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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Mar 14. 2024

그림을 남기고 집으로 돌아갔다

 식탁 맞은편에 앉아 한나가 뭔가를 그린다. 가끔 눈을 들어 나를 살피는  보고 나도 모르게  손을 들어 '하이~'하며 장난을 쳤다. 제법 공을 들이는 것 같더니 손바닥 크기의 작은 수첩에 그려진 그림을 뜯어 나에게 내민다.

집에 돌아가기 전날 밤 한나가 그려준 나

 입원 5주 만에 병원에서 퇴원. 저녁까지 먹고 한숨 돌리는 차였다.

 작은 수첩에는 병원에서 심심한 시간을 보낼 때 그렸던 그림들이 제법 있다. 제주에서 긴급 도우미로 올라온 제 고모와 있을 때는 블루마블 게임도 하고 심지어 산수 문제도 내라고 했단다. 더하기 빼기까지는 되는데 곱하기 나누기는 안 된다며.

 채점할 때 눈을 반짝이며 점수를 궁금해하는 조카가 얼마나 귀여웠을지. 한나의 고모는 고등학교 과학선생님이다.

 

 한나는 수술  염증 수치가 쉽게 잡히지 않아 예정보다 3  입원해야 했다. 꿈에도 생각하기 싫을 정도의 고생을 하고 돌아왔는 데도 표정이 밝아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내게 한나는 조카 손녀다.  


 겨우 일곱 살인데…. 심장 관련으로 무려 세 번째 개복 수술을 받기 위해 지난 달 입원을 했다.


 누구에게나 삶은 녹록지 않다. 다 그만큼의 삶의 무게를 진다. 누구의 십자가가 더 가볍다고 말할 수는 없다. 멀리서 보면 편하게 사는 듯해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다들 비슷한 무게의 인생살이를 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하지만 한나는 유별나게 삶이 녹록지 않다. 살기 위해 누구보다 더 많은 대가를 전쟁처럼 치르고 있다. 채혈을 위해 팔을 내밀때 한나와 같이 무덤덤한 표정을 짓는 일곱 살이 몇이나 될까? 피멍이 여기저기 든 두 팔을 나에게 보여주며 아직도 아프다는 말을 할 때 짠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조카가 딸 이름을 한나로 지었다고 했을 때 구약 성경 속 선지자 사무엘의 엄마 이름이 한나라고 알려주었었다. 선천적으로 심장 혈관에 이상이 있어 어렵게 태어났지만 분명 대단한 인재로 자랄 거라면서.


 한나는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듬뿍 받아 밝은 햇살처럼 구김 없이 환하다. 자신이 드물게 예쁘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학교에서 자신이 제일 귀엽고 예쁘다며 스스로 거침없이 말할 정도다.

 고통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어린 나이인데도 이번 수술을 받는 한나의 의연한 태도 때문에 모두들 놀랐다.


 수술 당일날.

 지금은 어린이라도 수술실 밖에서 보호자가 대기할 수 없다. 면회를 허락받아 중환자실에 들어가 한나를 만난 조카 내외는 내심 놀란 모양이다. 10시간 수술을 마치고 나와 통증이 심할 텐데도 엄마 아빠를 보며 울지 않았단다. 혼자 견딜 수밖에 없는 외롭고 무서운 시간을 겨우 일곱 살밖에 되지 않은 녀석이 견뎠을 텐데….


 일반 병실로 내려오고 이 주 지나서야 나도 한나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가늘고 여린 몸 여기저기 매달렸던 각종 장치가 어느 정도 떨어져 나가고서다. 직장 때문에 돌아간 조카 내외 대신 아직 학기 시작 전이라 어렵게 제주에서 올라온 고모의 손을 잡고 환하게 웃음 지으며 걸어오는 한나를 보며 나도 모르게 감사 기도가 흘러나왔다.


 하지만 기대만큼 염증 수치는 쉽게 내려가지 않았다. 

눈이 온 날 고모와 삼촌과 함께 눈사람을 만들었다.
아빠의 퇴원 선물을 받고 좋아하는 한나

 수술 부위에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는 의료진의 판단으로 입원 기간이 길어지자 제주에서 제 고모와 삼촌이 올라왔다. 그 2주는 한나가 먹을 만한걸 찾느라 어려움을 겪은 나날이었다. 잘 먹어야 회복도 빠르니 걱정이 말이 아니었다. 특히 삼촌의 수고는 표현하기 힘들 정도였다. 환자식을 네 끼나 먹지 않자 배달 어플을 찾아 보여주며 직접 먹을 걸 고르게 했으니. 

고모와 삼촌까지 나서 헌신적으로 간병한 덕에 한나는 직장에서 휴가를 더 낸 엄마와 함께 학교와 집으로 돌아갔다.

 씩싹하게 걸어서 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시간만 나면 앉아서 무언가를 그리는 한나. 

 퇴원하고 하루 더 우리 집에 묵는 그 사이에도 작은 수첩을 꺼내 그림을 그렸다. 한나가 그린 까미를 보고 우리 가족들은 모두 웃음을 터트렸다. 그림 속 까미 눈동자를 자세히 보면 살짝 겁을 내는 게 엿보여서다.

한나가 퇴원하고 그려준 까미. 눈을 작게 그린 것으로 보아 살짝 무서워하는 것 같다
새로 교체한 화장실에 들어가 뒹굴며 장난을 치는 까미

 

 그 사이 까미는 누구나와도 쉽게 친해지는 온순하고 사람 좋아하는 집냥이로 거듭났다. 현관 문소리만 이상해도 바람같이 사라져 찾기도 힘들던 냥이가 아니었다. 조카 내외만이 아니라 한나의 삼촌이 만져도 가만히 있었다. 사람에 대한 경계를 푸는 수준에서 더 업그레이드 되어 손님에게 저절로 간식을 바치게 만들었다고나 할까?

 

 나와 까미의 그림을 하나씩 남기고 학교와 집으로 돌아간 한나. 고통의 시간을 온전히 견디고 돌아갔으니 이제는 밝고 건강한 매일만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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