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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r 07. 2022

초록친구 (1)

초록친구와 죽음의 무게


"개나 고양이 같은 동물은 안 키우세요?"


많은 사람들이 내게 묻는 질문이다. 




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사람과 고양이를 자연스럽게 연결한다. 실제로 많은 작가들이 고양이를 키운다. 개나 새를 키우는 작가들도 많다. 그 작가들이 작품 속에 자신의 반려동물을 등장시키는 것을 보면 샘나고 부럽다.


내가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산책길에 만나는 개 한 마리 한 마리에 열광하며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집 근처 길고양이들을 염탐한다. 앵무새 유튜브도 구독하고 있으며 수족관 앞을 지날 때마다 찰싹 달라붙어 끝없이 구경을 한다. 


하지만 동물을 키우지 않는다. 정말 정말 키우고 싶지만 키우지 않는다. 앞으로 키울 계획도 없다. 말로는 매일 개 키우고 싶다, 고양이 키우고 싶다를 달고 살지만 적극적으로 입양을 알아보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책임감이 없는 놈이라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21살 때쯤, 대책 없이 고양이를 집에 들인 적이 있다. (당시 정확한 상황은 기억나지 않음) 페르시안 고양이를 키우는 동갑 남자애가 자기 고양이가 새끼를 많이 낳았다며 한 마리 주겠다고 한 것이다. 당시엔 중성화라는 것이 일반적이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 거절했다. 하지만 당시 사귀던 남자친구가 키우다 못 키우겠으면 자기가 집에서 키우거나 다른 사람에게 입양시켜줄 테니 일단 데려와보라는 식으로 설득했다. 그래서 나는 구멍 뚫은 종이박스에 들어있는 까만 페르시안 고양이를 받게 되었다.


새까만 페르시안 고양이는 정말로 애교가 많고 다정했다. 집에 온 첫날부터 내 뺨에 꾹꾹이를 했다. 고양이에 관련된 책도 읽었고 정보도 열심히 찾아봤다. 모래와 사료도 샀다. 이론으로는 고양이 키우는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내가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나의 뜨거운 관심은 3일을 가지 못했다.


컴퓨터 할 때마다 마우스를 계속 건드리려 하고, 자신의 똥꼬를 내 얼굴에 가져다 대는 고양이가 조금 부담스러웠다. 고양이는 혼자 잘 있는다던데 그렇지도 않았다. 내가 없으면 서럽게 울었고 계속 관심을 요구했다. 키보드 위에 앉은 고양이를 밀쳐낸 적도 있는데 그 상처받은 얼굴이 지워지지 않는다. 결국 고양이는 당시 남자 친구 집으로 갔다가 결국 다른 지인 집으로 가게 되었다. 그 집에서 새로운 이름도 생겼다. 


이게 끝이 아니다. 2년 후 강아지를 맡게 되었다. 위의 상황과 정확하게 같은 경로였다. (잠시만 데리고 있어라) 강아지는 정말 활동량이 많았고 끝없이 설쳤다. 침대 위에 올려줄 때까지 울었고 한 시도 나를 가만두지 않아서 컴퓨터 할 때는 발로 놀아줘야 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아지는 그 유명한 비글이었다) 결국 그 강아지도 당시 남자친구의 손에 의해 다른 집으로 갔다. 다른 집에서 정착하지 못하고 몇 군데를 더 거쳐 결국엔 시골로 갔다고 한다. 



처음부터 키우겠다고 마음을 먹고 키운 게 아니라 떠맡은 거라 그랬던 걸까? 

아님 나란 인간은 원래부터 자기밖에 모르는 놈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나는 책임감이 없었다. 내가 시간이 있으면 예뻐해 주는 것이고 내가 바쁠 때는 귀찮았다. 이 두 사례를 통해 나는 생명을 책임질 책임감이 없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다시는 동물을 키우지 않기로 했다. 


이후로 나는 동물을 떠맡게 되는 악몽을 정말 자주 꾼다. 거의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꾸는 것 같다. 맡을 때마다 나는 물을 안 주거나, 나의 무게로 찌그러뜨리거나, 잃어버린다. 그저께 밤에도 개를 키우다 잃어버리는 꿈을 꿨다. 


뭔가 키우고 싶은 본능은 게임으로 이어져 심즈를 엄청나게 열심히 하다가, 20대 후반 정도부터 식물을 키우기 시작했다. 식물도 처음 키웠을 때는 계속 죽이기만 했다. 그런데 식물은 동물만큼은 책임감을 요구하지 않았다. 동물은 가족이 되어야만 했지만 식물은 동거인 정도로 지낼 수 있었다. 움직이지도 않고 쓰다듬을 수도 없지만 오히려 그래서 계속 함께 할 수 있었다.




개나 고양이를 입양해 그들이 소재가 되는 그림을 그리거나 만화를 만드는 헛된 미망을 품었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초록친구들로 글을 쓰고 만화를 그리기로 했다. 마음이 후련하다. 악몽도 점차 줄어들길 바란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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