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들여다본 다음 - 도나 해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by 박새

[2024-2] 시론(A)



들여다 본 다음

- 도나 J. 헤러웨이, 『트러블과 함께하기』, 마농지, 2021년.



우리는 왜 시를 읽을 때 단어 사전을 찾아보지 않을까? 이 문장은 얼마 전 한국 시인이 영어로 쓴 시의 제목에 달린 각주이다. 시를 읽을 때 우리는 지면의 단어와 문장을 읽으면서 낯선 세계로 접속한다. 다만 정작 그 단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발생하는 효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하지 않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간단한 단어와 문장으로 구성된 시라 하더라도 그 시를 읽음으로서 발생하는 감정적인 변화에 대해서는, 그렇게 느끼는 것보다 더 앞서서, 우리가 ‘알고 있다’고 감지하는 단어─개념이 정확한 자리에 있고 그 ‘의미’가 틀림없이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실제와 같지 않다면, 혹은 실제와 같다 하더라도 놓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을 인지한 이후에는 어떤 행동을 취할 수 있을 것인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우리는 왜 시를 읽을 때 사전을 찾아보지 않느냐는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보자면 그것은 우리가 어렴풋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인지하지 않더라도 누구나 연결된 상태로 삶을 이어간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대강 연결되어있다는 감각을 가끔씩만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다. 연결되지 않은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에 대해 깊게 들여다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 도나 해러웨이는 저서 『트러블과 함께하기』에서 연결됨과 그 이후의 실천적 행위를 실제 사례와 함께 주장하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을 더 다층적으로 바라보며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연결됨에 대해 생각하며 3장을 읽어보고자 한다.


도나 해러웨이는 “진실로 현재에 임하는 것”이라는 말을 통해 기꺼이 이 세계의 많은 문제들, 즉 ‘트러블’과 함께 하기를 선언한다. 여기에서 트러블은 우리에게 이미 인식된 것과 아직 인식되지 않은 차원으로 굳이 나눌 수 있겠지만, 어찌되었든 그것이 우리네 삶에 혼란을 빚어내는 데에는 틀림이 없다. 그렇다면 도나 해러웨이가 표제에서부터 말하듯 ‘트러블과 함께하기’는 어떻게 할 수 있는가. 그는 미래까지 가지 않아도 “현재에 임하는 것을 배우기를 요구”한다고 말한다. 이후 “손상된 땅 위에서 응답-능력을 키워 살기와 죽기라는 트러블과 함께하기를 배우는 일종의 시공간”을 가리킨다는 ‘쏠루세’ 및, “무수히 많은 시간성과 물질성을 불어넣는 균사를 가진, 두텁고 진행 중인 현존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카이노스의 개념을 제시한다. 쏠루세와 카이노스는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곳으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트러블과 함께하는 방법으로 제시되는 것은 ‘공-산(共-産, sympOlesls)’이다. 공-산은 ‘함께-만들기’라는 뜻으로, 트러블과 함께하는 실천적 방법론을 제시하는 키워드가 된다. 이 페이지에서 도나 해러웨이는 “지구의 생명체들은 혼자가 아니”라며 본 이론의 서문을 시작한다.


도나 해러웨이가 ‘크리처(인간과 비인간을 아우르는 말)’, 쏠루세 등 새로운 조어를 받아들이고 그의 주장을 따라가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존에 알고 믿었던 정보를 해체하고 재조립할 필요가 있다. 우선 ‘개체’라는 단어는 읽고 인지했을 때 대강 무엇인지 알고 있으나, 정말 그것이 문제 없이 성립되는가에 대해서는 의심한 적이 없었다. 생물학에서의 개체는 ‘하나의 생물체’를 뜻한다. 언뜻 생각했을 때 우리를 포함한 모든 생명과 비생명은 개체로 존재하는 듯하다. 다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개체라고 인식되는 것들도 사실은 수많은 요소와 구성의 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도나 해러웨이가 말하는 공-산의 개념과도 맞닿아 있다. “그 어떤 것도 자기 자신을 스스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은, 결국 인간이든 비인간이든 관계 없이 ‘개체’라고 인식되는 ‘그것’을 볼 때 그것이 ‘홀로’ 성립될 수 없다는 말이다. 공간 및 시간의 규모와 무관한 공생적 집합체를 ‘홀로바이온트’라고 하며 도나 해러웨이는 단위(unit)와 존재(being)을 대체할 단어로 홀로언트(holoent)를 제시한다. 홀로언트라는 개념의 인지는 공-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공생적 집합체’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공생, 즉 상호 이득이 되는 전제와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유전자, 세포, 기관 등 생물학적 실체보다 역동적인 복잡계에서 다양한 내부-작용을 하는 매듭과 닮았기 때문이다. 린 마굴리스의 말에 따르면 전혀 다른 단위 및 존재로 보이는 것들조차 사실은 낯선 친밀함을 가지고 있으며, “세포, 조직, 기관, 종 들이 낯선 것들 사이에서 오래 지속되는 친밀성을 통해 진화”한다고 한다. 이후 제시되는 실제 지구 상의 사례에도 밀접하게 닿아있는 논리이다. “규모와 상관 없이 홀로바이언트를 구성하는 모든 파트너들은 서로에게 공생자”인 것이다.


인식을 이끌어가기 위해 도나 해러웨이는 발달공생 연구를 위한 모델 시스템을 내놓는다. 단지 이론을 제시하고 그치는 것이 아닌, 세게에서 어떻게 본인의 이론이 접목되고 있는지에 대한 사례를 가지고 오는 것이다. 기존의 유전자적 뿌리에 깊게 관여하고 있지 않더라도 그와 흡사한 주변의 ‘낯선’ 것과 연결되는 사례가 제시된다. 예시로는 123p의 곤충 이야기이다.


