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주의
내가 몇 년 전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솔라리스>를 보고 남긴 평이다. 말이 감상평이지 영화에 대한 감상은 눈곱만큼도 없다. 오로지 높은 별점과 멋진 말들만 남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시기와 질투만 있을 뿐이다. 그만큼 나에게 있어 솔라리스는 그저 어렵기만 한 영화였다. 최근에 우연찮은 기회로 마냥 모르겠는 이 복잡한 영화를 다시 보게 되었다. 재관람 직후 든 생각은 두 가지였다. '아 처음 봤을 때 내가 진짜 많이 잤구나'와 '그래도 여전히 모르겠다'.
주인공 '크리스 켈빈'은 어떤 임무를 받고 혹성 '솔라리스'로 향한다. 임무의 내용은 솔라리스에서 벌어지는 일이 정확히 무엇인지 파악하고 솔라리스 탐사 프로젝트의 중단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었다. 켈빈이 솔라리스 정거장에 도착했을 때 만나기로 한 3명의 과학자 중 '기바리안'은 이미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다른 두 과학자 '사토리우스'와 '스나우트'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만 늘어놓는다. 곧이어 켈빈은 과학자들 외에 제3의 인물들을 목격하게 되고, 10년 전에 자살했던 아내의 모습까지 목격하게 된다.
솔라리스의 이야기만 간략하게 놓고 보면 내가 정말 좋아할 만한 SF 심리 스릴러 장르물처럼 보인다. 하지만, 영화는 이러한 기대를 완전히 무너트린다. 시시각각 변화는 영화의 톤, 배경음악의 부재, 환상/환각, 시간 변화/중첩, 과학과 인간에 대한 철학적 담론, 여러 예술작품들은 정신을 빼앗는다. 이 다양하고 복잡한 요소들 중에서 솔라리스를 논할 때에는 주로 두 가지 키워드가 다뤄진다. 바로, '과학'과 '실존'이다. 애초에 SF 영화이기도 하고, 과학에 대한 토론을 지속적으로 펼치니 이 키워드는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실존은? 아마도 10년 전에 자살했지만 솔라리스에 의해 생성된 켈빈의 아내 '하리'에 대한 키워드인 것 같다. 그렇다면 두 단어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이며, 솔라리스는 어떤 이야기가 하고 싶었던 걸까?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두 단어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인류의 발전을 위한 학문이라고 여겨지는 과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세계 1차, 2차 대전, 그리고 냉전시대 때 급격하게 발전했다. 프리츠 하버의 하버-보슈법은 공기로부터 질소를 정제하는 방법을 발견하여 인공비료 개발을 가능케 함으로써 대기근을 해결하였다. 하지만, 하버-보슈법은 1차 대전 당시 독가스를 개발하는 데에도 사용되어 수많은 생명을 앗아간 화학전의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또한, 원자력의 발전 역시 에너지 대란을 해결하는 열쇠가 됐으나, 동시에 인류를 대량 학살한 핵전쟁의 발명으로도 이어졌다. 이렇듯 과학은 인류를 발전시키는 동시에 파멸로도 이끌었다.
이렇게 대량 학살이 자행되는 세계 대전이 발발하게 되면서 과학이 그 의미와 가치를 의심받기 시작했을 때, 또 다른 한 가지 역시 기존의 이해를 의심받기 시작했다. 바로 인간이다. '인간은 합리적/이성적 사고관을 가지고 있다'. '인간은 신이 창조해 낸 아름다운 존재이다'. 와 같은 전통적인 인간에 대한 이해 방식으로는 도저히 전쟁과 대량 학살을 설명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때 급격히 발전한 현대철학의 사조 중 하나가 바로 '실존주의(existentialism)'이다.
장 폴 사르트르 실존주의에서 핵심이 되는 단어는 바로 '실존'과 '본질'이다. 두 단어에 대한 정의는 실존주의를 펼친 여러 철학자들에 따라 달라지지만, 내가 가장 이해가 잘 되는 방식으로 마구잡이로 적어보자면 다음과 같다.
