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알게 된 너란 존재
2022년 1월 초. 산부인과.
진료실에 들어가서 산전 검사하러 왔다고 하니 의사가 줄줄이 각종 숫자와 영어로 된 차트를 보여주며 각각의 항목이 뭔지 후루룩 읊었다.
“이건 항체 있는지 보는 피검사, 소변 검사, …, 이거는~ 취약 x증후군 검사, 그리고 맨 밑에 이건 초음파. 혹시 여기에서 빼고 싶은 거 있으면 말해요”
의사가 줄줄이 말하는데 취약 X 증후군 검사는 어떤 검사인지 전혀 감이 안 와서 저 검사가 뭐냐고 물어봤더니 두루뭉술하게 설명을 하며 선별 검사니까 만약을 위해 검사해보는 게 좋지 않겠냐고 하길래 일단은 알았다고 했다. 뭔가 내가 그 포인트에서 ‘아니요. 안 할래요.’라고 말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그리고 병원에 오기 전, 임신 전 기본 검사 항목에 대해 검색해봤을 때 초음파는 못 봤던 것 같아서 그건 빼 달라고 했다.
“초음파? 초음파 빼고 싶어요? 왜~? 전에 초음파 본 적 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살면서 어떤 식으로든 한 번도 초음파를 본 적이 없었다. “초음파요? 아니요. 본 적 없어요.”
“난 또 본 적 있는 줄~? 여태까지 초음파 본 적 없으면 꼭 봐야지! 이걸 왜 빼요~ 난 또 이전에 초음파 봤다는 줄”
의사는 친근한 척을 하고 싶은 건지 그냥 습관인 건지 반말과 존댓말을 넘나드는 어투로 내게 핀잔 섞인 말을 내뱉었다.
그 어투와 어조가 묘하게 기분 나쁘긴 했지만 이 참에 정밀 검사 한번 받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초음파도 하겠다고 탈의실에 들어갔다.
병원 탈의실은 쇼핑몰에 있는 여느 탈의실처럼 사람 한 명 딱 들어갈만한 작은 공간이었는데 바닥에 빈 바구니 하나와 무언가 들어있는 바구니 하나가 놓여있었다.
간호사가 그중 여러 개의 천 꾸러미 둘둘 말려 꽂혀있는 바구니를 가리키며 지금 입은 하의를 속옷까지 다 탈의하고 ‘저거’로 갈아입고 오라고 했다.
‘저거’라고 말한 그 천 꾸러미가 대체 뭔지 하나 꺼내서 펼쳐보니, 그 정체는 바로 속치마 같이 생긴 짧은 고무줄 치마였다.
그냥 초음파 하는 건데도 속옷까지 벗고 저런 치마를 입어야 하나?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일단 하라는 대로 옷을 갈아입고 나갔다.
“여기 와서 앉으세요. 살짝 누우실 거예요. 조금 밑에 쪽에 앉으시면 돼요.”
그리고 내 눈앞에 보이는 요상하게 생긴 의자 하나.
말로만 듣고 글로만 읽었던 그 악명 높은 의자다! 일명 ‘굴욕 의자’. 나는 처음 보는 건데도 이게 그 의자인지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던 정말 말 그대로 굴욕적인 비주얼. (궁금하신 분들은 ‘굴욕 의자’라고 직접 검색해보시길…)
‘이건 진료를 위한 의자다. 나는 지금 병원에 와 있다. 진료받기 위해 이 의자에 앉는 거다. 저 사람은 의사, 나는 환자.’라고 마음을 다스리며 앉았다.
의자에 앉아 등받이가 젖혀지던 그 순간, 앞에 앉은 의사가 초음파 기계에서 뭔가를 꺼내 집어 들었는데 어라? 내가 알던 그 초음파 기구가 아닌데…?
TV에서 산부인과에 가면 나오던 초음파 기구는 마트에서 바코드 찍는 것처럼 짧고 크고 둥글었던 것 같은데 저건 기다랗고 둥글다.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치기 시작하려는데 의사가 “조금 불편할 수 있어요~”라고 한다.
그제야 내가 하는 초음파가 복부 초음파가 아니라 질초음파라는 걸 알게 됐고, 갑자기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 초음파를 하는 행위가 나를 부끄럽게 한 게 아니고 서른이 넘도록 그동안 산부인과 한번 안 와보고 검진조차 안 받은 무지하고 무심했던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산부인과에서 하는 초음파는 다 복부 초음파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런 질 초음파가 존재하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이리하여 굴욕적인 자세로 굴욕 의자에 앉아 나 자신에 대한 굴욕적인 생각을 하며 진료는 시작됐다.
“어? 여기 뭐가 있네요.”
초음파 기구를 훅훅 돌려가며 검사를 하던 와중 정적을 깬 의사의 한 마디.
뭐가 있다고? 뭐… 가…? 뭐가 있다는 그 말에 덜컥 겁이 났다. ‘설마… 그냥 물혹이나 뭐 그런 없어졌다 생겼다 하는 그런 거겠지.’
