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다시 Apr 22. 2022

뭔가 허전했던 그날

엄마 돌아가신지 7년 후

3월 8일 음력으로 2월 6일. 첫째 방과 후 수업 신청으로 조금 정신없이 오전을 보냈다.

아빠에게서 오랜만에 연락이 와서 몸은 좀 괜찮냐고, 아이들 유치원 학교 입학은 잘했냐고, 사전 투표는 했냐고 이런저런 말을 주고받았는데 아빠가 전화한 이유가 있었다. 그저 안부 전화일 테지만  사실 3월 8일 그날은 돌아가신 엄마의 생전 생신이셨다. 돌아가신 첫해에는 엄마가 좋아했던 음식을 차려놓고 동생네 가족과 식사를 하고 성묘도 했다. 그다음 해에는 남편이 작은 케이크를 사 와서 엄마 생신임을 잊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올해에는 뭐가 그렇게 바빠서 엄마 생신을 잊고 있었던걸까?

다음날이 선거였고 그날 유달리 피곤해서 일찍 잠들어서 그랬던 거라고 말하기엔 변명이 길다.


엄마는 좋은 분이셨다.

나에게 깔끔한 성격을 물려 주셨고 눈대중으로라도 음식 하는 법, 집안 정리하는 법, 청소하는 법을 알려주셨다. 엄마는 그렇게 바쁜 일철에도 꼭 냉장고 안을 다 들어내서 청소를 하셨다.

다 큰 딸 운동화, 거창한 패딩, 겉옷, 속옷도 정갈하게 빨아서 개어 주셨다.

아침이면 식사 전에 따뜻한 오미자차, 대추차, 생강차 계절마다 엄마가 직접 담그신 따뜻한 차를 내 방 책상에 두고 가셨다. 나를 매일 자랑스러워하셨고 본인이 하는 일이 힘든 농사일일지언정 소중히 여기고 일할 수 있음을 행복해하셨다. 엄마 손길이 닿는 곳은 늘 깨끗했고 정갈했고 깔끔했다.


많이 아프시기 시작한 이후로 엄마에게 사랑한다고 말은 했지만 주말에는 엄마 곁에 있지 않고 바깥으로 돌아다니며 나만의 시간을 즐겼다. 그 시절 내 사진은 많지만 엄마 목소리 엄마 모습 담긴 영상은 없다. 찾아보면 있기야 하겠지만 굳이 찾지 않고 가끔 휴대폰 사진첩을 뒤지다가 엄마 얼굴이 보이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눈물이 핑 돌게 아프시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있다. 그게 마음을 서늘하게 하고 쿡 찔러 힘들어 사진을 오래 볼 수 없다.


엄마가 돌아가신 2015년 7월 6일. 이제 7년이 다 되어 간다.

엄마가 꿈에 나오는 일은 정말 몇 번 없었다. 처음 꿈에 나왔던 날 다원이를 낳고 몇 달 후쯤이었던 것 같은데 꿈속에서 너무 엄마가 그립고 반갑고 슬퍼서 정말 대성통곡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날 꿈이었겠지만 그 꿈속에서 엄마가 너무 편안해 보여서 울면서도 다행인 마음이 어렴풋이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몇 번... 작은 엄마가 예전에 했던 말 중에서 꿈에 나오지 않는 것은 하늘나라에서 너무 잘 있어서 그렇다고 나를 찾아오지 않을 정도로 재미나게 살고 있어서 그런 거라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다. 그런 작은 엄마께서도 벌써 몇 해 전 갑자기 돌아가셔서 충격이었다.

 

물론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걸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누구도 자신이 죽을 걸 알면서도 오래 살 것처럼 나는 죽지 않을 것처럼 하루하루를 소모하며 순간을 살아간다.

나 역시 오늘 하루가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적당히 편하게 적당히 쓸데없는 일을 하면서 순간순간을 살았다.

그러나 그때... 엄마가 많이 아프시던 그때.

가만히 앉아 계시는 것도 힘들어하셨고 밤새 고통에 힘들어하셨던 그때.

엄마가 좀 더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랐다. 나의 삶을 얼마간 엄마에게 드릴 수 있으면 그렇게 하고 싶다며 엄마에게 가던 차 안에서 수없이 빌었던 적도 있다.

하루하루가 아까웠는데 나는... 엄마 가시는 것도 못 봤다.

월요일 출근해야 한다고 엄마 누워 계신 것 보고 다음 주에 만나... 하고 집을 나섰던 그날의 선택이 너무 안타깝다.

엄마 상태가 그렇게 안 좋았는데 하루 정도 연가를 쓸 수 있었을 텐데 그러면 엄마 가시는 모습은 내가 볼 수 있었을 텐데. 엄마가 혼자 그렇게 쓸쓸하게 떠나지 않았을 텐데. 엄마 옆에서 가지 말라고 끝까지 내 옆에 있으라고 엄마에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나는 그렇게 못하고 엄마가 가신 7년이 지난 지금도 엄마란 말 한마디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리는 엄마를 잃은 30살의 나로 남았다.


엄마가 가실 때 충분히 슬퍼하지 못했다. 뭔가 어리둥절하고 현실감이 없었던 3일간의 장례식이었다.

문상객을 맞이하느라 정신없었고 임신 5개월이었던 몸을 돌봐야 했다. 집안을 정리해야 했고 남아 계신 아버지의 일손을 거들어드렸다. 그리고 일주일 후 학교에 돌아가서 힘겹게 하루하루를 보냈다.  엄마의 부재를 느낄 새도 없이 나는 일상을 보냈고 그 사이 나도 엄마가 되어 버렸다.


아이가 생긴 이후..... 내가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여러 번 느꼈다.

정말 슬프고 힘들 때 남편마저 나의 편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외로울 때 엄마에게 하소연할 수 없이 오롯이 나 혼자 견뎌야 했던 그런 날들이 분명히 많았다. 그런 날들을 혼자 견딜 때 엄마가 그제야 보고 싶었다. 내 곁에 없는 엄마를 부르며 가슴을 치며 울었지만 그것은 충분하고 적절한 애도가 아니었는지 여전히 엄마라는 말에 울컥한다.


엄마는... 언제나 보고 싶다.

나는 우리 딸과 아들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언제나 안아주고 사랑해주는 그런 엄마가 되고 싶다.

우리 엄마 너무 젊은 55살에 우리를 놔두고 그 먼 길을 가셨을 때 얼마나 아프고 외로우셨을까

그런 엄마 생신을 잊어버린 하나뿐인 딸인 나는 얼마나 무심한지.....

엄마는 맑고 고운 목소리로 예쁜 딸, 누굴 닮아 이렇게 예쁠까 괜찮다 해주실 거다.

우리 엄마 목소리가 너무 듣고 싶은 밤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후 처음으로 엄마에 대한 글을 쓴다.

이 글로 하늘에 계신 우리 엄마의 명복을 대신하여 소망한다.)

이전 19화 설렘과 긴장 사이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