인용 리클라이너 소파가 줄맞춰 배치되어 있었고 그 위에 누워 마치 고글을 끼는 듯한 모양새로 가리개를 내린 사람들의 모습은 명탐정코난 6기 극장판 '베이커가의 망령'에 나오는 가상 현실 게임 '코쿤'을 떠올리게 했다.




명탐정코난: 베이커가의 망령 中


리클라이너 소파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나는 진심으로 여기서 한 달은 그냥 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휴게실 앞


당연히 내부 촬영은 불가능했지만 아무튼, 그 리클라이너 의자에는 개인용 텔레비전도 하나씩 딸려 있었다. 이어폰도 있었고, 얇은 수건 이불도 가져올 수 있었다.

코를 고는 사람이 꼭 한 명쯤 있다는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지만!


콘센트가 달려 있는 소파를 친절히 표시도 해 놓았다.


아, 그러고 보니 귀마개도 있었던 것 같다. 잠이 안 와서 이 찜질방 복도에서 혼자 노트북을 보다 새벽 3시 넘어 잠들었는데, 너무 깊이 잠든 나머지 진동으로 해 놓은 알람을 전혀, 정말 전혀 못 들었다(...). 천만다행으로 새벽 6시에 온천 전체 방송을 하더라('조식 드세요!'). 그걸 듣고도 한참 뒤에 겨우 깼다는 것 아니겠는가... 비행기를 또 놓칠 뻔했다!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복도. 물과 차, 커피는 무한리필이다.


복도 곳곳에 콘센트가 있어 편리했다.

차갑지만 맨발로 다닐 때의 짜릿함이 그대로 전달되는 이 마룻바닥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속 여관에서 바닥 청소를 하던 주인공을 떠올리게 했다.



조식은 이런 느낌.


조식은 기본 빵과 기본 주먹밥이 전부지만, 무료다. 잠을 3시간밖에 못 잔 나는 입맛이 영 없어 우선 크로와상만 하나 입에 욱여넣고 온천을 나왔다.






앞으로 삿포로 오는 사람들에게 다른 곳보다도 신치토세 공항의 온천을 적극 추천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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