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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아버지의 학창 시절

(1) 학창 시절 1   (2) 학창 시절 2

  (1) 학창 시절 1   

    

 ‘말은 자라면 제주로 보내고 사람은 자라면 서울로 보낸다.’는 말이 있다. 예나 지금이나 서울의 의미는 각별하다. 큰 물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대어로 자라기 위해 꼭 가야 할 장소. 아버지 시대에도 그곳은 서울이었다. 

 가끔 진원 아빠가 회상하는 부모님 이야기가 있다. 40이 넘어 느지막하게 얻은 막내아들을 서울 고등학교로 진학시키신 뒤. 두 분은 인근 울산 호계역에서 새벽 기적 소리가 들릴 때마다 잠을 이루지 못하셨단다. 그 심정이 오죽하셨을까? 울산에서 멀지 않은 부산이라면 형도 있고 친척들도 있으니 그래도 정서적으로 안심이 되셨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 서울은 현재 미국이나 유럽 정도 되는 아득한 거리로 느끼셨던 모양이다. 지금처럼 수시로 화상 통화가 된다면 좀 다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서울에서 살아가야 하는 막내아들을 생각하시면 그 걱정이 얼마나 크셨을지, 또 오매불망 얼마나 기다리셨을지 이해가 간다.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진원 아빠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이유도.

 할머니 할아버지 입장에서도 아버지를 서울로 보내시는 데는 나름 대단한 각오가 필요했을 거라 추측된다. 1945년 무렵이었으니 아무리 화성 촌구석에 살아 정보에 어두웠다 해도 사회의 대단한 변화를 모르지는 않았으리라. 눈 깜작할 새에 코를 베어간다는 서울에 아버지를 보내 놓고 두 분이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 지도 역시 짐작이 간다. 아마 우리 시부모님들처럼 뱅골 근처 야목 역에서 기적 소리만 들려도 아들 생각에 저절로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앉으시지 않으셨을까? 

 다만 왜정 때도 할머니는 서울로 출가한 언니를 보기 위해 동대문을 꽤 드나드셨다. 야목에서 꼬마 기차 수인선을 타고 막내딸이 살고 있는 인천도 자주 다니셨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를 따라 강도 방죽을 걸어 야목 역으로 가 기차를 타고 인천을 다닌 기억이 꽤 여러 번 있다. 그로 미루어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걱정되시면 이것저것 먹거리를 싸서 이고 지고서라도 서울을 충분히 오가셨을 분이다. 

 큰오빠는 아버지의 서울살이 후원자가 꽤 많았을 거라 추측한다. 우선 할머니의 큰언니가 계시다. 우리는 어린 시절 그분을 동대문 밖 할머니라고 불렀다. 아버지의 큰 이모이신 노 할머니는 이종찬 장군 집안으로 출가하셨다. 이종찬 장군은 친일파지만 참 군인으로 알려져 나름 존경받을 만한 행적이 꽤 여럿 있다. 구한말부터 명문 집안이었지만 전주 이 씨인 우리 할머니 집안도 배경이 꿀리지는 않았다. 동대문 밖 할머니의 위세가 그 집안에서 나름 등등하셨다는 평판이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신 뒤 청요리로 홀로 이주하셨다. 청요리 주변 지리를 너무 잘 아셔서 구포리에서 거리가 제법 되는 것 같은데 이 동네를 잘 아시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그러자 젊었을 때까지 상기리 외갓집에 자주 오갔다는 이야기를 하셨다는 이야기는 앞에서도 했다. 아버지 외가인 상기리는 청요리 바로 인근이다.

 해방 후에도 동대문 밖 할머니 댁은 상당히 부유했다. 집안일을 건사하는 하인들이 꽤 여럿 있고 집의 크기도 엄청났다고 한다. 5.16 때 정치적으로 탄압을 받아 각종 집안의 이권을 박정희 정권에 빼앗긴 이후로 몰락했다는 소리가 있었지만 그 이전에는 6.25 전쟁 당시 전쟁 영웅으로 부족함 없는 가산과 위세를 가지고 있었단다. 

 서울로 와서 학비와 생활비를 벌어가며 살아야 했던 우리 아버지는 아마 그 이모할머니의 이런저런 도움을 받았을 거라고 추측된다. 

 나라는 해방 전후의 혼란기였지만 꿈만은 태산만큼 큰 야망을 가졌던 아버지였기에 하루하루가 다소 고달파도 문제없이 견디셨을 것이다. 더구나 아버지는 화성에서도 짜하게 소문이 날만큼 정신력과 체력이 남다른 사람이었다. 노력만 하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젊음과 열정이 있고 그것이 남달랐으니 말해 무엇하겠는가?

