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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진 Dec 22. 2022

귀하에게 사랑 올립니다 (3)

세 번째 편지


 나의 귀하에게


 하루가 너무 짧아요. 요즘의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무척이나 많아서 하루가 스무 시간은 더 길었으면 좋겠어요. 공부에 재미를 붙인 것은 올해 들어서 가장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최근 한 달 동안은 무료하다던가 지루하다던가 심심하다는 말을 마음에올린 적이 없습니다. 당신에게 편지를 써 올리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 되고 있습니다. 우리 사이에는 이미 대화가 충분하지만요. 모자라지 않고 넘쳐서 아쉬울 일은 없을테니 오늘도 이렇게 글을 씁니다. 평소에도 언변이 좋아 줄곧 잘 떠드는 나이지만, 편지글로서 일방적이고 정제된 애정을 주는 일도 제법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현재 이 시간의 지금에만 남길 수 있는 문장을 소중하게 기록하는 과정은요. 당신을 위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나를 위하는 일입니다. 아무래도 나는요. 사랑하는 우리를 위해서 글쓰기를 멈추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내심 당신이 이 순간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설레할지도 모르잖아요. 그거면 됐어요.


 7일 남았네요. 우리는 7일 뒤에 함께 살기로 약속했어요. 얼떨떨한 지금은 실감이 잘 나지 않지만 날짜가 좁혀지는 매일의 감회가 새롭겠죠. "내년부터는 모든 것이 달라질 거야." 당신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세상은 아직 나의 바람 만큼 열려있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의 부모님 세대에서 결혼 이전에 동거를 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찾기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걱정과 염려를 존중해야죠. 우리의 연애 시절에 이만한 변화는 정말 큰 변화에요. 누구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기회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타이밍이라고 할 수 있는 시기가 좋았고, 두 사람의 마음과 관계가 좋았으며, 나의 삶에 당신 몸집 만큼의 여유 공간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죠. 나는 당신과 함께하는 모든 일에 좋은 예감이 듭니다.

 일이 절대로 잘못되지 않을 거라는 엉뚱한 확신이 아니라, 잘못 흘러가더라도 당신이 옆에 있다면 어떻게든 바로 잡을 수 있을 것 같다는 믿음이에요.


 좋은 연습이 아닐까요?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에 대부분의 인연은 백년가약을 맺은 다음에야 살림을 합치지 않습니까? 그런 와중에 가장 많이 듣는 말은 "서로들 다투지 말고 사이 좋게 지내라."이기도 하구요. 막상 살을 붙이고 살다보면 질리기 마련이라는 걱정이 줄을 잇기도 합니다. 당신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저 설레는 좋은 시기의 나는, 잘 모르겠어요. 물론 익숙해지고 편해지기야 하겠죠. 나는 5년 뒤에도 10년 뒤에도 이렇게 자리에 앉아 당신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편지를 쓰고 싶어요. 그런 일이 가능할 거라고 막연히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내가 특이한 여자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나는 남자를 잘 모르거든요. 우리 아버지가 걱정으로 부풀어 계신 것도 전부 그 탓이겠죠.

 당신의 단단한 팔뚝을 주무르면서 설레고, 밤새 일하느라 정돈하지 못한 까끌한 수염이 닿을 때마다 설레고, 한 달음에 나를 번쩍 들어올릴 때도 설레고.


 이제부터는 일주일 뒤의 나를 위해 적습니다. 나는 살면서 나쁜 사람을 많이 만났어요. 굳이 겪을 필요 없었던 고통과 상처를 많이 받으면서 살았죠. 터무니 없이 마음이 약하기도 하고, 또 그래서 단호하고 인정 없을 때도 있어요. 눈물도 많고 웃음도 많아요. 후회도 많은 편이지만 내색하지 않아요. 후회의 모든 순간을 자기 성찰로 돌아보는 습관을 가지고 있거든요. 아버지는 내가 바보같이 착하대요. 내 생각에도 맞는 말 같아요. 항상 능글맞고 열려있는 자세로 사람을 대하려고 해요. 실없는 농담이나 정다운 인삿말 하나에 미소를 띄우는 타인의 얼굴을 바라보는 게 즐겁거든요. 나는 옛 것을 좋아하고, 글 쓰는 걸 좋아하고, 영화를 좋아하고, 음악을 좋아하고, 영어 공부에 빠져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좋아해요.

 이기적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요. 하루를 보람차게 살려고 노력해요. 무엇보다 중요한 건 매 순간에 최선을 다 해서 열심히 한다는 거에요. 나는 내 무릎보다 키가 작은 어린이에게도 배울 점이 많다고 생각해요. 아스팔트 벽을 비집고 피어난 들꽃에게 교훈으로 삼을 점이 있다고 생각해요. 내가 총명히 눈을 빛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에서 가르침을 얻을 수 있을 거라 믿어요. 꽃답고 젊은 나는 누군가에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열정적인 사람이에요. 나의 청춘은 휴식을 모르는 봄의 토끼처럼 , 알에서 막 깨어난 새처럼 이곳 저곳 정신 없이 나다니고 싶어하는 시기인데요. 그런 나를 거뜬히 감당해보이겠다 말하는 당신이 얼마나 매력적인 사람인지!

 그런 나를 사랑하는 당신은 또 얼마나 열정적인 사람이겠습니까?


 있죠. 우리가 함께하는 동안은 이런 치기 어린 나의 모습을 잊지 말아주세요.

 아름다운 젊은 시절의 내 모습을 당신의 기억 속에 곱게 새겨넣고 싶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떤 것을 꿈 꾸었는지. 내가 당신을 기억하는 만큼 당신도 나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 서로에게 아픈 존재가 되지 맙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광석의 노래가 떠오르잖아요.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 말이 맞아요.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끄떡하지 않을 자신이 있는, 너무나도 무뎌진 나 조차도 당신에게 상처를 받는 것 만큼은 견디기 힘들 것 같아요. 당신도 알다시피 나는 앞으로 울 일이 많이 남았거든요. 당신이라도 내 눈물을 훔쳐가지 않았으면 합니다.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면 그렇게 해주세요.


 당신의 사소한 배려와 보호에 나는 번번히 녹아내려요. 몇 번이나 말하지만 내 아버지가 걱정할 만큼 그래요. 나는 내색하지 않았다고 스스로 뿌듯해 하고 있었는데 사실은 남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에요. 내가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던지 들떠 보였나봐요. 여생 좋은 일이라고 없었던 내가 그러니까 다들 심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요. 하필이면 내가 그래서 당신이 달달 볶아지는 게 안쓰럽고 미안하네요. 그런데도 오히려 동기 부여가 된다며 보란듯이 잘 살아볼 거라고 말하는 당신이 눈부시게 멋집니다.


 사람 인연이라는 거 함부로 예측하는 거 아니라고들 하지만 당신을 만난 게 운명이 아니라면 뭘까 싶어요.

우리 크리스마스 이브에 또 만나겠지만, 일주일 뒤에는 심지어 같이 살겠지만은 그래도 많이 보고싶어요. 그래도 많이 보고싶어하는 감정을 다른 말로 하면 사랑이겠죠. 맞아요. 이것 전부 사랑한다는 말이에요. 최근에 당신 감기 기운에 시달리고 있어서 내가 걱정이 많네요. 부디 건강하세요.


 그리고 걱정 말아요.

 우리, 진짜 재미있을 거에요.


 2022년 12월  22일,

당신의 사랑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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