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반 피터(6)
현장체험학습의 열기가 사그라든 아침이 어색하다.
지난주 내내 우리 반 최대 이슈는 현장체험학습이었다.
날 좋은 가을날 버스 타고 한 시간도 넘는 거리까지 가는 것도 좋은데 놀이공원이라니! 그것도 자유시간으로 가득 찬 현장체험이라니. 아이들은 2학기 시작과 동시에 현장체험학습 날짜와 장소를 거듭 물어봤다.
날짜와 장소를 안 다음엔 버스에서 어떻게 앉을 것인지가 다음 이슈였다.
그다음엔 놀이공원 안에서 어떻게 체험을 해야 하는지 방법도 궁금하고, 도시락도 궁금하고, 그날 날씨도 미리 궁금하고, 아무튼 현장체험학습에 대한 기대로 시작된 2학기가 갑자기 추워진 날씨만큼 쪼그라들었다.
열정과 냉정 사이, 일주일 지난 현장체험학습에 대해 이야기해볼까 한다.
가을다운 날씨가 계속되다가 아침에 구름이 쫙 끼어도 아이들 얼굴은 교실을 밝히는 형광등보다 더 환했다.
어쩐지 발걸음이 무거웠던 나와는 달리 평소보다 일찍 등교해서 교실은 소란스러웠지만 기분 좋은 웅성거림이었다.
학교 앞 일렬로 늘어선 버스에 당도하여 자리에 앉고 크고 작은 소리로 수다를 떠는 아이들 틈에서 어쩐지 설렘에 공감되면서도 다는 헤아릴 수 없는 어른이 된 것에 차가워지는 머리였다.
예상 시간에 맞춰 도착한 놀이공원은 마침 핼러윈데이였다.
우리 학교 말고 다른 학교 학생들도 속속들이 도착했는지 버스 주차장이 붐볐다.
널찍한 입구에서 사진 한 장 남기고, 미리 약속했던 여러 규칙을 반복해서 말해도 귓가에 닿지 않아 헤어짐을 말하는 목소리엔 뭔가 아쉬움이 많았지만 아이들의 뒷모습은 그보다 가벼울 수 없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는 아이들의 모습은 기분 좋은 열기로 휩싸였다. 그리고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어색한 해방감과 홀로 된 외로움에 순간 발길을 잃었지만 금세 다른 반 선생님들과 만나 같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모두 그 어색한 자유 속에 좋았다가도 서운한 것은 아니었을까
우리 반 피터는 도움반 선생님께서 먼저 맡아주시기로 해서 잠시나마 아무 생각 없이 수다 삼매경에 둥둥 떠다니다 한 시간 후 선생님께 연락드렸다.
선생님께서 피터 손을 내게 건네주셨을 때 차가웠던 내 손에 아이의 열기가 닿았다. 카페 안 조용한 분위기에서 다시 시끌벅적한 놀이공원의 열기에 풍덩 빠졌다.
놀이기구 하나 잘 못 타는 내가 피터가 이끄는 대로 먼저 도착한 곳이 바이킹이었다.
대부분 우리 학교 학생들이었고, 미리 줄 서있던 아이들이 아는 척을 하길래 보니 역시 우리 반 아이들이었다.
순식간에 우리 차례가 되어 바이킹에 올랐는데 피터랑 다행히 마음이 통해 가운데 줄에 앉았다.
두근.
두근.
심장박동이 커지고 바이킹의 회전 각도가 커질수록 머리는 차분해졌다.
머리를 들지 말자.
무서우면 소리를 지르자.
절대 앞을 보지 말자.
눈을 감자.
안전바를 꼭 잡고 있는 녀석의 손과 내 손이 나란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시간이 이윽고 끝나고 정신을 못 차리고 한구석에 찌그러져 들어가 누워 있으려고 하는데 녀석이 다시 손을 이끈다.
-선생님 빙글빙글!
-그래. 선생님도 빙글빙글 이야.
-선생님 한번 더 콜?
-아니 아니. 선생님 못해.
-아니야. 용기!
-피터야 제발 봐줘라. 선생님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와요
-네!
피터는 비틀대면서도 또 바이킹 대기줄로 들어갔다. 옆에 우리 반 아이들이 같이 기다려서 한번 더 탔다.
어지러워서 반쯤은 감은 눈으로 보니 여전히 피터는 고개를 푹 숙이고 안전바를 잡고 있었지만 한번 더 탄 그 용기가 대견했다.
가까스로 일어서서 돌아다니는데 이번에 진짜 빙글빙글 도는 컵 모양의 놀이기구 대기 줄로 가자고 이끈다.
