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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니마 Feb 02. 2024

수목원과 브런치-3

동백꽃으로 명랑해지는 겨울

한라산 남쪽 서귀포는 겨울에서 초봄까지 가장 화려하고 강렬하다.

하양에서 짙은 빨강까지의 다채로운 변주, 떨잠처럼 흔들리는 꽃가루 뒤범벅된 꽃술들,

단단하고 어두운 초록 잎의 강한 대조가 겨울을 명랑하게 만든다.

매끈한 줄기 담벼락에 기대어서는 올레길 지나는 사람들에게 먼 곳 사정 듣기도 하고

꼬리 동그랗게 말고 총총 걷는 강아지 뒷모습도 오래도록 쳐다보다가

자기도 한 번 봐 달라는지 돌담 위를 들락날락한다.


수목원에도 초겨울 애기동백꽃이 피고 2월부터는 종처럼 생긴 빨간 동백꽃이 뒤를 잇는다.

애기동백나무는 들여온 시기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동백나무는 어머니의 어머니부터 쯤엔 가 귤밭 담벼락에 많이 심었다.

(*제주에서는 동백나무는 동백낭, 귤나무는 미깡낭이라고 부른다)

밭으로 들이치는 바람막이 역할로 그만이었는데 측백나무 사이사이 꼽사리 끼고 야무지게도 잘도 자랐다.

위미 동백 군락지에 가면 밭담을 따라 심어진 오래된 거대한 동백나무들을 볼 수 있다.


내 어머니는 외떨어진 동네에서 바닷가 근처로 이사 온 후 동백나무 몇 그루를 화분에 심으셨다.

그리고는 집 앞에 한 줄로  차례를 세우셨다. 키 큰 아왜나무들이 마당 앞쪽을 막아주고 있었지만

남쪽에서 불어오는 끈적한 해풍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나 보다.

슬레이트 지붕으로 만들어진 집들이 그렇듯이 현관이나 차양이 없고 나무틀에 얇은

사각형 유리가 틈틈이 끼워진 미서기 문을 열면 그대로 마당과 연결되었다.

그 유리문에 기대어 동백나무는 불과 100여 미터 떨어진 곳에서 올라오는 바닷바람과 해무를 견뎠다.

어머니는 여름이 되면 장판 바닥이 금세 끈적해져 걸레질로 하루를 마무리하곤 하셨는데

그 당시에는 막아야만 하는 그녀의 바람들 중 해풍도 하나였을 것이다.


또 하나의 기억은 설탕물처럼 달콤한 꽃 꿀의 맛이다.

꽃 꿀이 새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소소한 간식거리가 되어 주었는데

2월에서 3월은 땅에서 나는 먹을거리들이 거의 동이 났기 때문이었다.

담력 좋은 언니들은 동박새처럼 재빠르게 나뭇가지를 옮겨 다니며 몇 개를 따서 목을 축인 후

나무 아래 있는 나에게도 꽃을 떨어뜨려 주곤 했다.

나무 타기를 무서워했던 나는 주로 나무밑에서 망을 보면서 꽃이 떨어지길 기다렸는데

붙임성도 없었던 내가 동네 언니들은 어떻게 따라다녔는지 아리송하다.


겨울에는 제주에서 동백꽃길을 사뿐히 걸어 보면 좋겠다.

애기동백꽃이 1월 중순이 되면 서서히 꽃이 서서히 지기 시작하니까.

꽃잎들을 하나씩 떨어 뜨리다가 해 떨어지 듯 툭, 그러면 땅에는 하늘보다 더 붉은 노을이 진다.

흡사 레드카펫을 밟는 주인공이 된 것 같은 귀여운 착각도 든다.

그리고 동백나무는 누군가 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동그랗고 단단한 씨를 서서히 맺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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