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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현 Mar 04. 2023

불안과 영화

영화 비평 워크숍 <청년, 영화를 말하다>

스포일러 주의


영화 평론은 단순한 리뷰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리뷰는 줄거리와 구성을 요약하고 간단히 평을 하는 것이다. 반면 평론은 리뷰보다 작성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고 학문적이다. 평론은 영화를 평가하는 '론'으로써 "영화가 좋고 나쁨이 아니라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상과 그 현상의 의미를 발견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 <괴물>에서 한국 사회의 의식을 발견하는 것 따위가 평론에 해당한다.


위키백과에서 영화 평론과 리뷰를 위와 같이 구분한다. 이에 따르면 나는 단 한 번도 영화 평론을 해 본 적이 없다. 단 한순간도 영화를 보고 글을 작성할 때 학문적으로 깊게 파고들어 간 적도, 의미를 발견하려 시도한 적도 없다. 또한, 스스로 평가의 기준을 정한 적도 없고 다른 사람의 평론을 꾸준히 읽지도 않았다. 그저 영화를 본 후 든 감정에 따라 아무렇게나 별점을 매기고, 하고 싶은 말을 인터넷에 배설함으로써 작은 자기만족과 허영심을 얻었을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단 한순간도 영화 비평을 해 본 적이 없다.


<청년, 영화를 말하다> 워크숍 포스터


비평이 뭔지 조차 모르는 나는 이 포스터를 처음 봤을 때 보고 싶은 단어들만 자동으로 걸러서 봤다. ‘영화를 말하다’, ‘위치’, ‘시간’, 그리고 나의 지적 허영을 늘리는데 도움이 될 것 같은 영화 제목들. 다른 단어들은 아예 없는 것처럼 취급했다. 그 결과 나는 이 워크숍을 ‘영화관에서 주관하는 큐레이터 해설’ 혹은 ‘영화를 보고 다 같이 하하 호호 대화를 나누는 자리’ 같은 것으로 아주 가볍게 받아들였다.


Hello World


하지만 이런 단순한 생각은 워크숍이 진행될수록 점점 묘한 위화감으로 바뀌어갔다. 그제야 포스터의 다른 단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청년’, ‘비평’, ‘워크숍’, ‘영화를 읽고, 의견을 듣고, 비평을 쓴다’, 그리고 영화 옆에 적혀있는 소주제들. <청년, 영화를 말하다> 워크숍은 영화 비평을 통해 지역에서의 영화 제작과 영화 운동에 대해 토론하는, 말하자면 소규모 학술회의 같은 것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의 영화와 영화 제작 환경에는 어떤 문제가 있는가,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전략 및 전술을 세울 것인가, 여기에 지역성과 청년성을 연계했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 것인가 등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 영화 비평을 통해 통찰을 얻는 자리였다. 그리고 이런 자리에 영화, 비평, 지역, 청년 그 어떠한 것도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내가 참가했다. 그러니까 나의 직업으로 치면 이렇게 비유할 수 있겠다. ‘현대의 진보된 사이버 위협과 이에 대응하는 보안 전략’을 주제로 개최한 워크숍에 이제 막 터미널창에 ‘Hello World’를 찍어본 사람이 재밌어 보인다며 참가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쓰고 있는 이 글은, 워크숍 마지막 주차 숙제, 워크숍 참석 후기, 혼자 자기 멋대로 가진 죄책감에 대한 반성문, 영잘알에 편입하고 싶은 영알못의 몸부림과 동시에 그 몸부림을 혐오하는 양가적인 감정을 담은 무언가이다. 하지만 여전히 비평은 되지 못한다.