 동대문 밖 할머니의 성격은 우리 할머니를 보더라도 보통 까다롭지 않으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이야기를 나마저도 꽤 여러 경로로 들은 기억이 난다. 넉넉한 가산에 하인들도 다수 있어 말만 하면 다 이루어지던 시절이니 오죽하셨을까? 우리 할머니는 작은 것이라도 완벽한 마무리가 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분이셨다. 디테일에 약한 우리 엄마가 할머니 눈에 들기 힘들었을 이유를 나는 지금도 이해한다. 

 할아버지는 무학이셨어도 아량이 넓고 판단력이 빠르셨다. 근동에서 지주 소리를 들으실 만큼 가산을 일구시는 데 필요한 역량과 자질 그리고 무엇보다 경영 능력이 남다르셨다. 그에 비해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좋으시고 용모와 품행이 단정한 편이셨지만 할아버지의 폭넓은 도량에 비해 소견이 부족한 편이셨다는 평이 많았다. 뱅골을 쩌렁쩌렁 울리게 큰 소리가 날 정도로 할아버지가 화를 내시면 대부분 할머니의 소견 좁은 말이나 행동 때문이었다는 소리를 여기저기서 들었기 때문이다.

 내가 딸의 입장이라 엄마와 할머니를 볼 때 엄마 편이었다는 의미만은 아니다. 할머니의 잦은 지적과 꾸지람을 견디기에 갓 시집와 모든 일에 서툰 엄마도 많이 힘들었을 거라는 짐작이 있어서다. 15살에 엄마를 잃고 갑자기 다니던 학교를 그만둔 데다 생판 알지도 못하는 동네로 시집와 겪었던 생활은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엄마는 할머니의 지적질이 거의 폭언 수준이었다고 자주 이야기하셨다. 

 그 시절 남편들이 그랬던 것처럼 아버지는 안타깝게도 엄마의 울타리가 되어주지 못하셨다. 오히려 울타리는 할아버지였다는 엄마의 증언이 있다. 맏며느리에 대한 사랑이 남달리 컸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말한 적이 있다. 할머니의 행동이 분명 지나친데도 아버지는 엄마의 하소연을 쉽게 넘어가 버리셨다고 하셨다. 엄마는 자주 나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일찍 외할머니를 여의고 시부모님에게 사랑받으며 살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인 할머니의 시집살이가 너무 힘들었다고. 다행히 손위 시누였던 막내 고모와 할아버지 덕에 그래도 견딜 수 있었다고. 겨우 스무 살의 엄마가 겪었던 마음고생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기에 어린 마음에도 나는 엄마가 많이 안쓰러웠다. 

 1953년 남북이 정전 협정을 하기 직전 큰오빠가 태어났다. 큰오빠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따라 서울을 자주 오갔다고 했다. 서울에 가면 아버지가 고등학생 때 입주 과외 교사로 살았던 세기네 집에도 인사차 들렀단다. 시골 우리 집도 넓은 집터를 가진 데다 식구들이 스무 명 이상 같이 살아 상당한 규모였다. 그러나 그 집은 크기부터 달랐단다. 그 집에 가서 각종 놀이(?)를 했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니 얼마나 집이 넓었는지 충분히 알 것 같다. 그 집은 광산 재벌이었다. 왜정 때 일본인들은 우리나라에서 광산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물론 전쟁을 위한 자금과 물자 조달이 이유였다. 손세기(2020년 1월 국립중앙박물관에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를 기증한 손창근 씨의 부친이시다) 네 집이 그 일부를 불하받아 부를 일구었다는 풍문은 우리 가족 모두 아버지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아버지의 꼼꼼하고 책임감 있는 성정은 아마 그 집에서도 여지없이 발휘되신 모양이다. 연필을 쥘 수 있는 순간부터 아버지에게 천자문 쓰기 과제를 받아본 우리 남매들은 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할 것이다. 손세기 네에서 아버지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컸으면 아직 고등학생인 아버지에게 직접 이런 제안을 했단다. 서울대 공대를 가라고. 서울 공대를 나와 자신과 광산 등 가족 사업을 같이 하자고. 사업가의 눈으로 봤을 때도 아버지의 정직함과 성실함은 상당히 높이 평가된 모양이었다. 가족 사업의 참여를 권유할 만큼 능력도 성품도 인정하셨으니 말이다. 