인간은 살면서 몸속에 이런저런 혹이 있었다 없어졌다 하며 산다는 걸 예전에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
클릭. 클릭. 딸깍.
클릭. 클릭.
고요하고 어두운 초음파실에서 의사의 마우스 클릭하는 듯한 소리가 왠지 더 크게 울려 퍼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초음파 화면에 보여주는 그림자 같은 무언가.
그렇게 나는 내 난소에 언젠가부터 기생하고 있던 낭종을 처음 마주했다.
“흠… 모양으로 봐선 악성이나 그런 건 아닌데 지금 이게 크기가 6cm라서…”
“그럼 암은… 아닌 거죠?”
“그런 건 아니고~ 이게 생리혈이 역류해서 생기는 덩어리인데 수술로 제거하면 돼요~”
“아, 네……”
“나가서 자세하게 설명해 줄게요.”
일단 암은 아니라는 말에 한시름 덜었지만 어쨌든 난소에 내가 모르던 혹이 있다니 징에 머리를 세게 박은 것처럼 머릿속이 멍-했다.
초음파 검사 후 진료실.
“정확한 원인은 아직 알려진 바 없는데 생리혈이 역류해서 생긴 혹이에요. 자궁내막증으로 인한 난소 낭종. 크기는 6센티 정도고 보통 복강경 수술로 제거해요. 쉽게 말하자면, 이게 있으면 팔랑팔랑 해야 하는 나팔관이 단단해져서 배란, 수정이 잘 안 돼서 임신 확률이 떨어지거든요. 어차피 임신하려고 하는 거니까 이거 떼고 임신하는 게 좋겠네요.”
남편이랑 앉아 이야기를 듣는데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 의사가 당장 수술하는 게 낫지 않냐고 말하는데 순간 머릿속이 하얘지며 판단이 안 섰다.
“어차피 다른 병원 가봤자 배꼽에 구멍이나 더 뚫지~ 우리 병원에 OOO 선생님이 이 수술 정말 잘하세요. 임신하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럼 빨리 수술하고 얼른 임신하는 게 좋지. 안 그래요? 잠깐만. 보자~ 오늘 자리가 있나~?”
드르륵. 의사가 마우스 스크롤을 움직이며 같은 병원 OOO 의사의 진료 스케줄 확인을 하더니 이내 당황스러운 말을 이어간다.
“오늘 진료 예약 꽉 찼는데… 이왕 온 김에 산전 검사를 수술 전 검사랑 같이 받으면 의료보험도 받을 수 있고 좋잖아요. 내가 여기 환자분 이름 그냥 끼워 넣어줄 테니까 오늘 수술 전 검사까지 다 하고 가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뭐지 이 병원?
나는 지금 막 내 몸속에 혹이 있다는 걸 알게 됐는데 환자에게 생각할 시간도 주지 않고 심지어 오늘 수술 전 검사까지 받으라며 밀어붙이다니.
보통 일반적인 수순대로라면, 수술에 대한 충분한 설명과 상담을 한 다음에 수술 날짜 잡고 그다음 수술 전 검사를 할 것 같은데 말이다.
순간, 지금이 바로 경계 사인을 내걸어야 할 때라는 직감이 들었다.
솔직히 마음 같아서는 “이 수술 좀 더 생각해보고 싶은데요. 수술 전 검사는 나중에 할게요.”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소심한 나란 인간은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일단 열흘 뒤에 당장 캐나다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 이 수술이 그게 가능한지 물어보고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야겠다 싶었다.
“저 다음 주 금요일에 장거리 비행기를 타야 하는데요, 이 수술하면 그때 비행기 탈 수 있어요?”
“(피식 웃으며) 환자분들이 간혹 수술하고 비행기 타면 터지지 않냐면서 걱정하시는데 그런 일은 정말 거의 없어요. 터질 일 없다고 보면 돼요. 걱정 마세요. 호호호”
“아 네… 그럼 혹시 수술하고 입원도 해야 하나요? 며칠 정도 입원하나요?”
“수술하고 보통 개인마다 차이가 있긴 한데 3일 정도 입원해요. 어떤 분은 직장 나가야 한다고 이틀 만에 퇴원하신 분도 있어요. 호호호”
의사가 아까 짧게 설명할 때 너무 간단한 수술인 것처럼 말해서 나는 대장내시경 하는 것처럼 간단한 시술 정도인 줄 알았는데 3일 정도 입원까지 해야 하다니. 내 생각만큼 간단한 수술은 아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의사에 대한 신뢰도가 조금씩 더 떨어지기 시작했다. 뭔가 너무 수술을 서두르는 느낌이고 쉽게 수술을 권하고 말도 좀 막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술 전 검사 이따가 하시고 자세한 수술 상담은 OOO 쌤이랑 하실 거예요. OOO 선생님 오늘 오후 진료 꽉 찼는데 온 김에 검사도 받고 수술 날짜도 빨리 잡으면 좋으니까 내가 환자분 이름 올려놨어요. 일단 지금은 나가서 검사받고 점심 먹고 오후에 다시 오세요~”
얼떨결에 수술 전 검사에 수술 의사 상담까지 받게 된 나는 자기를 따라오라는 간호사를 따라 남편과 함께 대기실로 나왔다.