<몽키 비즈니스> (Monkey Business, 1952)


빈자리와 폐허

워크숍 1주 차 영화는 하워드 혹스 감독의 <몽키 비즈니스> (Monkey Business, 1952)이다. 주인공 부부 화학자 바나비와 그의 아내 에드위나는 실험실의 원숭이 에스더가 아무렇게나 섞어놓은 약을 마시고 10대의 몸과 마음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바나비와 에드위나는 10대로 돌아감으로써 예절, 예의, 존중 등 사회구성원으로서 갖춰야 할 요소들을 모두 잊게 된다. 그중 가장 두드러지게 잊게 되는 것은 사회에 속한 부부로서 갖춰야 할 모습이다. 이들은 서로를 향한 의심과 질투를 가감 없이 드러내며, 결국 서로와 의심의 대상을 물리적으로 공격하기까지 한다. 이 엉망진창의 소동 끝에 이들의 사랑은 아무것도 남지 않은 폐허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도리어 그들의 사랑은 더 두터워지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어떻게 그들은 서로를 더 사랑하게 될 수 있었을까. 둘은 약물을 통해 나이가 들면서 지게 됐던 모든 허물을 벗어던짐으로써 서로에게 쌓여있던 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좀 더 진실된 마음으로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 서로의 빈자리와 관계의 폐허를 경험함으로써 문제를 정확히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게 된다.


이를 영화, 혹은 영화 운동의 관점으로 해석해 보자. 우리는 (나를 포함하기에 너무 죄송스럽지만 도저히 마땅한 주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모든 영화적 관습을 벗어던지고 청년으로 돌아가 빈자리와 폐허를 마주해야 한다. 그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현재 영화 제작 환경에 어떤 문제가 있는지 파악하고 이를 해결할 방법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한 단계 더 나아가보자. 영화 내내 두 주인공을 괴롭히는 사람들이 있다. 회사 사장과 이사진 그리고 변호사. 즉, 자본 (혹은 자본가들)이다. 영화 운동의 관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빈자리와 폐허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자본으로부터 멀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문제의식을 함양하려면 자본과 거리를 두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말> (Weekend, 1967)


전유와 재전유

두 번째 영화는 장 뤽 고다르 감독의 <주말> (Weekend, 1967)이다. 파리의 한 중산층 부부가 부모로부터 자산을 상속받기 위해 여정을 떠난다.


영화의 서사 자체는 논할 필요도 없이 단순하다. 하지만, 부부가 여정에서 마주하는 식인, 변태적 성행위, 동물 도살, 정체를 가늠하기 힘든 상징적 의미로 가득 찬 인물들과 사건들까지, 이 모든 것들은 나 같은 개연성에 미친 사람을 그야말로 영알못의 수렁에 내리꽂았다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는 이 영화로 고다르를 처음 접했다). 다행히도 워크숍의 강의 내용이 수렁에 작게나마 숨구멍을 터주었다.


문화적 전유(cultural appropriation)란 탈식민주의 문화 이론에서 주로 쓰이는 말로, 다수 집단에 속한 예술가가 소수 집단의 문화적 가치나 정체성을 차용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특히 지배 집단이 피지배 집단의 문화를 전유할 때 그것은 고유한 문화적 자산에 대한 절도와 착취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렇게 착취된 문화 자산을 되찾아오는 행위를 재전유(reappropriation)라 이르며, 거꾸로 소수 피지배 집단이 다수 지배 집단의 문화를 저항적·해방적 목적을 위해 전유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출처) [최재봉의 문학으로]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2021/05/06, 한겨레


영화는 자본주의 사회,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계급 사회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영화는 이러한 사회가 인간 본연의 가치와 정체성을 착취하여 만들어낸 것들을 일종의 문화적 전유로 취급하며, 이를 재전유의 방식으로 전복하여 부순다. 산업화시대의 산물인 자동차는 정체되어 움직이지 않거나 전복되어 불타오른다. 시와 문학 역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엉뚱한 대답만 하다가 불에 타 죽는다. 부르주아들이 즐기는 클래식은 그 누구도 듣지 않는다. 자본 사회는 해체되어 부족 사회가 되고, 끝까지 돈을 좇던 인간은 결국 다른 인간의 한 끼 식사로 전락한다. 이러한 영화의 방식은 자칫 오만해 보일 수도 있을 정도로 자기 구성적이며 시대정신을 개척하는 측면에서 대단히 청년적이기까지 하다.


