숙취. 사람에 따라 유발하는 알코올의 양도, 그 증상과 정도도 천차만별이다. 어제의 쾌락에 대한 업보라도 되는 듯이 크나큰 고통을 선사하지만, 누군가에게는 그냥 아무것도 아니기도 하다. 뭐가 되었건 숙취는 사람에 따라 모두 다르게 적용된다. 따라서 누군가가 고작 맥주 1캔에 숙취가 찾아왔다 하더라도 전혀 억울해할 필요가 없다. 심지어 그 누군가가 평소에 술을 즐기는 편이며 소주 1병 정도까지는 가벼운 숙취만으로 넘길 수 있는 사람일지라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알람 소리와 함께 찾아온 숙취에 화를 내거나 억울해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망할!
부산국제영화제 여행 3일 차 마지막 날. 영화 시간은 오전 9시 30분이고 숙소 체크아웃 시간은 오전 11시였기에 짐을 다 싸서 나가야 했다. 하루종일 무거운 짐가방을 들고 다녀야 했기에 좋은 컨디션을 원했지만, 정말 예상치 못한 숙취라는 손님의 방문으로 어깨가 더욱 무거워졌다. 시간이 많지 않았다. 영화 시작 전까지 씻고, 정리하고, 짐 싸고, 분리수거까지 마치고 영화관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도저히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결국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영화 상영 시간에 늦고 말았다. 늦은 덕분에 한 가지 재밌는 시스템을 알 수 있었다. 늦게 온 사람들이 불규칙적으로 상영관에 들어가 관객들을 방해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상영 시작 후 10분이 지날 때까지 늦은 사람들을 한데 모아놨다가 한꺼번에 입장시키는 것이다. 도착한 시간보다 좀 더 늦게 상영관에 들어가긴 했지만 충분히 합리적인 제도라는 생각이 들어 어떠한 불만도 없이 조용히 상영관에 입장했다.
마거리트의 정리
마거리트는 권위 있는 학교에서 인정받는 수학도이다. 그녀는 중요한 논문 발표회에서 대혼란을 겪으면서 인생의 궤도를 바꾸게 된다. 삶에서 수학뿐이었던 그녀는 결코 수학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학교 바깥의 세상으로 탈출한다.
시놉시스도 제대로 안 읽고 예매한 영화였기 때문에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가 예상외로 가장 재밌게 본 영화였다. 왜냐하면 뒤늦게 들어관 상영관 스크린에는 세미나 준비를 하는 대학원생 마거리트가 있었기 때문이다. 온갖 수모를 겪으며 2.5년 만에 겨우 석사를 달고 도망치듯이 빠져나온 나에게 있어 대학원 이야기는 도저히 지루할 수가 없는 소재이다. 물론 나와 마거리트 사이에는 천재 대학원생과 바보 멍청이 유사 대학원생이라는 큰 간극이 있다. 그럼에도 마거리트와 유사한 환경에서 몇 년간 지낸 경험이 있다 보니 그녀가 느끼는 감정이 좀 더 크게 와닿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영화에서 마거리트가 겪는 일들은 대학원생이 상상할 수 있는 최악과 최고의 일들의 총합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도교수, 가족과의 갈등, 디펜스, 열등감, 학교 밖 세상에 대한 낯섦과 호기심 등. 대학원생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경험하거나 상상해 봤을 일들을 영화는 마거리트라는 인물을 통해 모두 보여준다. 대한민국 성인 남성들이 군대 이야기에 열광하듯이, 나 역시 마거리트의 이야기에 몰입하여 함께 분노하고 슬퍼하고 기뻐했다.
예상치 못한 대학원 영화를 뒤로하고 극장을 빠져나왔다. 오늘의 마지막이자 이번 영화제 여행의 마지막 영화는 오후 4시에 시작했다. 점심 메뉴를 고민하다가 문득 모든 것에 질려버렸다. 맛집 탐방이고 웨이팅이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전 날 웨이팅마다 겪었던 불안과 숙취의 피로가 파도처럼 밀려와 '그래도 이왕 부산까지 왔는데' 마인드를 말끔하게 쓸어버렸다. 검색은 그만두고 지도 앱을 켜서 식당 목록을 넘기다 보니 중국집들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선가 부산 중국집은 짜장면에 계란 프라이가 올라간다는 말을 들었던 것이 생각났다. 그래 오늘 점심은 계란 프라이가 올라간 짜장면이다. 발걸음이 닿는 대로 가다가 가까운 중국집으로 들어갔다.
