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십자가

빛을 위해 어둠을 선택한 천사의 기록

by 영업의신조이

6장.

108 고통- 봄 2 : 과거의 불꽃, 흔들리는 씨앗


린성현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과거가 있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결코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해 온 사람이었다.


그 과거는 어린 시절,

사람 하나 살지 않는 동네 외곽의 폐창고에서 시작되었다. 회색빛 시멘트와 녹슨 철재가 얽힌 그곳은 도시가 외면한 풍경이었고, 아이들에겐 ‘아지트’라 불리는 비밀의 공간이었다. 성현은 그곳에서 조용한 소년이었다. 상황을 빠르게 읽고, 말보다는 행동으로 움직였지만,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 않는 태도는 이미 그때부터 단단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 창고엔 각기 다른 배경의 아이들이 드나들었다. 깁스를 한 아이, 휠체어를 탄 아이도 있었고, 성현이 속한 소그룹에는 두 명의 친구가 있었다. 한 명은 이후 성현과 입찰 경쟁을 하게 될 존재로, 늘 무리의 중심에 서는 말 잘하는 아이였다. 다른 한 명은 성현을 묵묵히 따르던 조용하고 날카로운 시선을 지닌 아이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그 눈빛엔 경계심이 숨어 있었다.


사건은 겨울 저녁,

폐창고의 틈새로 찬바람이 드나들던 날에 일어났다. 성현의 손끝에서 작고 민감한 불꽃 하나가 피어났다. 난로는 평소처럼 작동하지 않았지만, 그날만은 유독 그의 성냥불에 순순히 반응하며 온기를 뿜었다. 그러나 그 불씨는 방치된 시너통에 옮겨 붙었고, 삽시간에 창고 안을 집어삼켰다. 불길이 퍼지는 가운데, 누군가의 절박한 외침이 들렸다. 깁스를 한 아이가 울먹이며 말하고 있었다.


"제발, 도와줘… 제발…"


하지만 성현은 이미 움직일 수 없었다. 몸이 반응하기도 전에 마음이 먼저 무너져 있었다. 그는 도망쳤다.


그날의 일은 어른들의 조용한 수습으로 묻혔다.

사건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았고, 책임은 흐릿해졌다. 그러나 성현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꺼지지 않은 불씨가 남아 있었다. 불은 꺼졌지만, 죄책감은 더 깊고 조용히, 그의 내면 어딘가를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성현은 도시 재개발 프로젝트의 중심에 서 있었다. 수십 개 기업이 뛰어든 경쟁 입찰에서, 그의 회사는 기술력과 신뢰도, 리더십 측면에서 누구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조건은 완벽하게 설계되었고, 그는 이길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프로젝트의 최종 결정권을 쥔 위원들 중 한 사람이, 바로 그날의 불길 속에 있었던 깁스를 한 아이였다. 그는 이제 어른이 되어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위치에 있었고, 성현은 그 사실을 아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더 고통스러웠던 건,

그가 성현을 알아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이름도, 얼굴도, 과거의 흔적도 전혀 기억하지 못한 채였다. 그 무지가 오히려 더 잔인하게 성현을 찔렀다. 잊은 사람과 결코 잊을 수 없는 사람 사이의 불균형. 그 침묵 속에서 성현은 깊이 무너져 내렸다.


입찰 경쟁자 중엔,

화재 당시 함께 있었던 또 다른 친구가 있었다. 그는 그날의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고, 불길이 시작된 순간부터 끝까지를 눈으로 확인한 유일한 목격자였다. 그는 늘 성현의 그림자 속에 있었고, 성적과 평가, 부모의 기대까지 모든 기준이 '성현 다음'이었다. 그 안에 눌려 있던 열등감은 오랜 세월 구겨진 채 가라앉아 있었다.


그는 결국 그 기억을 무기처럼 꺼내 들었다.

입찰 프로젝트를 위한 공개 기자회견 자리, 수많은 언론과 플래시, 생중계 카메라 앞에서 그는 고요한 어조로 마이크를 잡았다.

그리고 말했다.


"과거, 한 아이의 삶을 송두리째 바꾼 화재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을 소개하겠습니다. 그 사람은... 린성현 팀장입니다."


그는 멈추지 않았다.


"화재 현장에서 불길에 휩싸여 고통을 견뎌야 했던 아이는 아직도 그 불꽃의 흔적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 말 한마디.

단 한 문장이면 충분했다.

비열했고, 정확했다.

플래시가 터지고, 기자들의 시선이 바뀌는 순간, 성현은 과거의 불꽃이 다시 살아나는 걸 느꼈다. 아무도 그날의 맥락을 묻지 않았다. 설명도, 사실 확인도 없었다. 이미 진실은 의미를 잃었다. 그는 언론의 표적이 되었고, 회사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으며, 입찰 포기는 시간문제로 전락했다.


그럼에도 성현은 마지막까지 진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그는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 넌 왜 그렇게까지 했니? 우린 그날 같이 있었잖아. 같이 무서워했잖아. 왜 날 이 악몽에 혼자 남기는 거니?”


잠시 침묵이 흘렀고, 곧 이어진 목소리는 서늘했다.


“그래. 나도 무서웠어. 하지만 더는 네 그림자로 살고 싶지 않아. 너와 비교당하고, 지고만 사는 인생이 지긋지긋해. 이건 내 삶이고, 내 전쟁이야.”


전화를 끊은 후,

성현은 창밖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도시의 불빛은 그날의 불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다시 혼자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온 한 줄기 속삭임. 아주 희미했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목소리.


“성현, 불꽃은 이미 피어났고, 그 잿더미 속에서 너의 감정은 무너지기 시작했어.”


루시퍼는 아직 정면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이미 성현의 삶 구석구석에 스며들고 있었다. 이번 고통은 죄책감과 배신, 상실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내면을 잠식하고 있었다.


봄은 아직 초입이었다.

그러나 지옥은, 이제 막 문을 열기 시작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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