이 역시 영화 운동으로 바꿔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자본이 영화적 가치를 차용 혹은 절도하여 대규모 상업 영화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혹은 금전적 지원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독립영화의 상황을 이용하여 자본을 가진 자의 입맛에 맞는 독립적이지 못한 독립영화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재전유는 자본이 문화적으로 전유한 영화적 가치를 되찾아오는 행위가 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화적 가치 혹은 영화 생태계의 저항/해방적 목적을 가지고 대규모 상업 영화의 방식을 전유할 수도 있다.


<태풍 클럽> (Typhoon Club, 1985)


<바보선언> (Declaration of Fools, 1984)


Restart의 방식

3주 차 영화는 소마이 신지 감독의 <태풍 클럽> (Typhoon Club, 1985)이다. 태풍으로 인해 학교에 갇힌 학생들이 억눌렸던 본성을 분출한다.

추가적으로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 (Declaration of Fools, 1984)도 보았다. 동철, 육덕, 혜영은 납치라는 악연으로 만났으나 나중에는 살아가기 위해 서로 힘을 합친다.


두 영화에는 공통점이 있다. 바로 주인공이 자살을 시도한다는 점이다. 미카미는 눈부신 삶에 필요한 눈부신 죽음을 위해 학교 창문을 넘어 뛰어내린다. 영화 초반에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린 영화감독의 유산을 챙겼던 동철이는 혜영의 죽음 이후 자신도 옥상에서 뛰어내린다. 미카미는 눈부신 죽음을 쟁취했는가? 진흙 속에 처박힌 모양새는 눈부심과 거리가 멀어 보이며, 죽음조차 달성했는지 의문이다. 하지만 이는 중요치 않다. 미카미는 그들을 내내 옥죄어오던 창문이라는 프레임을 탈출했으며, 규율과 관습의 공간이었던 학교는 마치 금각사와 같은 모습이 되어 눈부시게 빛났다. 동철이는 어떻게 됐는가? 그는 죽지 않았다. 대신 국회의사당 앞에서 옷을 벗고 귀신을 쫓는 춤을 췄다. 이들의 뛰어내림은 단순히 종결을 위한 행동이 아니다. 관습, 규율, 검열, 통제를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Restart의 방식이다.


두 영화에는 자살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있다. 바로 영화의 핵심이 제목에 드러난다는 것이다. 먼저 태풍 클럽은 '태풍'이라는 대응할 수 없는 커다란 재해가 학생들을 분리하고 고립시켜 '클럽'을 만들어낸다. '태풍'은 사회적으로 낙오된 학생들을 모든 사회적 요소들로부터 분리시켜 각자의 정체성을 마주하게 하며, 더 나아가 영화를 기존의 영화적 '관습'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측면에서 대단히 실험적인 역할까지 수행한다. 바보 선언도 이와 유사하다. 바보 선언이 제작되던 당시 전두환 정부의 3S 정책은 모든 문화예술을 검열했다. 이에 영화는 검열을 피하기 위해 시나리오부터 촬영, 연기까지 모든 부분에서 기존의 관습을 깨고 마치 엉터리로 대충 만든듯한 모양새를 취한다. 말 그대로 영화 자체가 '바보 선언'을 한 것처럼 말이다. 이 역시 매우 실험적이고 도전적이다.


<산책하는 침략자> (Before We Vanish, 2017)


<백치들> (The Idiots, 1998)


소꿉놀이

네 번째 영화는 <산책하는 침략자> (Before We Vanish, 2017)이다. 지구 침공을 목표로 인간의 몸에 침입한 외계인들이 타인의 '개념'을 빼앗아 수집한다.

원래 네 번째 영화였던 <백치들> (The Idiots, 1998) 은 일부 충격적인 장면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노출되는 관계로 산책하는 침략자로 대체되었으나... 나는 봤다. 사회에서의 '일상생활'을 포기하려는 젊은이들이 모여 고의로 하는 '백치 행위'에 몰두한다.


두 영화 모두 '개념'을 망각한다는 지점에서 유사성을 지닌다. 산책하는 침략자에서는 외계인에게 개념을 빼앗기게 되는데, 영화에서 빼앗기는 개념은 '가족', '소유', '일', '자신과 타인'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재밌는 지점이 있다. 첫째, 개념을 빼앗긴 사람들은 대단히 행복해 보였다. 둘째, 빼앗긴 4가지의 개념은 당시 일본의 사회적 문제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해석할 수 있다. 백치들에서는 '사회인'으로서의 개념을 자의적으로 망각한다. 이들 역시 사회적으로 얽힌 각자의 문제를 망각한 채 행복해 보이는 모습으로 백치 행위에 몰두한다.


