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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새난슬 May 20. 2024

시선 너머의 신 - 릴케, 김리윤, 이현호 시 비평

신은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종교의 대상으로 초인간적, 초자연적 위력을 가지고 인간에게 화복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존재’라고 명시되어 있다. 사전이 무어라고 하든 사람에게는 제각각 별도의 정의를 내린 ‘신’이 있다. 종교적 관점, 철학적 관점, 문화적 관점, 무신론적 관점 등 다양한 관점 안에서 사람에 의해 계속해서 재정의되고 있는 것이다. 신을 사전적 정의로만 받아들이는 경우도 몇 있지만, 어떤 시인들은 ‘신’이 가진 이미지와 관념을 자신만의 사유가지고 시를 쓰기도 한다.


릴케의 시 「가을」는 화자가 잎이 지는 모습을 목도하며 ‘밤에는 무거운 지구가/모든 별들로부터 고독 속으로 떨어진다’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시를 읽는 사람은 가을이라는 제목과 잎이 진다는 문장을 통해 낙엽이 떨어지는 나무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이미지화할 수 있다. ‘우리 모두가 떨어진다 (…)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다’는 진술은 그 나무를 인간의 생애 혹은 개개인의 경험에 비유한 것이 아닐까 하는 추측이 이어지도록 한다. 살아가는 인간들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필연처럼 찾아오는 고독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 고독은 지금 발을 딛고 있는 곳, 그보다 더 깊은 아래 어딘가로 떨어지는 감정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시의 마지막 연을 보면 릴케는 결코 그러한 인간의 생애를 절망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 한없는 추락을 부드럽게

두 손으로 받아주시는 어느 한 분이 있다


정황으로 보아 여기에서 말하는 ‘한 분’을 곧 ‘신’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구와 우리 모두가 ‘떨어지는’ 와중에, 그 추락을 ‘부드럽게 받아주는’ 것이 가능한 것은 통상적으로 신 외에는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연을 읽고 다시 첫 행으로 돌아가면, ‘하늘나라 먼 정원이 시들 듯’ 잎이 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러한 추락이 있다 해도 끝이 없는 곳으로 떨어지지는 않는 것은 곧 ‘신’의 존재 덕분임을 인식할 수 있다. 릴케의 시 안의 ‘신’은 모든 추락으로부터 우리를 받아주는 존재이다. 지구가 떨어지고 모두가 추락한다는 암울한 상황에서 그것을 받아주는 존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쩐지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다는 마음이 된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두 손으로 받아주는 존재가 릴케에게는 ‘신’인 것이다. 릴케의 또 다른 시 「가을날」에서는 ‘신’이 직접적으로 호명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주여, 가을이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놓으시고

들에다 많은 바람을 풀어 놓으세요.


「가을날」에서 ‘주’라고 정확히 명시한 것이나 다른 시 「가을」과 유사한 제목인 시를 함께 보면, (시인과 화자가 언제나 완전히 일치한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그가 유신론적 태도를 취하고 있으며 그 관점을 시에 반영했다고 추측할 수 있다.


릴케가 유신론적 관점에서 신을 이야기 했다면, 김리윤의 시에서 나타난 신은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김리윤의 시 「재세계(reworlding)」의 부제 reworlding은 세계(world)에 진행 중(ing)을 결합한 용어이고, 그 앞의 re가 붙어, 즉 세계는 계속해서 다시 만들어지는 중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누가 세계를 다시 만드는가. 세계를 다시 만드는 것이 가능한 존재는 무엇인가(혹은 누구인가). 그 대답은 시를 마지막까지 읽지 않아도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시에서 여러 번 반복되어 등장하는 ‘불빛’은 전기를 매개로 작동하는 것이고, 6연에서는 화자가 직접적으로 ‘세계의 근원은 이제 전기’라고 진술한다. 시 「재세계(reworlding)」의 ‘신’은 전기로 작동되는 신이다. 세계는 전기-빛으로 가득하고, ‘극장에 꽉 들어찬 어둠은 그 작은 불빛 하나 숨겨주지’ 못하며 ‘주인공은 12월 밤거리의 쏟아지는 불빛 때문에 맞은편에서 다가오는 것들도 알아보지 못한다’. 따라서 ‘세계의 근원은 전기’라는 진술은 본 시의 핵심을 관통하는 문장이 된다. 전기로 작동되는 영화관, 자동차 등이 세계에 가득하고(시에 등장하는 전기로 작동하는 모든 것들은 인간이 생활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요소를 뛰어넘어, 쾌락을 위해 작동된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렇게 전기는 세계의 신과 동등한 위치로서, 혹은 신 그 자체로 묘사되는 것이다.


이현호의 시집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에서는 지극히 개인적이면서도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인간들이 공유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해 말한다. 이때 시인은 사랑을 종교에 빗대어 말하는데, 그중 「살아 있는 무대」는 종교, 사제, 신이라는 종교 용어를 직접적으로 언급하며 시인이 생각하는 사랑을 더욱 여실히 발화한다.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였고/혼자와 더불어 나는 혼자였다/날이 밝으면 나도 혼자처럼 아름답고 싶어요’는 아름다운 사람을 본 뒤 ‘아름다움은 무슨 색일까’ 고민하며, 결국 여기에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찬사이며, 그 상대와 함께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듯한 태도로 말을 이어가는 것 같지만, 결국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은 혼자’라며 사랑하는 상대와 함께 있지 못하고 홀로 있는 화자 본인(주체)과 상대(객체)를 부정하지 않는 것으로 고양되었던 마음은 점점 차분해진다. 이후에는 이런 진술이 이어진다. ‘기도를 가장 먼저 듣는 건 나 자신입니다.’ 기도는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을 때 신적인 존재를 향해 비는 행위인데, 시인은 신에게 닿기 전 자신으로부터 발화되는 기도를 ‘가장 먼저 듣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 덤덤하게 진술한다. 절대적인 존재인 신과 그에게 바치는 인간의 행위들을 곧 자신이 품은 사랑이라는 감정과 동일시, 혹은 같은 선상에 두는 것이다.


이처럼 각각의 시인마다 신에 대한 사유와 관점은 모두 다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시의 재료로 사용될 수 있고 물론 신도 예외는 아니다. 예외가 될 수 없다. 각 시대와 지역에 따라 신에 대한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고, 그 시선 자체를 가로막는 것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한 일이다. 시인들은 각자의 시선을 가진 채로 시를 쓰는 존재이고, 그렇게 신은 그 본질이 어떠하든 계속해서 시인에 의해 재탄생된다. 누구나 신에 대한 사유를 한 번쯤은 해보았을 것이다. 신은 하느님으로도, 주변 자연으로도, 혹은 그 자체로도 존재하거나 혹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우리는 늘 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가고, 그에 대한 믿음의 여부는 제각각이다). 오랫동안 인간은 신의 아래에 위치해 있다고 규정되어 왔고, 시인들은 지극히 사적인 영역으로 신을 끌고 들어와 각자의 이야기를 한다. 신은 시인의 곁에 그런 식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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