난초들은 특정한 종의 곤충 암컷 생식기를 닮은 것으로 유명한데, 이 곤충은 난초의 수분에 필요한 종이다. 자신들과 같은 종류의 암컷을 구하는 정상적인 수컷들이 특정 종의 난초의 색깔, 모양 그리고 곤충의 페로몬과 흡사한 매혹적인 물질에 이끌린다.


“홀로바이온트들이 떨어져 갈라진다면 어떻게 될까?”라는 물음에 대한 답은 이 사례에서 약간의 실마리를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트러블과 함께하기’라는 표제를 따라 도나 해러웨이는 위와 같은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어서 나오는 웹툰의 인용이 몹시 흥미로운데, 랜들 먼로의 웹툰 <꿀벌 난초Bee orchid>는 위의 질문에 대한 일종의 대답을 내놓는다. 만화 속 난초 ‘오프리스 아피페라’는 과거에 암컷 꿀벌의 모양을 닮았지만, 현재에는 그 꿀벌이 사라졌으며, 번식에 필요한 파트너 없이 자가수분에 의존하며 지내온 것이다. 다만 난초는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다. 만화 속 사람이 “꿀벌의 꽃을 기억”하겠다고 말하는 것은, 우리가 전혀 관계 없이 지내는 것만 같은 이 세상에서 그러한 의지 하나가 “부활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고 도나 해러웨이는 말한다. 흔적만이 남아 있고, 그 이전에 관계되었던 꿀벌은 사라졌지만, 누군가가 그 사실을 기억하겠다며 말해주는 순간은 어떤 과학과도 멀리 떨어진 채로 그저 우리를 시적인 순간으로 데려가는 듯하다고 느꼈다.


하나의 예시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우리가 목격하고 일부분 참여할 수 있는 ‘부활’의 사례가 이어서 소개된다. 인류세와 자본세로 들이닥친 수많은 어떤 사태(나는 그것을 멸종 혹은 멸망이라 생각했다. 반드시 관계되어야 하는 상대가 사라졌을 때 홀로 남은 대상은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 것인가. 다만 위의 사례를 통해 영원한 ‘사라짐’은 없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에서, 도나 해러웨이는 과학-예술 활동가들의 네 가지 세계를 만들어보자고 주장한다. “로스앤젤레스의 실뜨기연구소가 주도하고 조정하는 ‘산호초 코바늘뜨기 프로젝트’와 함께하는 전 세계의 산호초들” 외 3가지 사례가 더 있지만, 본 발제문에서는 첫 번째 사례를 다루어 보고자 한다. 바다 생태계가 위험에 빠졌다는 사실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이는 드물 듯하다. 바다 속에서 자라는 산호초는 해양 생태계에서 가장 높은 생물다양성을 가졌지만, 지구 온난화로 인해 더이상은 그러하지 못할 수도 있다. 수많은 크리터들이 산호에 의존하며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서 이러한 현상은 반갑다고는 할 수 없다. 시인 크리스틴은 2005년 산호 백화 현상에 관한 논문을 읽은 뒤 마거릿에게 산호초 코바늘뜨기를 제안한다. (‘코바늘뜨기’는 필연적으로 도나 해러웨이의 ‘실뜨기’ 개념을 연상시킨다.) 털실, 면, 비닐봉지 등 여러 재료들이 모여 코바늘뜨기에 재료로서 참여하는데, 수많은 공예가들이 육체적 모양을 갖추며 도나 해러웨이는 이를 “손상된 행성에서 살아가기 위한 예술”로 이해한다. 이것을 단순히 ‘쓰레기’로 ‘바느질’을 하는 행위로만 바라보는 것은 이들의 내면에 깊게 자리잡은, 인류세와 자본세에서 ‘부활’에 집중하는 의지를 모독하는 것과 다름없겠다. 우리는 특정한 몇몇 영웅들에게 맡길 것이 아니라 “서로의 삶에 개입하는”─누구나 그러하다─ 형태를 인지하며 어떻게 ‘트러블과 함께’할 것이며, 어떤 사례가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겠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뭉뚱그려 ‘지구가 아프다’는 평평한 문장으로 세계를 인식하는 것보다는, 그 문장이 태어나서 우리에게 와닿기까지 진행된 수많은 논의들을 더 깊게 들여다보아야 할 것이다.


‘시 읽기와 시 쓰기’라는, 불안한 현실에서의 도피로 취급되는 행위는 도나 해러웨이의 이론들을 접한 뒤에는 왜 인류가 ‘시’라는 장르를 개척하고 과거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심지어는 먼 미래에도 사라지지 않을 것만같은 이 행위가 진행되고 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도록 한다. 나에게 시 읽기와 시 쓰기는 한때 이것이 다 무슨 소용이냐 싶은 마음을 불쑥 치켜 세우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시를 읽고 쓰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나와 타자의 삶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는 점에서, 그것이 단순한 개인만의 쾌락에서 벗어나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을 맞이하도록 한다. 시 읽기와 시 쓰기를 하는 사람 중 ‘트러블’을 겪지 않은 주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나 읽는 한량’ 등의 지칭은 시 읽기와 쓰기의 주체가 되는 인간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곳에서 희희낙낙 그저 멋드러진 텍스트에 빠져 있는 사람으로 비치게끔 하지만, 시 쓰기와 읽기라는 행위 자체가 실은 전혀 그렇지 않음을 반증한다. ‘시’로 집약되는 텍스트들은 단지 어렴풋하게만 개념을 알고 쓰거나 읽을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진실로 그것에 대해 깊게 파고들며 그것이 있어야할 자리에 단어를 두고 읽는다는 가능성을 완전히 지울 수 없을 것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시선 너머의 신 - 릴케, 김리윤, 이현호 시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