개념의 망각이 반드시 전제되어야 하는 놀이가 있다. 바로 소꿉놀이이다. 가령 내가 엄마의 역할을 하려면 원래의 나, 혹은 엄마 역할을 하기 전에 맡은 아빠 역할을 완전히 망각해야 놀이를 수행할 수 있다. 즉, 산책하는 침략자와 백치들 모두 서사의 관점에서는 사회적으로, 영화의 관점에서는 영화적으로 일종의 소꿉놀이를 하는 셈이다.


소꿉놀이를 할 때 그곳은 외부의 세계와 고립된다. 소꿉놀이는 하나의 고립계이다. 갈라파고스 섬에서 새로운 진화종인 핀치(Finch) 새가 분화했듯이, 고립계에서는 새로운 종이 탄생할 수 있다. 그렇기에 새로운 종의 영화가 탄생하려면 고립계에서 다양한 방식과 역할의 소꿉놀이가 동반되어야 한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Night of the Undead, 2020)


탈압박과 시대착오

마지막 영화는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Night of the Undead, 2020)이다. 주인공 소희는 자신의 남편 만길이 언브레이커블이라는 외계인이며 자신을 죽이려 한다는 것을 알게 되고 반격에 나서게 된다.

<극도공포대극장: 우두>는 <백치들>과 동일한 이유로 생략되었다 (역시 따로 보려 했으나 도저히 볼 수 있는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에 대한 나무위키 개요 항목이다. 취소선으로 그어진 글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이 영화의 이야기는 상당히 어설프고 촌스럽다. 문맥적으로 맞지 않는 언행이 많고 설정에도 빈틈이나 오류가 상당히 많다. 개그 코드 역시 유치하다. 104,034명이라는 영화의 총 관객 수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따라서 영화에 대한 시대착오적이라는 평가는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혹평들 속에서도 공통적으로 말하는 긍정적인 평가가 있다. 바로 '개성 있다' 이다.


사실 이 영화가 개성이 넘친다는 인상을 주는 건 대단한 아이러니이다. 왜냐하면 영화 초반부에 외계인이 지구의 외부로부터 떨어졌듯이, 이 영화 역시 대부분의 이미지, 인물, 대사를 외부에서 차용했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 외계인이 등장하는 장면과, 후반부 공장신은 터미네이터를 연상케 한다. 경찰서 장면은 나홍진 감독의 영화 <곡성> (The Wailing, 2016)과 그 구도가 매우 흡사하다. 언브레이커블이라는 외계인의 명칭과 쉽게 죽지 않는 속성은 샤말란 감독의 영화 <언브레이커블> (Unbreakable, 2000)을 떠올리게 한다. '소희'에게는 이정현 배우가 연기한 <성실한 나라의 앨리스>에서의 수남이, '세라'에게서는 서영희 배우가 연기한 <김복남 살인사건의 전말>에서의 김복남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감독의 전작들까지 차용의 대상이 된다. 우주에서 시작하는 오프닝과 94년생 노안 개그는 <시실리 2km>, 후반부 폐공장과 우스워지는 강한 캐릭터는 <차우>, 빈도로에서 혼자 비틀대는 자동차는 <점쟁이들>를 떠올리게 한다.


이렇듯 영화는 고유한 지점 없이 오로지 레퍼런스로만 이루어져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개성이 넘친다는 인상을 준다. 더 나아가 영화 자체에 신정원이라는 감독의 지문이 찍혀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영화는 즉흥적이고 낯설고 무엇보다 상상력도 없지만 여전히 개성 있다. 영화를, 이미지를 생산하는 데 있어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의 방식은 커다란 힌트가 될 수 있다. 반드시 세상 어디에도 없던 새로운 이미지를 생산해야 할 필요는 없다. 그저 기존의 이미지를 마음대로 전복시키고 이어 붙이고 낯설게 만들어도 자신만의 고유한 개성을 가질 수 있다.


