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 로브의 '오무아무아'를 읽고 - K의 시선
인간이 지구 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라는 믿음이 있었다. 최상위 포식자, 자연의 조정자, 생태계의 주인이란 의식이 무의식이 될 때쯤 지구는 처참하게 망가졌다. 종말의 도래는 예측 가능하지만 정확한 시작일은 모르기에 인류는 무너져가는 흐름 속에 부표를 잡고 생존을 이어갔다. <0000년 00월 00일 지구의 모습>
우주에서 한낱 먼지 크기의 지구에서도 국가, 인종, 지역으로 사람이 사람을 죽였다. 우연히 태어난 A 민족 A-1은 못 모르고 태어난 B 민족 B-984를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죽였다. A-46은 A-653을 ‘빌거’(빌라사는거지)라며 증오했다. B-187은 B-346이 C 국가 제품을 샀다고 욕지거리를 했다. 수많은 선들이 세상에 그어졌다. 예리한 칼날은 사회를 슥삭슥삭 그어놓았고 그어진 자리에는 선명한 피가 떨어지며 이쪽, 저쪽, 내 세상, 네 세상을 간단하게 나눴다. <0000년 00월 00일 지구의 모습>
동종(同種) 간 살인과 증오가 일상이 되는 과정에서 인간이 아닌 ‘것’들도 타깃이 됐다. 칙칙폭폭 기관이 산업이란 걸 일으키며 배출한 시꺼먼 연기보다 더 많은 종이 지구 상에서 사라져 갔다. 영원을 꿈꾸는 인간이 정작 이름만 남기고 죽을 때, 그가 버린 플라스틱은 영원히 지구를 떠다녔다. <0000년 00월 00일 지구의 모습>
‘오무아무아’의 작가가 이야기했다. 인류가 우주의 새로운 ‘존재’를 인정한다면 겸손과 이해를 배우게 될 것이라고. 이 순간에도 확장하는 우주의 크기로 비쳐보면 지구는 한낮 티끌의 크기에도 미치지도 못하기에, 여기에 우주의 새로운 존재까지 알게 된다면 인류의 지평을 넓이기 위해서라도 겸손을 알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2017년 00월 00일 지구의 모습>
인간이 가장 잘하는 일을 해냈다. ‘이생망’(이번생은망했다)을 뛰어넘어 ‘이지망(이번지구는망했다)’이 기정 사실화됐다. 두려움 가득한 인간은 새로운 행성에서 살 수 있으리라는 꿈을 꾸기 시작했다. 그러나 간혹 파충류로, 때로는 거대한 문어로, 배불뚝이 ET로 그려지는 외계인이 지구 종말을 가속화하거나 인간을 기생충 혹은 정화해야 할 대상으로 삼고 지구에 도착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0000년 00월 00일 지구의 모습>
의심스럽다. 이해가 존재하는가. 이해는 어디에 있는가. 이해는 결국 허상이지 않을까.
토론과 화합의 장, 새로운 아이디어와 지식 교류의 공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던 ‘www'는 타인을 향한 분노, 불특정 다수를 위한 욕설 배설의 공간이 된 지 오래지 않은가, 영화 300의 “짐은 관대하다”는 혜택을 받으려면 복종해야 한다. 목숨을 내놓고 한쪽의 편에 서야 한다. 300명 소수 의견은 30만 대군 앞에 무참히 박살 나야 한다. 타인에 대한 이해도 하지 못하는 인간이 다른 '존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응, 안돼…”
“아직 오지 말아 줘, 외계인. 우린 아직 성숙할 시간이 필요해”
“그렇게 절망적이지 않아. 조금 더 노력하면 돼. 서로를 이해하게 될 거야. 난 꼭 그렇게 믿어. 그때까지 기다려줄래. 오무아무아” <0000년 00월 00일 지구인 A 민족 A-087994의 일기>
추신) J님께 고백.
J님이 이미 써서 올렸다하여 접속하지 않으려 했어요. 독후감을 베끼지 않기 위해 노력하려 했으나 또 우리가 궁금함은 이기지 못하잖아요? 몰래 슬쩍 봐버렸어요.
즐거운 눈호강이었습니다.
하지만 속독은 지난달부터 계속 의심스럽습니다. 평생 의심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