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제주를 오간 나는 이번에도 하루 한 군데나 가면서 어슬렁대다 돌아올 생각이었다. 그런데~~~.
사위가 어둑해지는 시간. 제주 공항에 도착했다. 비행기 안에서 바다 위로 슬몃 떠오르는 달구경까지 해서인지 마음이 술렁거렸다.
제주는 여전히 깊고 푸른 밤으로 빛이 나는 느낌!
기침감기로 허덕거린다면서도 조카딸은 공항으로 마중을 나왔다.
서로 마스크를 써서인지 아직 우리에게 코로나 시기가 완전히 물러가지 않은 기분이 다 들었다.
삼양에 도착해 큰오빠에게 도착 전화만 하고 그냥 잠이 들었다. 잠들기 전 간간히 조카딸의 기침 소리가 들려 들고 간 약을 하나 주고서.
다음 날. 제주 고양이 뽀리의 털과 전쟁을 했다. 장묘라 하루에 배출하는 털이 구석구석 장난 아니었다.
조카딸이 살고 있는 삼양의 2층집은 오래전 지은 티가 여기저기다. 시내 외곽이라 군데군데 밭이 있어 밤이면 맹꽁이 소리가 요란하다. 한마디로 어슬렁거리기 좋은 동네다. 청소기만 대충 돌리고 천천히 걸어 삼양해변으로 향했다. 아직 수국은 제철을 만나지 못했지만 한겨울에도 꾸준히 꽃을 피우는 송엽국이 눈을 즐겁게 한다.
삼양바다는 여전했다. 파도가 잔잔해서인지 햇살이 너무 뜨겁지 않아서인지 맨발로 해변을 걷는 사람들이 제법 눈에 뜨였다.
주말 해질 무렵이면 이 해변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예비 신혼부부들이 웨딩촬영을 위해 몰려든다. 심지어 중국어를 쓰는 예비 신혼부부도 있다.
아직 아들 둘의 혼인을 시켜보지 못한 나로서는 보는 것만으로도 부럽다!
맨발로 검은 모래 해변을 찬찬히 걸었다. 먼 곳을 건너왔을 바람을 맞으니 바다를 건너 왔다는 실감이 났다. 맨발을 쓰다듬는 바닷물의 감촉을 즐기며 몇 번 왕복을 하고 해수사우나까지 하고서야 돌아왔다.
그날은 창문 가득 찬 만월을 즐기며 잠이 들었다. 지난 밤보다 조카딸의 기침 소리가 줄어든 덕분일 수도 있지만 제법 피곤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음날부터 갑자기 일정이 빡빡해졌다. 제주에서 둘러볼 명소를 A4용지 한 장에 정리해 지인 부부가 왔기 때문이다. 누가 전직 교사 아니랄까 봐 미리 공부까지 해 빽빽하게 적어 온 것에 속으로만 놀랐다.
짐만 풀고 당장 그날 오후부터 일단 가까운 곳을 가기로 했다.
한라수목원과 삼성혈이 그날 일정이었다. A4용지에 적힌 곳 중에 가까운 곳을 가 보기로 해서였다.
다음 날은 아침부터 서둘렀다. 함덕을 거쳐 세화에서 열리는 오일장을 갔다 비자림을 다녀오려면 시간이 조금 빠듯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는 길에 함덕 서우봉 진지동굴을 둘러보고 세화 오일장으로 향했다. 바닷가 바로 옆에 서는 세화오일장은 분위기가 정말 좋다. 세화의 드넓은 하늘빛 바다는 제주에 갈 때마다 안 가 볼 수 없게 만든다. 장을 돌아다니며 반찬도 사고 시장통에서 열무국수와 군것질로 점심을 해결했다.
문제는 견물생심. 내장을 손질한 황돔 여덟 마리를 떨이 만원으로 가져가라는 소리에 덜컥 사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소금간도 안한 생물이니 할 수 없이 삼양 집으로 돌아와 냉장고에 쟁여 놓고 다시 비자림으로 향했다.
비자림은 여러 번 갔었지만 숲해설을 들은 적은 없다. 하지만 이날은 해설을 듣고 싶었다. 80세라지만 정정하고 유장한 해설을 곁들여 비자림의 천년 숲을 바라보니 숲이 다시 보였다. 인간보다 더 긴 수명을 가진 비자나무에 서린 각종 이야기들을 듣고 나니 더 숲이 친근하게 느껴졌다고나 할까? 입구에 일렬로 심긴 젊은 비자나무들도 최소 백 년이라는 설명을 들으며 우리의 삶이 정말 짧구나 싶었다. 하지만 비자나무 숲이 그렇게 보존될 수 있는 배경 속에 육지 권력자(구충제로 열매가 쓰였단다. 심지어 이 지역 산림을 보호하고 감시하는 사람까지 있었다고 했다)들의 수탈의 대상이라 제 수명을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에 묘한 아이러니를 느꼈다.
비교적 비자림 산책에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아 다시 세화에 들러 우리의 시력 건강을 위한 100% 구좌 당근 주스를 카페공작소에서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은 조카딸집에 돌아다니는 김치를 넣고 나에게 수석교사 대신 장금이로 불리는 김 선생의 황돔을 넣은 김치찜으로 결정!