연거푸 타는 것이 아무래도 힘들어 이번에도 보기만 하려는데 안전요원이 다가온다.
-특수 아동은 보호자가 같이 타주셔야 해요.
-아! 그런가요? 그런데 아까 바이킹도 혼자 잘 탔어요.
-안에 있는 잠금장치를 열 수 있어서요. 규정이 그래요.
-아, 알겠습니다.
규정이 그렇다는데 더 댈 수 있는 핑계가 없어 피터 옆자리에 같이 앉았다. 바이킹처럼 높은 데서 오는 공포감은 아니었지만 이번 놀이기구는 쉴 새 없이 빙글빙글 돌았다. 빨랐다가 느렸다가 속도 조절을 하면서 회전하는 놀이기구는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띵하다. 차라리 바이킹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속에서 뭔가 울컥였다.
피터의 열정은 여전히 활활 타오르고 있어서 내 손을 회전목마 앞으로 이끌었다.
이번에 타면 진짜 험한 일 생길 것 같아서 도저히 안 되겠다고 말하고 벤치에 널브러졌다.
식은땀 한줄기
싸늘해진 등허리
축 늘어진 내 모습이 피터 딴에도 걱정이 되었는지 연신 용기! 용기! 를 외치는 녀석이 고맙기도 하고 얄밉기도 해서 빨리 점심시간이 되길 바랐다. 피터는 동글동글 컵 놀이기구를 한 번 더 타고서야 멈추고 점심을 먹으러 갔다.
아이들이랑 약속한 장소에 가니 이미 많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많이 놀고 이제 좀 허기가 지는 모양이었다.
-선생님! 저 바이킹 8번 탔어요.
-선생님 저는 자이로드롭 계속 탔어요.
-선생님 360도 도는 청룡열차 타다가 토할 뻔했어요.
재잘거리는 아이들 곁에 서있기도 힘들었지만 빨갛게 달아오른 아이들 얼굴을 보니, 괜스레 부끄러웠다.
-선생님은 너희들 존경하기로 했다. 바이킹 한 번 타고 지금 거의 쓰러질 판인데 너희는 그걸 몇 번씩 타는구나. 너희들 숙제 안 하고, 수학, 사회 싫어한다고 뭐라고 했었는데 미안하다.
도시락을 순식간에 먹고 또 놀이기구를 타러 가는 아이들에 기가 질려 한쪽에 숨어 있으려고 하는데 피터 눈이 나를 찾았다. 도움반 선생님께서 남은 시간엔 같이 있어 주신다고 하셔서 놀이공원 한적한 벤치에 앉아 있었다. 몇 분 선생님과 만나서 같이 이야기를 하는데, 내가 이렇게 어지러운 이유가 나이가 들어서라는 선생님 말씀이 예사롭지 않았다.
-선생님, 그거 나이 들어서 그래요. 내가 예전에 놀이기구를 그렇게 잘 탔는데 지금은 한 개도 못 타. 애들보다 더 많이 타고 얼마나 많이 타는지 내기하고 그랬는데 다 옛날이야기야.
-그런가요? 하긴 제가 이렇게 못 타진 않았는데, 작년에 디즈니랜드도 갔었단 말이에요. 그땐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정신을 못 차리겠네요.
-집에 갈 때 버스에서 또 한 번 고비가 와요! 어지러울 테니까 멀미약 미리 먹어요.
아이들에겐 그렇게 멀미약 먹으라고 신신당부했으면서 정작 내 것은 안 챙겨 왔다.
선생님의 말씀은 100퍼센트 들어맞아 학교로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1시간 내내 절대 여기서 추한 모습을 보일 수 없다는 정신력 하나로 울렁거림을 버텼다. 학교 도착하고 아이들 보내고 나니 어질어질해서 교실에서 한 시간을 늘어져 있다가 퇴근을 했다.
아무도 없는 오후 교실에 앉아 있을 때를 돌이켜 생각해 보니 그때 엎드린 책상은 차가웠다.
언제 그렇게 떠들었나 싶을 정도로 적막이 흐르는 교실도 달라진 것은 열정적인 아이들이 없을 뿐이었다.
한없이 뜨겁다가도
한없이 가라앉아버린 그날.
내가 지켜야 하는 자리는 이제 뜨거운 열기를 피해 미지근한 한쪽 벤치 같았다.
슬프거나 서운하다기보다 그런 나이와 몸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뿐이다.
현장체험학습의 열기가 빠져나간 이곳 교실, 분명히 추운 아침이었는데 어느새 훈훈한 숨을 내뿜는 아이들이 가득하다. 열정과 냉정 사이. 미지근하고 훈훈한 정도가 내겐 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