본질: 어떤 존재를 있게 하는 필수불가결한 것, 어떤 것이 존재하는 이유나 목적
실존: 본질적 속성이 아닌, 다만 그것이 우리 눈앞에 있는가 없는가 하는 사실에만 관계하는 우연적 속성
인간이 어떤 목적이나 의미를 가지고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다. 즉, 인간에게 본질이 있다고 여기는 고전 철학과는 달리, 실존주의는 인간에게 본질이 없다 (혹은 중요하지 않다)를 드러내며 전쟁 이후 새로운 인간에 대한 이해를 제시했다. 그리고 여기서 실존주의 철학자 중 하나인 사르트르는 철학사에 길이 남을 유명한 말을 하나 남겼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솔라리스에서는 실존주의 철학을 유추해 볼 수 있는 요소가 곳곳에 있다. 첫 번째는 사르트르의 희극 <닫힌 방> (1944)과 솔라리스의 유사성이다. 정확히는 인물 구조가 유사하다. 닫힌 방에는 총 4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가르셍, 이네스, 에스텔, 그리고 이 셋을 지옥으로 이끄는 저승사자인 급사. 지옥에 떨어진 3명의 인물은 각자 지옥에 오게 된 비밀을 안고 고립된 방 안에서 고통받는다. 이러한 인물 구성은 솔라리스 정거장에 있는 3명의 과학자를 떠올리게 한다. 주인공 크리스 켈빈, 그리고 스나우트와 사토리우스이다. 게다가, 각자의 비밀은 솔라리스에 의해 어떠한 인물로 재현된다. 솔라리스가 창조한 인물들 중 전면에 등장하는 '하리'는 과학자 셋 모두를 고뇌에 빠트린다.
솔라리스에서 인물들은 끊임없이 과학에 대한 철학적 담론을 펼친다. 영화 초반 버튼은 켈빈에게 솔라리스에서 겪은 현상을 납득시키려 하며 '지식은 도덕성 위에서만 유효한 거야'라고 말한다. 이에 켈빈은 '인간은 과학을 부도덕게 하는 유일한 주체예요'라고 답한다. 영화 후반부 솔라리스에서 스나우트는 과학은 부질없다며 '우리에게 우주를 초극할 야망 따윈 없소', '인간에겐 인간이 필요해요'라고 주장한다. 이에 사토리우스는 '인간은 진리를 추구하도록 운명 지어졌다'라고 답한다.
이러한 논의는 과학을 넘어 솔라리스에서 생성된 존재 '하리'로 이어진다. 스나우트는 하리라는 존재를 명확하게 규명할 수 없으나 손님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켈빈은 처음에는 거부하지만 결국에는 완전히 자신의 아내로 인식한다. 사토리우스는 하리를 솔라리스에서만 존재할 수 있는 중성미자로 만들어진 무언가이며, 인간이 아닌 형태의 기계적 재생이라고 주장한다. 하리는 스스로가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마르틴 하이데거 이들은 결국 과학, 더 나아가 인간에 대한 본질을 찾으려고 한다. 이 모습에서 또 한 명의 대표적인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의 피투성과 기투성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던져진, 즉 '피투성'을 지닌 실존자들이 본질을 찾기 위해 끊임없이 선택하고 스스로를 미래로 던지는, 실존자의 '기투성'을 볼 수 있다. 또한, 솔라리스에서 겪은 실존의 위협에서 오는 불안을 피하기 위해 인물들은 각자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본질을 만들고 거기에 스스로를 끼워 맞춘다. 여기서는 사르트르가 말했던 '자기기만'을 볼 수 있다.
영화에서는 동물들이 종종 등장한다. 처음에는 말이 자주 등장하였으며, 후에는 새, 그리고 개와 늑대의 그림이 나온다. 말과 개는 인간이 길들인 동물임에 비해 새와 늑대는 인간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 동물이다. 이는 사르트르의 존재 구분으로 재분류해 볼 수 있다. 사르트르는 다음과 같이 두 가지 개념으로 모든 존재를 분류한다.
