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우리 사이의 오해를 끝내야 할 때
불과 몇 년 전까지 누군가 싫어하는 음식을 묻는다면, 주저 없이 "잔치국수요!"라고 답했다. 소면, 우동면, 칼국수면, 파스타면까지 이 세상 모든 면을 사랑한다 자부하지만, 잔치국수를 싫어하는 이유는 단 하나. 바로 '멸치국물' 때문이었다. 국수는 좋지만, 멸치 향이 강하게 배어든 국물은 으- 정말이지, 싫었다.
도저히 가까워질 수도, 가까워지고 싶지도 않은 멸치와의 인연은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엄마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마도 99%의 확률로 엄마의 멸치 사랑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생각한다. 엄마의 요리엔 언제나 멸치가 함께했다. 된장찌개를 끓일 때도, 김치찌개를 끓일 때도, 나물을 삶을 때도. 그저 조연일 뿐이던 멸치는 엄마의 아낌없는 서포트로 메소드 연기를 펼치며 존재감을 팍팍 드러냈다. 덕분에 찌개 국물을 떠먹다 나도 모르는 새 입속으로 멸치 살점이 딸려 들어올 때가 있다. 훅 들어온 기다랗고 축축한 촉감이 혀에 느껴질 때면 본능적으로 씹던 일을 멈췄다. 그때부터였을까... 나는 엄마가 사용한 소량의 멸치에도 "엄마, 또 멸치 넣었지-!" 하며 거부반응을 일으켰다.
그러던 내가 새댁이 된 후로 상황이 조금 달라졌다. 시집가면 원 없이 할 텐데 뭐하러 벌써부터 살림을 하냐던 엄마는, 요리와 친해질 틈도 없이 새댁이 되어버린 첫째 딸이 내심 걱정되었나 보다. 신혼집에 가는 첫날, 설탕, 소금, 간장, 고추장, 된장 등 온갖 조미료와 양념들을 한 보따리 안겨주었고 그 안에는 1kg짜리 국물용 멸치 팩도 한자리 차지하고 있었다.
그간 머릿속에 저장해둔 레시피가 전혀 없었기에 한동안 퇴근길마다 '만개의 레시피' 앱을 들여다봤다. 언제나 국이나 찌개 요리가 가장 만만했다. 고추장이나 된장, 그리고 두세 가지 재료만 있으면 뚝딱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장 먼저 할 일은 대체로 육수를 내는 일이다. 이마트에 갔다가 우연히 하나씩 간편히 꺼내 쓰는 티백형 육수를 알아버린 후로 제일 먼저 하는 일은 티백 육수를 우리는 일이 되었고, 엄마의 국물용 멸치는 냉동실에서 점점 잊혀갔다. 하지만 자주 꺼내 쓰는 탓에 티백 육수 팩은 금세 바닥을 보이기 일쑤였다. 여러모로 편하긴 해도 가성비가 많이 떨어진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제야 엄마가 챙겨준 육수용 마른 다시마와 멸치가 생각났다. 그렇게 우리 집 싱크대에는 육수 티백 대신, 제 본분을 다한 멸치들이 쌓이고 치워지기를 반복했다.
막상 주부가 되어 요리를 하다 보니 멸치육수를 내고 안 내고는 천지 차이라는 걸 깨달았다. 육수 없이 찌개를 끓이는 건 마치 맹물에 샤부샤부를 해 먹는 것과 같달까. 내가 멸치를 싫어하든 좋아하든, 멸치 육수가 요리에 감칠맛을 더해준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나의 기호와는 상관없이 꼭 그 자리에 있어야만 하는 무언가. '멸치'가 바로 그랬다. 찌개 국물을 후루룩 떠먹다 보니 나를 거쳐 간 수많은 '멸치'들이 떠올랐다. 당장엔 너무 싫지만, 내 삶에 감칠맛을 더하기 위해 꼭 필요한 것들. 이를테면, 이미 아무것도 안 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하기 싫고, 집에 있는데 자꾸만 집에 가고 싶은 그런 날- 러닝화로 갈아 신고 문 밖으로 나가는 일. 혹은 세상에서 제일 자극적인 걸 먹겠다는 결의로 배민 어플을 한참 들여다보다가, 끝내 내 손으로 요리한 집밥을 먹는 일들 말이다. 앞으로 '이걸 왜?'라는 물음표가 떠오를 때면, 그토록 싫어했던 잔치국수를 끓여먹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