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르망 Aug 13. 2024

직장인 10년차이구요, 아빠는 처음입니다.

2024년 8월 12일의 기록


10년차 직장인이자, 8년차 남편, 18개월차 아빠의 역할을 누구보다 씩씩하게 잘 해내고 있다고 믿어왔다. 자신감 충만했던 내가 올해부터 조금씩 스스로를 의심하기 시작하더니, 요즘은 '잘 해내고 싶은데 마음처럼 쉽지 않네'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갑작스레 특별한 이벤트들이 많아져버린 탓일까.




구일이의 입원


임신 14주 차의 구일이가 지난 토요일 입원하고 말았다. 자궁에 피가고여 하혈을 했고, 양수샘이 의심된다고. 예상해 보건대, 새벽잠을 깨우는 기침감기와 새벽마다 엄마에게만 안아달라는 18개월 아들의 콜라보로 요 며칠 뜬눈으로 밤을 새웠던 것이 원인이지 않을까 싶다.


입원해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남편으로서 임신부인 구일이를 조금 더 도와주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라 평소에 잘 흘리지 않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일과 육아를 병행하느라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다 보니 더 힘들게 육아하고 있었던 구일이의 상황을 보살피지 못했다.


배가 아프다고 할 때 조금 더 신경 써서 알아봐 줄걸. 아프다는 신호를 나에게 주었는대도 내가 그걸 무시해 버렸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나. 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첫째 아들의 고열


첫째 아들은 5일째 고열로 고생하고 있다. 감기로 기침을 간헐적으로 하더니 지난 수요일부터 열이 올라 38도를 웃도는 열로 고생 중이다. 다행히 열을 앓고 있다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고 있지만, 3일 이상 38도 이상의 열은 아이에게 좋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더 빨리 수액을 맞으러 갈걸, 하는 후회가 밀려든다. 아들의 아픔을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 자신에 대한 죄책감도 커진다.


8월 12일 휴가를 쓰고 아들을 병원에 데리고 갔다. 아침 일찍 짐을 싸고 먹을 것을 챙겨 병원에 가는 길이 고단했지만, 얼른 지긋지긋한 열병과도 안녕하고 싶다는 마음에 힘든지도 몰랐다. 수액 한 번이 아들의 완치를 보장하지 않겠지만, 나의 고생으로 아들이 조금 더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기를.




일 복이 터져버린 직장생활  


이런 와중에 일은 왜 이렇게 쏟아지는 건지. '열심히만'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잘해야만'하기까지 한, 책임감을 느껴야만 하는 일들이 나에게 주어져 요즘은 퇴근해서도 일 생각을 떨쳐내기가 힘들다. '아잇 몰라'하며 쏟아지는 일을 무시해버리고 싶지만 소심한 성격 탓에 그것마저도 쉽지 않다.


일이 많아 열심히 하는 것까지는 좋다. 다만, 그 일더미가 가정에까지 밀려 들어와 버리는 느낌이 들어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천근만근의 몸은 퇴근했지만 마음이 온전히 퇴근하지 못할 때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영혼 없는 육아를 한다.  




육아 난이도가 더 높았던, 내 시간을 더 할애해야만 했던 '돌 전' 육아를 하면서도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출근하는 주중에도 구일이와 새벽 시간에 번갈아가며 수유를 했고, 육아단축근무를 쓰고 일찍 퇴근해 아들이 잠들 때까지 최선을 다해 육아했다. 그럼에도 일과 육아의 병행을 거뜬히 해내며 '몸은 고단한데 참 보람차다'라고 생각하며 씩씩하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당시에는 적성에 맞는 일을 하며 직장인으로서 자존감을 차곡차곡 쌓아 갔었다. 몸이 힘들어도 정신이 단단하니 무슨 일이든 헤쳐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달까. 높은 자존감이 삶의 원동력이 되었고, 일과 육아를 잘 해내는 내 모습이 기특하고 멋져 보여 하루하루를 보람차게 보낼 수 있었다.


남편 8년 차이자 아빠 18개월 차인 나는 요즘 일과 육아를 병행하며 약간은 버겁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하다 보니 일에서 성취감을 느끼지 못함과 동시에, 둘째를 임신한 구일이의 육아를 도와주지 못하고 있다는 죄책감이 동시에 나의 삶을 짓누르고 있다. 


나 스스로를 생각하며 떠올렸던 '멋진 아빠, 멋진 남편, 멋진 직장인'의 이미지가 사라지고, '그저 그런 사람'되어버린 것 같아 마음이 무겁고 지친다. 어쩌다 나 스스로의 자존감을 지키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것인지. 감당할 수는 있지만 감당하고 싶지는 않은 이벤트들이 내 삶을 짓누르고, 그 짓눌림에 정신을 못 차리는 하루하루가 쌓이다보니 삶 자체가 조금은 무기력해져버린 것 같은.


육아와 달갑지 않은 일을 병행한다는 것은 정답이 없는 문제에 대한 풀이과정을 정성스럽게 쓰는 것과도 같다. 답이 없는 것을 알지만 모든 과정을 정성스럽게 해내야만 하는 그런 일들.


정답을 찾으려 하지 말고 풀이과정 자체를 즐기면 좋겠지만, 때로는 명확하게 정답을 알려주는 참고서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부쩍 커버린 300일의 아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