대자: 의식 그 자체, 항상 무엇에 대해 의식하는 존재
즉자: 의식의 대상, 다른 것과 관계없이 그 자체로 있는 존재
일례로 항상 무엇에 대해 의식하는 존재는 인간을 들 수 있으며, 의식의 대상이 되는 즉자는 사물을 들 수 있다. 솔라리스의 경우 주체적인 의식을 잃고 인간의 명령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된 말과 개는 즉자로, 그렇지 않은 새와 늑대는 대자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등장인물 중 인간에서 사물로, 새와 늑대에서 말과 개로 즉자화된 자가 있다. 바로 하리이다.
하리는 후반부의 솔라리스가 보여주는 환영에서 켈빈의 어머니와 중첩된다. 이를 통해 켈빈에게 있어 하리는 하리 그 자체로서가 아닌 어머니의 대체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리는 대자가 되고자 했으나, 켈빈에 의해 철저히 즉자화 된 것이다.
이렇듯 솔라리스는 여러 부분에서 실존주의를 떠올리게 한다. 그렇다면 솔라리스라는 영화는 하이데거 혹은 사르트르가 말하는 실존주의를 다루는 영화인가? 단언하기에는 내가 위에서 제시한 근거들에 구멍들이 많다. 먼저, 닫힌 방과의 유사성의 경우 인물 구조 자체는 유사하나 내용은 전혀 다르다. 닫힌 방에서는 타인의 시선에 의해 끊임없이 자신이 구축한 세계가 파괴되고 즉자화되는 인물들을 통해 '타인은 지옥이다'를 말한다. 하지만 솔라리스에서는 타인을 주로 다루지 않는다. 세 과학자는 고립된 공간임에도 서로 만나는 순간조차 많지 않다. 또한, 세 과학자의 비밀 역시 솔라리스에 의해 재생되었으나, 스나우트와 사토리우스의 비밀은 화면에 그 신체 일부만 아주 잠깐 등장할 뿐 끝내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또한, 인물들의 과학에 대한 담론 역시 논리와 그 논리에서 비롯된 결론이 맞질 않는다. 버튼과 스나우트는 모두 과학에 대해 인본주의를 주장한다. 하지만, 버튼은 탐사를 지속하여 현상을 밝혀내야 한다고 하는 반면, 스나우트는 과학은 부질없다며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켈빈과 사토리우스는 과학에 대해 버튼/스나우트와 정 반대의 견해를 가진다. 하지만, 켈빈은 솔라리스 프로젝트를 중단하고 고밀도 빔을 쏴서 솔라리스를 파괴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해, 사토리우스는 솔라리스 바다에 엑스레이를 쏴서 어떻게든 현상의 원인을 밝혀내야 한다고 주장한다. 논리는 같지만 도출해 낸 결론은 다르다. 여기서 찾을 수 있는 과학의 본질은 대체 무엇인가?
마지막으로, 인간에게 길들여진다거나 어떤 것으로 사물화 된다고 해서 즉자화된다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의식의 대상이 되는 순간 즉자화되며, 여기서 비롯된 전반성적 성질에 의해 의식되는 대상, 즉 자기 자신 역시 즉자화되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군가에 의해 즉자화되어서 불행한 것만이 아니다. 애초에 대자인 자기 자신, 자기 자신 자체의 순수의식을 포착할 수 없기 때문에도 불행한 것이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은 솔라리스와 완전하게 결부시키기에는 처음부터 맞지 않는 부분이 있다. 하이데거와 사르트르 모두 '무신론적 실존주의'를 펼치는 철학자이다. 신을 전제하지 않은 채 펼치는 실존주의인 것이다. 반면 솔라리스의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는 매우 신실한 기독교인이며, 그의 영화에서는 종교적 메세지가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프로이트로 돌아오자면, 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말해야겠군요. 왜냐하면 나는 데카르트적 전통을 먹고 자라 합리주의가 몸에 밴 한 명의 프랑스인이었고, 무의식이라는 개념은 아주 충격적이었으니까요
또한, 사르트르는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에 대해 기본적으로 비판적인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솔라리스에서는 이 무의식의 개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영화에서 솔라리스가 인간에게 개입할 때 잠든 인간의 머리를 클로즈업하는 방식으로 연출한다. 이는 솔라리스가 인간 의식의 검열이 약해진 꿈을 꾸는 순간에 개입하여 무의식을 탐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게다가, 어머니에 대한 사랑의 결핍을 하리를 통해 해소하는 모습에서는 프로이트의 정신현상학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읽을 수 있다.
