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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오유 Sep 23. 2021

잃어버린 기분에도 엄마손은 약손

요즘의 나는 책을 봐도, 드라마를 봐도 아무 기분이 들지 않는, 마치 기분 없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 10일 전에 맞은 백신 때문인 건지, 아니면 그냥 피로한 건지 지속되는 편두통과 함께 어딘가 무기력하고 날 선 마음이 지속됐다. 흠, 이럴 땐 그냥 아무것도 안 하고 쉬는 게 답이다. 때마침 나에게 토요일부터 그다음 수요일까지 총 5일의 추석 연휴가 있다. 우선 주말엔 친정에 가서 나의 소울푸드인 엄마 밥을 먹고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2021년 9월 19일 일요일

#1. PM 7:10 아삭하고 개운한 기분

언제부턴가 친정엄마의 밥상엔 늘 미나리가 올라온다. 미나리는 전이나 무침이 되어 등장하기도 하고, 샤부샤부나 고기를 구워 먹을 때 곁들임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결혼 후 언젠가 내가 미나리전을 맛있게 먹는 걸 본 이후, 엄마의 머릿속엔 '시집간 큰딸 사랑=미나리'가 되었나 보다. 역시나 이번 추석에도 어김없이 미나리가 등장했다.

"미나리전 만들어줄까?"

"아니, 점심때 고기를 많이 먹어서 그런지 전은 별로 안 당기네."

"그럼 새콤하게 무침으로 만들어줄게"


미나리 무침을 맛있게 먹고 있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제 마트에 갔는데, 미나리가 천 이백 원인 거야~"

"정말? 엄청 싸네! 요즘 야채 비싸던데!"

"근데 알고 보니 만 이천 원이었더라고~"

"헉- 그럼 만 이천 원짜리를 산거야?"

"더 찾아보니 옆에 사천 오백 원짜리도 있어서 다행히 그걸 사 왔지!"


'평소 가격 생각하면 사천 오백 원도 비싼 것 같은데... 그냥 오지, 뭐하러 샀어 엄마.'

한마디 거드려 했으나, 엄마의 목소리엔 딸을 위해 오늘도 무사히 미나리를 사수했다는 뿌듯함이 담겨 있어 차마 말하지 못했다. 하려던 말 위에 미나리 무침을 얹어 맛있게 삼켰다. 오늘따라 엄마의 미나리는 더 아삭하고 개운하게 혀끝에 감돌았다.


#2. PM 8:00 간질간질한 기분

"장모님, 큰 따님이 요즘 글도 써요!"

"그래에~? 어떻게~?"

"이것 보세요~ 이날은 하루 조회수가 만회가 넘었어요!"

"멸치야, 내가 잘못했어? 호호호 제목도 재밌네~"


얼마 전 업로드한 멸치 이야기가 다음 메인에 노출되면서 지난 며칠 동안 예상도 못한 조회수를 기록했다. 나는 민망한 마음에 엄마에게 차마 글을 보여줄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내 부끄러움 따위는 아랑곳없이 남편은 내 얘기를 늘어놓았다. 저지할 새도 없이 내 글은 어느새 남편의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 엄마에게 읽히고 있다. 글자가 작아 잘 안 보인다는 엄마의 말에 다른 브라우저를 열어 글자 크기까지 키워서 보여드리는 정성이란...! 나는 왠지 모를 민망함에 딴청을 하며 엄마의 표정을 살짝살짝 살폈다. 엄마는 자신이 등장하는 글이 신기했는지 한참 동안 화면을 들여다봤고, 내 글을 읽고 또 읽는 듯했다. 그런 엄마를 보며 엄마의 이야기를 더 자주 기록해야겠다고 잠시 생각했다. 다음 날 엄마는 네이버 검색창에 "멸치야, 내가 잘못했어" 제목을 검색했고, 그랬더니 내 글이 가장 상단에 뜬다며 아이처럼 좋아하셨다. 그리고 그날따라 "멸치야, 내가 잘못했어" 키워드 유입을 통한 조회수는 유난히 높게 기록됐다. 귀여운 엄마 덕분인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해졌다.


#3. PM 9:30 둥글한 기분

"리온이(우리 집 강아지 이름) 산책도 시켜야 되는데, 나갔다 올까?"

"응, 좋지!"

 명절이라 도심을 빠져나간 사람이 많아서 그런지 공원은 생각보다 더 한산했다. 자주 가는 산책코스 중앙에는 공놀이를 할 수 있도록 원형으로 펼쳐진 잔디밭이 있다. 우리는 공놀이 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는 리온이가 자유롭게 뛰어다닐 수 있게 했다. 엄마는 환갑이 넘은 연세에 리온이를 위해 열심히 잔디밭을 뛰어다녔다. 달빛 아래, 헥헥거리며 잔디밭을 뛰어다니는 엄마와 리온이 모습을 보니 나도 신나게 함께 뛰고 싶어졌다. 하지만, 아직 백신을 맞은 지 이주가 채 되지 않아 참았다. 대신 그 둘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선선한 가을밤 공기와 함께 천천히 거닐었다. 둥근 보름달처럼 내 마음의 모서리도 둥글어졌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고 산책을 하며 어떤 이에겐 시시하리만큼 평범한 하루를 보냈다. 엄마와 함께 보통의 행복을 나누고 나니, 내 기분도 다양해졌다. 엄마 손은 배 아플 때만 약손인 줄 알았더니, 잃어버린 기분을 되찾는 데에도 과연 약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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