지역, 청년, 영화 제작의 방향성

정리하자면 워크숍은 5주간의 영화를 통해 다음과 같은 방향성을 제시한다.

<몽키 비즈니스>: 빈자리와 폐허로부터 문제의식 함양

<주말>: 자기 구성적, 시대 개척 정신, 전유와 재전유 전략

<태풍클럽>, <바보 선언>: 기존 관습의 종결과 Restart, 폐쇄된 공간에서의 커뮤니티 구성 전술

<산책하는 침략자>, <백치들>: 고립계에서의 역할 놀이를 통한 새로운 종의 분화

<죽지않는 인간들의 밤>: 시대착오적인 이미지 차용과 재조합에서 발현되는 개성


사실 이번 워크숍을 주관한 진행자 배은열 선생님과 대전권역 영상창작자 커뮤니티 INK (Image & Kids)는 위에서 말한 방향성에 대한 구체적인 키워드와 실천 방향을 이미 제시했고 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그 부분도 자세히 적고 싶었으나 이미 글이 6주 차 숙제 분량인 A4 1페이지를 아득히 벗어났기 때문에 생략하도록 한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남은 것은 바로 '나'이다. INK의 멤버도 아니며, 영상창작자도 아니고, 영화 비평가도 아닌, 그냥 영화 보기를 조금 좋아하면서 이 워크숍에 참여한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번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스스로에게 정말 많은 것을 물었다. 나는 왜 영화를 볼까. 나는 왜 영화를 보고 글을 쓸까. 나에게 지역성, 청년성이란 무엇일까.


왜 영화를 볼까

나의 첫 영화 보기 취미의 시작점은 지금은 방송국 미술팀에서 근무하고 있는 나의 중학교 친구의 영화 추천이었다. 고등학생 시절 당시 극장에서 개봉하는 영화가 세상 영화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나에게 친구가 추천해 준 <다크 시티>는 그야말로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이후로 나는 <인셉션>, <미지와의 조우>, <매트릭스> 같은 영화들을 보면서 환상적인 이미지와 이야기에 매료됐었다. 내가 영화를 보는 이유는 그게 전부였었다.


그러다 몇 가지 글을 보고 영화를 보는 이유가 조금 바뀌었다. 첫 번째 글은 벨기에의 영화감독 다르덴 형제가 했던 말이다.

사람들이 서로를 잘 모른다. 어느 누구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들의 초상을 보여주고, 어느 일요일  차고나 카페에서 그 작품들을 보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의 어떤 결속력을 형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두 번째 글은 영화 <아무르>에 대한 신형철 평론가의 글이다.

왜 문학이라는 것이 필요할까 ... 어떤 사람도 정확히 동일한 상황에 처할 수 없을 그런 상황을 창조하고, 오로지 그 상황 속에서만 가능할 수 있고 이해될 수 있는 그대로 이해하려는 시도, 그것이 문학이다 ... 영화 역시도 '이야기'라는 여소로 완전히 환원될 수 없다는 것쯤은 안다. 그러나 저 문장이, 이야기라는 요소를 문학과 공유하고 있는 영화에도, 이야기라는 요소가 차지하는 그 비율만큼은, 유효할 것이라고 나는 기대한다.

인간은 시공간에 속박되어 있기에 유한하며, 타인을 이해할 수 없기에 더욱 유한하다. 따라서 영화는 나에게 있어 내가 경험할 수 없는 타인을 조금이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왜 영화를 보고 글을 쓸까

이번 워크숍을 진행하면서 내가 처음에 인스타에 썼던 영화 후기들을 찾아봤다. 첫 번째 영화는 <바이센테니얼 맨>이었다. '앤드류는 반드시 인간으로 죽어야만 했을까. 앤드류는 앤드류로 살 수 없었을까. 해피엔딩이 아닌 것 같다, ' 이런 느낌의 글이었다. 두 번째 영화는 <옥자>였다. '무겁고 불편해질 수 있는 주제를 대중적으로 풀어냈다는 관점에서는 긍정적이지만, 인류가 마주한 난제들은 외면한 채 오로지 육식을 죄로 규정하고 심판하려는 자세는 이해하기 어렵다', 비판적인 글이었다. 세 번째 영화는 <케빈에 대하여>였다. '왜 다들 케빈과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가. 왜 아무도 주인공 '에바'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가'라는 글을 썼었다 (그러고 보니 이 주제는 브런치에 좀 더 길게 다시 썼다).