영화 내내 치열했던 과학과 하리에 대한 토론은 결국 어떠한 결론도 내지 못한 채 좌절하고 말았다. 실존주의 철학이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비판적으로 수용했던 프로이트의 무의식 개념이 솔라리스에서는 전면에 등장한다. 하리는 결국 지구에서의 하리와 같이 자살이라는 결말을 맞이한다. 로켓에 실어 우주로 날려버린 하리와 다시 재생된 하리는 같은 존재일까? 실존자로서는 다를지라도 그 본질은 같다고 볼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사실 중요하지 않다. 켈빈은 재생된 하리에게 그녀의 옷이 아닌 우주로 사라진 하리의 옷을 입혔으며, 하리 역시 인간으로서의 본질을 끝내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솔라리스 탐사의 종착지는 대체 어디일까? 사실 솔라리스는 실존주의를 이야기함으로써 되려 실존주의를 비판하는 영화일까? 이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서는 실존주의의 시작점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쇠렌 키르케고르 실존주의의 확실한 근원은 역사적으로 불분명하나, 시작점으로 꼽히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쇠렌 키르케고르이다. 키르케고르는 19세기 덴마크 철학자로 '유신론적 실존주의'를 펼쳤던 철학자이다. 신이 목적과 의미를 가지고 인간을 창조했다는 인간 이해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실존주의의 시작점에 도리어 신을 전제하는 실존주의가 있었던 것이다. 키르케고르는 보편성을 추구하고 절대정신을 사유하길 요구했던 헤겔 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보편적 진리가 아닌, 개인인 나의 진리, 나의 내면에 깃든 진리, 그리고 이 현실 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나를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키르케고르가 정의한 실존과 본질 역시 무신론적 실존주의에서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이를 통해 인간을 다음과 같이 이해한다. '인간은 유한한 실존을 누리면서 무한한 자기 확장을 원하나 좌절에 부딪힌다. 이때 인간은 절망한다'. 이에 따라 인간이 실존한다는 것은 결국 절망이라는 병을 앓게 되는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따라서 인간이 절망에 빠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며 죄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절망에 머물고자 하는 의지는 죄가 된다. 이때, 인간이 절망에서 벗어나기 위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신이다. 인간은 신의 '무한한 가능성의 영역'에 유한한 실존자로서의 자기를 근거 짓고 그 안에서 존재를 설정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이 곧 신앙이다. 물론 신앙으로도 절망은 계속된다. 하지만, 절망을 짊어지고 견딜 수 있는 용기와 확신을 가지게 된다. 이에 따라 키르케고르는 인간은 '신 앞에 홀로 선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솔라리스의 인물들은 끊임없이 본질을 찾고 자신을 기투하지만 어떠한 결론에도 다다르지 못했다. 어떠한 논리를 가지던 그 결론이 논리에 대응되지 않는 과학은 그 본질이 무의미해졌다. 솔라리스에서 생성된 존재, 하리의 본질 역시 무의미해졌다. 결국 인간의 본질은 없다 혹은 중요하지 않다. 무신론적 실존주의는 분명 전쟁 이후 새로운 인간 이해에 대한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신의 아름다운 창조물로써의 인간을 전면으로 부정하고 실존자로서의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했다. 그러나, 인간은, 과학은, 그러니까 실존은 선고받은 자유 속에서 끊임없이 선택하고 자기가 정한 본질에 스스로를 끼워 맞췄다. 그리고 전쟁이 발발하고 대량학살이 일어났다. 본질을 찾기를 포기한 인간 혹은 특정한 상황에 관념에 자신의 본질이 있다고 스스로를 속이고 악행을 서슴지 않는 인간. 결국 인간은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게 된다. 다시 아버지를 홀로 대면한 인간은 주저앉아 흐느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