웨이팅은커녕 사람 자체가 없었다. 나에게는 더 이상 맛집의 기준은 사람들의 별점과 끝이 보이지 않는 대기줄이 아니었다. 기다림 없이 바로 들어가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식당이야말로 최고의 맛집이었다. 금방 볶아 나온듯한 간짜장에는 기대했던 대로 계란 프라이가 올라가 있었다. 맛은 내가 아는 지극히 평범한 간짜장의 맛 그대로였다. 애초에 기대한 것은 계란 프라이뿐이었고 원래부터 간짜장을 좋아하다 보니 충분히 만족스러운 식사를 했다. 그릇을 반쯤 비웠을 때쯤부터 동네 주민으로 추정되는 분들이 조금씩 식당에 들어왔다. 그런데 다들 하나같이 볶음밥을 주문해서 드셨다. 아무래도 여기는 볶음밥 맛집이었던 모양이다. 딱히 상관없었다. 한 번 포기하기 시작했더니 뭐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게 되었다.
4시 영화까지 시간이 한참 남아 근처 카페로 향했다. 해변가 카페를 가려다 바다가 가까워질수록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을 보고 나도 모르게 다시 발길을 돌렸다. 마침 바로 근처에 괜찮아 보이는 카페가 있어서 들어갔다. 별생각 없이 들어간 카페였지만 커피나 분위기 모두 마음에 들었다. 이제 글을 좀 써보려고 집중을 하려는데...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점점 눈이 감겼다. 이제 진짜 체력적 한계를 맞이한 것 같았다. 글 쓰기, 책 읽기, 웹소설 읽기, 유튜브 보기 4가지를 잠이 올 때마다 바꿔가면서 루틴을 돌렸다. 그렇게 오후 3시가 넘었는데도 도저히 잠이 깨질 않았다. 좀 걷다 보면 카페인이 효과를 발휘하지 않을까 싶어 예상보다 좀 더 일찍 카페를 나서 다시 영화관으로 향했다.
마지막 영화 역시 cgv였다. 상영관에 입장하니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는데, 유독 외국인들이 많았다. 영화나 감독에 대한 사전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의아해하던 찰나에 상영이 끝난 후 GV가 있다는 안내가 들렸다. 영화제 여행 0일 차 글에서 배우도 안 만나네 감독도 안 만나네 꿍얼꿍얼 거렸었는데, 어쩌다 보니 3일 내내 GV에 참석하게 되었다. 참 스스로가 웃기지도 않는다라고 생각하는 와중에 상영관에 불이 꺼지고 이제는 익숙해진 영화제 인트로가 나오기 시작했다.
모리슨
미국인 아버지와 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지미는 팝스타의 화려함을 뒤로하고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지미는 리모델링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유년 시절을 보낸 호텔을 찾는다. 정전과 누수가 일상이 된 낡은 호텔에서 지미는 기묘한 일들을 겪기 시작한다.
사실 이 영화는 진짜 글을 적을 것이 없다. 아예 잠들어서 첫 장면부터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영화제 인트로를 기점으로 최면이라도 걸린 듯 잠들었다. 어느 정도로 앞부분을 날렸는가 하면 지미가 리모델링 공사를 감독하기 위해 호텔을 방문했다는 사실을 영화 다 끝나고 시놉시스를 읽고 깨달았을 정도이다. 너무 오래 잠들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영화 자체가 그랬는지는 몰라도 상당히 난해하게 다가왔다. 빛, 물, 사람, 음악, 층계 모든 사물과 소리와 이미지가 은유가 아닌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영화가 끝난 후 느껴지는 여운이 도대체가 무엇인지 알 길이 없어 졸음에 대한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남아 GV에 참여했다.
왼쪽 두 번째부터 푸티퐁 아룬펭 감독님, Joe Cummings, Kitty Chicha 배우님
처음에는 사람들이 선뜻 질문을 하지 않아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하지만 다행히도 누군가가 포문을 열자 다양한 질문이 나오기 시작했다. 특히 외국분들이 많은 질문을 주셨다. 질문 중에는 내가 궁금해하던 은유에 대한 질문도 나왔다. 영화에 정말 수많은 은유가 등장했는데 어떤 의미이고 어디서 영감을 얻었는가? 와 같은 질문이었다. 이에 대한 감독님의 답변은 꽤나 의외였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느낌으로 답변해 주셨다. '특별히 무언가를 염두에 두고 은유해 가면서 영화를 만드려고 하진 않았다. 이 영화는 기억에 관한 영화이다. 기억은 정확한 사실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다. 흐릿할 수도, 정확하지 않을 수도, 아예 왜곡될 수도 있다. 나는 영화에 이런 기억의 형상을 담으려고 했다'. 이 답변을 듣고 GV에 남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내가 느낀 여운의 정체가 누군가의 기억이라고 생각하니 형언하기는 어려우나 왠지 납득이 됐기 때문이다.
