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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혜리 Jan 15. 2024

정직원은 아니지만 좋아서 하는 일

제3장 밥값 하는 번역가의 생존기

번역가의 업무란 주어진 원문을 정해진 언어로 ‘잘 번역하면’ 된다. 그 원문에 대한 분석 또는 평가를 하거나, 번역 후기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저 번역만 하면 내가 할 일은 모두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간혹 일을 하다 보면 ‘어? 이게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는 것은 아니다. 번역 일감이 어떤 내용인지에 따라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흔하지는 않지만 어떨 때는 내게 주어진 역할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마케팅 분야를 번역할 당시, 회사의 지침에 따라 A와 관련된 정보를 조사한 후에 번역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리서치해 보니, 회사에서 원하는 A라는 내용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해당 정보가 없을 때는 어쩔 수 없으니 회사 지침에 따라 ‘없음’으로 표기하고 건너뛰어도 됐었다. 하지만 나는 부족한 A에 대한 정보를 보충할 수 있는 B에 대한 정보도 정리해서 추가 파일로 만들어 제출했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인도네시아어로 일을 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즐거웠기 때문에 시키지 않아도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더 조사했다. 


내 파일을 받은 회사의 반응은 어땠을까? 나중에 들어 보니, 인프라가 부족한 현지 사정 때문에 A 관련 정보가 많지 않을 것으로는 점은 회사도 이미 어느 정도 예상했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찾은 B 내용 덕분에 부족한 A 부분을 보완하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게 되었다며 나에게 고맙다는 회신을 보내왔다. 그 메일을 받은 나 역시 기뻤다. 단순히 계약서로 맺어진 갑과 을의 계약 관계가 아니라, 서로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받는 좋은 업무 파트너를 만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로 해당 회사는 내가 그동안 일했던 회사 중에 가장 오랫동안 함께 일을 하는 파트너사가 되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열심히 노력하면 그 끝은 좋은 결말이 있을 것이라는 해피엔딩이 아니다. 솔직히 그 회사는 나에게 행운과도 같았다. 초심자의 행운이라고 말하면 적당할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얻은 초심자의 행운이 언제까지나 지속될 것이라는 맹목적인 믿음을 갖지 않았다. 지금 당장이라도 갑자기 그 행운이 날아가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 나름의 행운을 붙잡아 둘 소소한 노력을 했을 뿐이었다. 




“정직원도 아닌데 뭐 때문에 그렇게까지 해?”


“거기 직원들이 별로 고마워하지도 않을걸?”




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요청받은 업무 외에 내가 추가로 했던 노력은 오로지 ‘내가 좋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무경력 비전공자인 나를 번역가로 일할 기회를 준 회사에 대한 고마움도 있었지만, 그보다 내가 사랑하는 이 언어로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한다는 자체만으로도 매우 기쁘고 만족스러웠다.


어쨌든 순전히 내가 좋아서 했던 행동이 회사 측에도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었고, 스치듯 지나가려던 초심자의 행운도 나와 회사 사이에 오래 머물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일상의 작은 행복, Kerupuk 파는 골목길 구멍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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