간호사가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라고 해서 나는 옳다구나 하고 남편한테 대기실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진료실에서 내내 참아왔던 말들을 속사포로 쏟아냈다.
“여보,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저렇게 수술을 서두르고 밀어붙이지? 그래도 수술인데 우리 좀 찾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아까 저 의사 말을 너무 막 하지 않아? 이야기 들어보니까 혹을 제거해야 하긴 할 것 같은데… 설마 없는 혹을 있다고 한 건 아니겠지? 아직 수납도 안 했으니까 얼른 여기 앉아있는 동안 찾아보자.”
그리곤 남편이랑 핸드폰으로 ‘자궁내막증 난소 낭종’에 대해 검색해보았다.
짧은 시간이어서 많은 정보를 얻지는 못했지만, 수술을 하면 난소 나이가 높아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수술 여부에 대해서는 의사와 충분한 상담을 거쳐야 하고, 난소 낭종이 있는 사람들 중 임신을 원하는 많은 사람들이 난임 병원에 간다는 것도 알게 됐다.
아까 그 의사는 무조건 수술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했고, 이 수술을 하고 나서 어떤 부작용이나 후유증이 있는지에 대해 전혀 설명해준 게 없었다.
물론 그 사람이 수술을 집도할 의사가 아니긴 했지만 그래도 나에게 수술 전 검사까지 강요했으니 적어도 수술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했어야 했다.
그런데 이 수술만 하면 마치 모든 것이 깔끔하게 정리되고 해결되는 것처럼 말했다.
“여보. 아무래도 아닌 것 같아. 나 오늘 수술 전 검사도 안 하고 수술 의사도 안 만날래. 집에 가서 오늘 좀 더 찾아봐야겠어.”
내 몸에 구멍을 뚫어서 하는 수술인데 이렇게 쉽게 결정한다는 게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마침 남편도 같은 생각이었다.
대기실에 앉은 지 5분쯤 지났을까.
간호사가 내 이름을 불러 접수대에 갔더니 오늘 산전 검사 항목 중에 유전자 검사하는 게 있어서 동의서를 받아야 한다며 어떤 종이를 주더니 그 밑에 사인을 하라고 했다.
웬 사인…? 유전자 검사? 유전자 검사가 이렇게 쉽게 그냥 막 해도 되는 건가?
아까 의사가 미리 검사해두면 좋은 것처럼 말해서 검사 항목에서 빼지 않긴 했지만 이게 유전자 검사인지는 몰랐기에 “이 검사가 정확히 뭐 검사하는 거예요?”라고 간호사한테 물었다.
“취약 X 증후군 검사인데요, 엄마 쪽에 정신 지체 질환 있는 분 계세요? 없으면 여기에 없다고 체크하시고 밑에 사인하시면 돼요.”
아무래도 이건 꼭 해야 하는 기본 검사는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잠깐만요. 저 남편이랑 상의 좀 하고 올게요.”라고 말하고 남편에게 갔다.
그리고 또 매우 빠르게 폭풍 검색을 했다.
찾아보니 이 검사는 특별 검사에 속하고 보통 모계에 정신 지체 질환 있는 사람이 없으면 꼭 해야 하는 검사는 아니라는 말과 함께 이 검사가 유전자 검사인만큼 의사가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쓰여있었다.
인터넷에서 보니 비용도 10만 원 정도로 꽤 비싼 데다가 내가 꼭 해야 받아야 하는 검사는 아닌 것 같아 이 검사는 안 하기로 남편과 이야기를 하고 다시 접수대에 갔다.
“저 이 검사 안 할게요. 그리고 제가 오늘 오후에 시간이 안 돼서 수술 의사 선생님 볼 시간이 없어서요, 제가 나중에 다시 예약하고 올게요. 수술 전 검사도 다 취소해주세요. 오늘은 임신 전 검사만 받고 갈게요.”
결국 이날 나는 임신 전 검사만 받고 병원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분명 병원에 올 때는 A형 간염 항체는 있는지, 비타민D는 안 부족한지 등 이런 것들만 체크해볼 가벼운 마음으로 왔는데 병원을 나서는 발걸음이 터덜터덜 너무 무거웠다.
내 난소에 혹이 있다니… 그리고 내가 난임이라니. 내가. 왜 내가…? 왜 하필 내가.
너무 이기적이지만 인간이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난임은 나와는 다른 세상의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고 나에겐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고 생각했다.
갑자기 난임 환자로서 헤쳐나가야 할 나의 앞날이, 아니 어쩌면 우리 부부의 앞날이 아까 누워있었던 그 초음파실처럼 차갑고 캄캄해 보였다.
(*다음 글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