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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오유 Mar 03. 2022

냉장고 파먹기가 알려준 비움의 미학

한 달간의 냉장고 파먹기 여정의 기록

복잡한 마음을 해소해보고자 갑자기 시작한 책상과 트레이 청소. 비워내고 정리했더니 산뜻한 기분과 함께 작은 성취감이 나를 둘러쌌다. 이 기분을 놓지 않고 싶어 새로운 청소감을 물색하던 중, 내 눈에 들어온 우리 집 냉장고. 냉장고 안에는 작년 여름 시어머님이 주신 매실 장아찌부터, 초겨울 무렵 주신 얼린 사골국, 얼린 굴비, 코스트코에서 산 대용량 만두와 닭봉 등 각종 농수산물과 가공식품들이 가득했다. 아까워서 버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리는 엄청 차지하고 있고. 자, 얼른 먹어치우는 것밖에 해결책이 없다. 이렇게 한 달 남짓의 우리 집 냉장고 파먹기 여정은 시작되었다.


#1. 부엌에서 떠나는 미식 여행

오래 두고 먹을 수 있고 활용 빈도도 높은 된장이나 고추장과 달리, 어쩌다가 한 번 생각나서 만들어먹으려고 산 각종 소스들. 베트남 쌀국수용 국물 베이스, 마라 소스, 코코넛 밀크, 바비큐 소스, 홀그레인 소스 등등. 전 세계 소스가 냉장고 한 켠을 차지하고 있었다. 우선, 모두 꺼내서 유통기한부터 확인했다. 날짜가 지난 것들은 과감히 버리고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소스들은 시야에 잘 들어오는 앞 쪽에 따로 빼두었다. 이렇게 해두니 요리할 때 더 자주 꺼내 쓰게 되고, 이국적인 맛은 덤으로 따라와서 나만의 레시피가 완성되었다.(물론, 맛도 보장!)


#2. 요리도 방금 나온 게 맛있듯이 재료도 바로 먹어야 맛있다

물론, 한 달 동안 아예 장을 보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 집엔 이 주에 한 번씩 랜덤 채소 박스가 배달되기 때문이다.(나는 어글리어스*를 일 년째 구독 중이다.) 채소 박스에 들어 있는 채소는 말 그대로 랜덤이라 좋아하는 채소가 오면 바로바로 해 먹었지만, 평소에 잘 먹지 않거나 해 먹기 귀찮은 재료가 오면 짧으면 일주일, 길면 이, 삼주씩도 방치되고는 했었다. 하지만 장을 보지 않다 보니 손이 잘 가지 않던 채소들(특히, 당근....)도 바로바로 요리에 활용하게 되었다. 어떻게 더 맛있게 해 먹을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요리 스펙트럼도 더 넓어졌다. 그때그때 해 먹다 보니 신선해서 채소 고유의 아삭 푸릇함도 배가 되었다.

썩히지 않고 어떻게든 요리해보려 한 흔적들


#3. 내 손 안의 냉장고는 식비를 아껴준다

매일 냉장고 파먹기를 하다 보니 어떤 칸에 뭐가 있는지, 어떤 걸 빨리 먹어야 하는지 바로 알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유익이 아닐까 싶다. 마치 냉장고가 통째로 머릿속으로 들어온 것처럼 모든 재료가 머리에 그려졌다. 그러다 보니 장을 볼 필요가 없어졌고 그때그때 필요한 재료 한 두 가지만 사 오면 되었다. 그리고 덕분에 식비는 자연스럽게 감소했다.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의 행복감이 큰 탓에, 2인 가구임에도 평소 식비를 삼, 사십만 원은 족히 썼는데 2월의 우리 집 식비는 고작 칠 만원 남짓이었다. 1월 대비 무려 약 80%가 감소한 액수였다.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로 나름 만족스러운 밥상을 차렸고, 굶거나 먹고 싶은 걸 참은 것도 아닌데 좀 충격적인 수치다.(조금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만큼 냉장고에 많은 재료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아닐까... 기분대로 사들인 과거의 나. 반성한다. 아무튼 이제 냉장고 파먹기가 거의 끝나서 앞으로는 어느 정도 장을 봐야 하니 저 정도의 충격적인 차이는 없겠지만, 앞으로의 식비 지출 습관에 지침서가 될 경험임은 분명하다.

1월과 2월의 식비 갭 차이를 보시라

이 여정 덕분에, 지금 우리 집 냉장고는 아주 깔끔하다. 누군가 내일 당장 냉장고 좀 완전히 비워달라고 해도 아주 쉽게 비워줄 수 있다. 하하하. 한 달 간의 짧은 냉장고 파먹기 프로젝트였지만 여운은 꽤 길게 남을 것 같다. 이렇게 초보 새댁은 오늘도 살림꾼의 길에 한 발짝 다가섰다.



*어글리어스 :  맛과 영양에 문제가 없음에도 못생겨서 버려지는 친환경 채소들을 저렴한 가격에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채소 정기 구독 서비스 (*광고 아님!)

이미지 출처: 어글리어스 홈페이지 (https://uglyus.co.kr/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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