세 개의 글을 보고 나니 유사점을 발견했다. 사람들의 평을 보고, 대다수의 평이 내가 생각한 것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 같을 때 글을 썼다. 사실 여전히 그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왜 그럴까. '대중이 놓친 부분을 나는 알고 있다' 같은 사고방식에서 오는 지적 허영심일까? 그렇다고 하기에는 내 생각들 역시 얼마나 근거가 빈약하고 보잘것없는 것인지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


어쩌면 사람들에게 확인받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나만 이런 느낌을 받은 것이 아니다', 혹은 적어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듣고 보니 맞는 말 같기도 하다' 따위의 작은 인정 혹은 공감. 그걸 느꼈을 때 즐거움을 느꼈던 것 같다. 즐거움의 원인은 물론 인정 욕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은 안도감이었다. 내가 영화를 보고, 타인의 어떤 삶을 보고 느낀 소회가 다른 사람들과의 감상과 합치를 이뤘을 때의 안정감, 나만 소외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드는 안도감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어쩌면 소외를 두려워하는 불안과 공동체의 구성원이 되고 싶어 하는 발버둥일지도 모르겠다.


우리 집 앞


지역성, 청년성이란

30여 년을 서울에서만 지낸 나에겐 지역성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하다. 이제 막 대전에서 혼자 살기 시작한 지 몇 년 되지 않은 나는 종종 이런 경험을 한다. 아무리 대전에 오래 있어도 한 번 서울에 올라가서 나의 동네 지하철역에 내리는 순간 바로 이 생각이 든다. '아 집에 왔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구나. 지금까지 대전에서 지지고 볶고 했던 건 아마 몰카 같은 걸 거야'. 그러니까 내가 살던 동네가 나에게 주는 감정은 익숙함, 안정감, 안도감 같은 것들이다. 반대로 대전에 돌아오게 되면 이 감정들은 낯섦, 불안, 불안정으로 바뀌게 된다.


청년성이라는 단어 역시 나에게 있어 워크숍에서 말했던 자기 구성적, 시대 개척 정신, 전복, 개성 등과 같은 진취적인 단어들과는 거리가 멀다. 누군가 나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가고 무얼 하고 싶냐라고 묻는다면 나의 대답은 항상 같다. '과거로 돌아가기 싫어요'. 고등학교, 수능, 대학교, 군대, 학부연구생, 대학원 그 어떤 시절도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고 다시 해낼 자신도 없다. 이 시기들을 견뎌내게 했던 유일한 요소는 '불안' 한 가지였다. 가족의 시선, 사회적 시선을 만족시키지 못하는 내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 인정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안이다.


불안과 영화

다시 여기 '나'라는 인간이 있다. 이 인간은 영화 보기를 좋아하는데, 처음에는 그냥 환상적인 이미지와 이야기가 좋아서, 나중에는 타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아했다. 그리고 글을 쓰기 시작했다. 약간의 지적 허영심과 인정 욕구가 있지만, 결국 가장 글을 쓰는 가장 큰 이유는 소외를 두려워하는 불안과 공동체와의 사고방식 공유였다. 그리고 지역성과 청년성 역시 결국 불안이라는 한 가지 단어로 환원된다.


그래서 지역에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청년인 나는, 앞으로도 영화의 텍스트를 읽고 이를 해석하려 시도하려고 한다. 그리고 그 끝에는 '내가 가진 불안에 대한 해석'이라는 목표를 설정했다. 그리고 그 해석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서 나의 것으로 만들어보려고 한다. 그리고 혹시라도 할 수만 있다면 이것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다. 그것이 도움이 될지, 피해가 될지는 잘 모르겠다. 적어도 나는 영화를 읽고 씀으로써 불안을 받아들일 수 있었기에, 당신은 어떤지 물을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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