마지막 영화와 GV까지 모두 끝나고 영화관을 나서니 이미 오후 6시가 넘었었다. 미리 예약한 기차 시간을 확인해 보니 오후 8시였다. 센텀에서 부산역까지는 빨리 잡아도 50분인데 대체 어느 세월에 저녁까지 먹고 8시 기차를 탄단 말인가. 다시금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저녁을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시간이 많지 않으니 우선 부산역으로 가자고 마음먹고 급행 버스에 탑승했다.
부산역에 도착해 지도 앱을 다시 열어보니 친구가 추천해 준 만두집이 눈에 들어왔다. 부산역 앞 차이나타운에 있는 유명 맛집이었다. 기차 시간이 너무 애매해서 기차표를 다시 조회해 보니 8시 이후 시간대에도 자리가 꽤 있었다. 8시 넘을 것 같으면 그냥 취소하고 뒤에 걸 타야겠다고 생각하며 만두집으로 가보았다. 도착해 보니 역시나 줄 선 사람들도 가득했다. 웨이팅 걸고 기차 시간을 옮길까? 그런데 메뉴는 어떻게 시키지? 하나 시키면 너무 적고 두 개 시키면 다 못 먹을 것 같은데? 애초에 한 명만 들어가도 되는 분위긴가? 옆에 만두집도 웨이팅인데 어디에 대기를 걸어야 하지? 둘 다? 하나만? 이성의 끈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어쩐지 화가 난 발걸음으로 차이나타운을 벗어나 부산역으로 향했다.
부산역 안에 있는 아무 식당이나 들어가 라면을 주문했다. 기차 시간 걱정, 메뉴 고민, 대기 시간 고민, 1인 좌석 고민 모든 것이 라면 하나로 사라졌다. 결국 나는 이런 인간이었다. 새로운 것을 찾아가고, 경험해 보고, 맛보기에 나는 너무 힘들고, 귀찮고, 불안한 게 많은 사람이었다. 결국 이번 여행의 마지막 식사는 역내에 무지막지하게 비싼 라면과 아이스크림이 되었다. 식사와 후식까지 마친 후 취소하지 않은 기차표에 맞춰 여유 있게 기차에 탑승했다. 이렇게 짧았던 3일간의 영화제 여행이 끝이 났다.
나는 일전에 영화 평론 워크숍 후기로 '불안과 영화'라는 글을 쓰면서 스스로의 지역성과 청년성을 불안으로 정의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불안이라는 단어를 (범위를 나로 한정지었을때) 대단히 지엽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나에게 있어 불안은 단순히 지역성, 청년성에 국한되지 않는다. 아예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나는 불안한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불안에 떠는 삶을 산다. 안타깝게도 원인은 잘 모른다. 그냥 기질이 그런 사람일지도, 어렸을 때의 환경이나 어떤 사건이 큰 영향을 끼쳤을지도, 아니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편해서 스스로가 불안하다고 속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모든 것이 불안하고 무서운 어른이, 아니 몸만 조금 커진 애가 되어있었다. 최근 들어 새로 생긴 습관인데 불안이나 공포가 엄습할 때마다 손으로 몸을 토닥이며 '안 죽는다'라고 중얼거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불안의 근본 원인은 '죽음'일까? '죽음'이 대단히 두려운 것은 사실이다. 정확히는 '나'라는 의식이 사라지는 것은 상상만 해도 견디기 어렵다. 그러나 그것이 모든 불안의 근본 원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그저 불안의 대상 중 '죽음'이 가장 명확한 개념과 형태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일반화의 단어로 활용했을 뿐이다. 그런데 애당초 이 뜬금없는 불안 성토가 대체 영화제 후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 것일까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있음을 의식하는 사람만이 불안 없이 생을 통과할 수 있다.
얼마 전에 읽었던 책인 <아들러의 인간 이해>에서 발견한 문구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뜬금없이 영화를 떠올렸다. 내가 영화를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다름 아닌 영화가 바깥세상과 나를 연결시켜 주는 교두보 역할을 수행한다는 생각이 문득 든 것이다. 영화는 셀 수 없이 다양한 세상과 사람들과의 연결점을 제공하며 동시에 절대로 스크린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나는 영화가 제공하는 세계에 어떠한 응답도 책임도 질 필요가 없다. 관계가 두려워 소통하지 않으려 하는 나에게 있어 영화는 무한대의 쾌락을 제공하며 이에 대한 어떠한 대가도 요구하지 않는, 그야말로 꿈의 매체인 것이다.