다음날까지 저녁을 황돔김치찜으로 만원의 행복을 즐기게 되었다. 한 끼에 인당 한 마리씩을 즐겁게 먹어 아직까지 그 여운이 늘어난 몸무게로 남아 있다.
주일 오전 삼양 해수욕장 주변에 있는 교회로 천천히 걸어서 다녀왔다.
예배를 보고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우리에게는 A4용지가 있었다. 비가 온다고 집에 있을 수는 없다며 방주교회와 본태박물관 방면으로 출발했다. 비는 갈수록 거세게 쏟아졌다.
방주교회에 도착. 멋진 건물과 주변 환경이 어우러져 아름다움이 한가득이었다. 비 오는 풍경에 딱 맞는 장소 선정이었다고나 할까?
이어서 인근 본태박물관으로 향했다. 안도 타다오의 역작이라는 박물관의 전경은 물론 아름다웠다. 문제는 엄청난 입장료. 입장료가 무려 3만 원이었다. 몇 번 갔어도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빗물이 박물관 전경에 흘러내리는 모습이 정말 장관이었다. 하지만 그 박물관에는 단점이 있다. 박물관 내부 동선이 너무 불친절하다는 점이다. 결국 3,4,5관을 가는 방법을 안내도를 참고해서도 찾지 못해 입장료를 받는 곳으로 되돌아가 물어봐야 했다는 것이다. 1,2관은 볼만한데 3관부터는 전시물도 내 취향이 아니었다는??? 물론 개인적인 관전평이다!
그날 마지막 일정으로 잡았던 카멜리아 힐은 시간 관계로 포기. 집으로 돌아오는데 애월부터는 비가 뚝 그쳐 어이가 없었다. 제주의 날씨가 갈팡질팡이라더니... 분명 갈 때는 폭우 수준이었는데.
다음 날은 오빠 내외와 일정을 가져야 해 부부를 제주 서쪽으로 안내했다. 이호테우 해안에서 말 등대를 둘러보고 구엄리 돌염전과 한담해안도로를 다녀오시라고 한 것이다. 바다 뷰가 근사한 점심 먹을 곳도 알려드리고 나는 오빠 내외와 남조로 교차로 근처로 갔다. 그곳은 삼양으로 이사 오기 전 조카딸이 살던 곳이라 내가 제주에 가면 커피를 사러 드나들던 낯익은 곳이었다.
미소정에서 한치회 덮밥과 고등어구이를 시겼는데 양이 너무 많아 돼지불백과 고등어는 포장을 해야 했다.
인근 대흘리 메밀밭 축제장에 가서 사진도 찍고 산책도 했다. 가까운 새미동산으로 이동. 시원한 음료를 마시며 여러 동물을 구경하고 거친 오름으로 갔다.
노루 생태공원이 있어 노루도 구경하고 오름 산책을 하려는데 아뿔싸~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저녁은 조천 연북정 주변에 있는 조천수산으로 갔다. 바닷가에서 분위기 있게 먹으려 의자와 깔개까지 챙겨갔지만 바람에 간간이 비가 섞여 그냥 문어와 회만 포장해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 날은 제법 먼 길을 나섰다. 대정으로 향한 것이다. 숙소인 삼양은 제주의 동쪽이라 대정은 대각선으로 거의 반대쪽에 있다. 추사기념관으로 들어가니 마침 해설사분이 해설을 하고 계셨다. 우리 가족에게 추사관은 나름 인연이 있다. 세한도를 일본에서 되찾아 온 손세기 옹은 아버지가 입주 과외를 해 가르쳤던 분이다.(권가네 이야기 2에 그 내용이 있다. https://brunch.co.kr/@d6b5d7e4fe1c4ad/40 아버지의 학창 시절 1)
점심은 산방 밀면에 가서 먹었다. 유명한 맛집이라더니 배가 고프지 않았는데도 한 그릇 다 비울 정도였다.
카멜리아 힐에서 한창 활짝 피어나는 수국을 실컷 보고 산책, 산책만으로도 다가올 여름이 기대될 정도였다.
날씨는 화창! 동행하는 부부가 보지 못한 대흘리 메밀밭으로 갔다. 다음날부터 폐장한다는 메밀 축제의 마지막 정취를 만끽했다. 전날 갔는 데도 장소를 못 찾아 다소 헤매긴 했지만 다시 봐도 정말 좋았다. (내비에 나오지 않아 와흘 메밀마을로 가 축제장 가는 길을 물어봐야 했다.)
저녁은 말고기 맛집으로 가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갈비는 물론 수육도 한우 느낌이었다. 한우도 따로 판매했다. 기왕 제주에 왔는데 말고기를 먹어봐야 한다는 강박? 음식에 대한 편견이나 고정 관념만 없다면 추천한다.
제주에서 어슬렁거리며 빈둥대는 대신 A4용지 빽빽하게 공부해 오신 장소를 열심히 다니게 되었다. 하지만, 제주는 가 볼 곳이 천지다. 테마로 묶어 여러 번 다니는 걸 추천하고 싶다. 가는 곳마다 이국적인 정취와 역사의 숨결 무엇보다 경탄할만한 풍경이 차고 넘치니.
두분 덕분에 바쁘게 제주의 봄을 돌아다닌 일주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