만약 위에 문단에 적은 말들이 100% 다 사실이었다면 영화는 불안 치료제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며, 나는 이를 계기로 세상으로 나아갈 용기를 얻었으리라. 무엇보다 지금 여기서 이런 글을 쓰고 있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의 세계는 이미 언급했듯이 스크린 내에 존재한다. 엔딩 크레딧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켜지면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내가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는 세계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에는 오롯이 나뿐이다. 스크린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연결성의 잔상만을 붙들고 있는, 불안에 떠는 내가 여전히 있다. 본질적으로 바뀐 것은 없다. 따라서 나에게 있어 영화는 굳이 따지자면 치료제가 아닌 일종의 진통제 정도이다.
영화에 대한 책임이 없다는 말 역시 어불성설이다. 관객은 관객이 지켜야 할 윤리와 책임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것은 영화를 만드는 주체의 윤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며, 되려 관객의 윤리와 책임이 창작자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 그럼에도 내가 앞서 책임질 필요가 없다고 말한 이유는 관객이 아닌 오롯이 나라는 주체에 한정해서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본 나의 언행이 세상에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을 거라는 확신에서 비롯한 무책임함이다.
또한, 영화가 스크린 내에서만 존재한다는 말마저도 틀리다 못해 불순하기까지 한 말이다. 영화는 스크린에서 상영되지만 분명 그 영향은 스크린 밖 세계에까지 미친다. 만약 영화의 생명력이 오직 상영 시간만큼 뿐이고 스크린이 꺼짐과 동시에 소멸한다면, 영화는 그 존재 가치까지 의심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수없이 상영되면서 그 이미지와 소리가 각자의 형태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아 세계를 변화시킨다. 다만 그 영향력이 나의 불안에 대해서는 일시적인 마취 역할만 할 뿐 본질에 닿지 못할 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계를 넘어보려 다양한 시도를 해본다. 영화 모임, GV, 영화 관련 워크샵 그리고 영화제까지. 물리적 스크린을 넘어선 영화 관련 활동은 좀 더 세상과 사람들에게 가까워진 것 같다는 느낌을 준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이다. 안정감을 주었던 스크린과의 거리가 가까워지기 시작하면서 다시 불안이 시작된다. 아주 당연한 수순이다. 영화와 관련됐다고 해서 관계의 정의나 영향이 바뀐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영화가 관련되었기 때문에 생기는 부작용이 있다. 바로 열정에 대한 열등감이다. 영화와 관련된 곳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나와는 비교도 안 되는 정도의 영화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배우와 감독을 만나고 소통하는데 거리낌이 없으며, 한 발짝 더 나아간 사람들은 영화를 공부하고 평론하며 직접 영화를 만들기까지 한다. 그리고 이들끼리 네트워크를 구성하여 더 나은 영화, 더 나은 문화를 위해 함께 치열하게 고민한다. 영화제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 덮쳐오는 우울은 이런 생각들로부터 기인한다. 관계에 불안해하고 평가를 두려워하는 나는 팬도, 평론가도, 작가도, 감독도 될 수 없다. 내가 안정감을 느끼는 마지노선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딱 여기까지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마저 포기하고 우울에 잠길 수가 있겠다. 하지만 이건 아무리 봐도 최악의 선택으로 보인다. 불안이야 줄어들겠지만 그것보다 더 큰 우울에 매몰되고 말 것이다. 그렇다면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 타이틀을 최대한 유지해 보는 것은 어떨까. 이를 위해서는 이번 영화제를 비롯해 영화 관련 활동들에서 행복했던 기억들만 솎아낼 필요가 있다. 나와 같은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 야외극장에서 현실 세계와 스크린의 세계가 중첩되는 것만 같았던 기묘한 경험, 감독, 배우님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영화에 한 발짝 더 다가가는 것 같았던 느낌. 생각보다 좋은 기억들이 꽤나 있다. 하지만 이걸로 충분할까? 잘 모르겠다. 마지막으로 더 적극적으로 영화 관련 활동에 뛰어드는 것이다. 이건 불안을 뛰어넘은 열정이나 욕망이 있어야 한다. 지금 당장은 아예 불가능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미래에 좀 더 타인의 시선을 무시하고 뻔뻔해질 수 있다면 혹시 모를 일이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어찌 보면 뻔뻔함이 불안을 이겨내며 시작된 것이니까.
무슨 선택을 하든 간에 영화제 여행은 끝이 났다. 내일부터 다시 출근하기가 시작된다. 영화는 끝이 났고, 삶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