 양복점에서 일하다 입주 과외 교사로 들어가는 과정에 누구의 도움이 있었을까? 자세한 것은 잘 모르겠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양복을 맞추러 왔다 아버지가 하도 성실한 데다 틈만 나면 책을 들여다보고 공부하는 것을 본 손세기 네 아버지가 아들의 과외 교사 자리를 제안하셨다고. 나는 그 이상의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다만 손세기 네 집으로 들어간 뒤 아버지는 마음껏 공부할 수 있는 여건과 가끔 화성으로 돌아와 할아버지의 농사일을 거드는 일이 가능했을 거라 짐작할 뿐이다. 

 아버지의 청소년 시절 조선의 젊은이들은 태평양 전쟁의 와중에 전쟁터로 징용으로 이리저리 끌려 다녔다. 그러다 갑자기 해방이 찾아왔다. 문제는 우리나라의 해방이 사람들 모두에게 공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가져다준 것은 아니었다는 점이다. 사실 심각한 상태였다. 좌우로 이념이 갈린 사람들은 어수선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의지가 굳은 아버지는 한양공업고등학교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본인이 원하는 대학 어디라도 들어갈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다. 

 아버지 본인의 주장이라 해도 그 말이 믿어지는 이유가 있다. 주변 어른들의 증언이 꽤 있어서다. 특히 아버지의 막내 누이인 인천 고모가 그 중심에 있다. 막내 고모는 20대에 남편을 불의의 사고로 잃고 뱅골로 돌아와 친정 식구들과 살고 계셨다. 당연히 아버지의 여러 행적에 대해 자세히 알고 계셨기에 우리에게도 나름 유용한 이야기를 자주 해 주셨다. 

 하긴 나도 임용시험 준비를 하며 아버지 비슷한 큰 소리를 자주 쳤다. 임용고시에 단 한 명만 뽑아도 자신 있다고. 그런 말을 해 본 적이 있으니 아버지의 이 주장에 반론하기는 좀 그렇다. 자기 자랑이 집안 내력이라고 해도 할 말이 없고. 그만큼 아버지는 당신의 인생을 스스로 조절하고 어떤 어려움이 와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고 계셨다. 속된 말로 뻥이나 치는 게 아니셨다. 이 정도의 노력이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분명히 있으셨다.

 하지만, 우리 민족 최대의 비극인 6.25 전쟁이 펼쳐지는 마당에서 신은 우리 아버지에게 결코 호의를 베풀지 않았다. 아버지에게 결코 긍정적인 포지션을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아니 운명을 관장하는 신은 이후 우리 아버지의 삶에 너무 야박하셨다. 노력을 무력화시키고 끊임없이 좌절하게 만들었다.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건 신의 뜻에 반하는 일을 한 적이 없는 데도 있는 것조차 빼앗기는 삶을 살게 하셨다는 거다. 평소에 지극히 공정하고 누구보다 사랑이 많은 신들이 전쟁 준비로 너무 바쁜 탓이었나? 아버지는 졸지에 닥친 비극 앞에서 당시 대부분의 우리나라 사람들처럼 우왕좌왕하셨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본인에게 다가올 그 비극이 일어날 조짐조차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셨다는 게 맞을 것이다. 이 말이 더 합리적이지 않을까?  


                                      

(2) 학창 시절 2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갑자기 닥친 변수로 인해 휘청거릴 때가 있다. 때로 그 변수는 삶의 밑바닥까지 휘저어 놓는다. 남은 생을 부표가 없이 떠돌게 만들기도 한다. 비슷한 어려움을 겪었어도 사람마다 그 변수의 작용은 전혀 다르게 적용된다. 그게 인생일까? 아니면 운명일까? 더구나 전쟁이 변수라면 파장의 범위는 무한대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인생 내 맘대로라면 얼마나 바람직한가? 실패도 내 능력이나 노력이 부족해서라면 납득이라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 뜻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는 경우도 우리 주위에서 부지기수로 일어난다. 신화나 전설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그런 상황은 인간을 무력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거미줄에 걸린 나비의 발버둥을 자연의 이치라고 즐겨 설명한다. 하지만 같은 경우를 인간에 빗대게 되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아버지에게 그 시간은 어린 나이에 지나치게 빨리 찾아왔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버지의 삶을 뒤틀리게 만들 결정적 변수가 된다. 그건 아버지의 강한 염원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외세에 끊임없이 흔들렸던 우리 민족 전체의 문제였다. 더구나 그것은 아버지라는 개인의 삶을 쥐락펴락하는 치명적 변수였다. 

 아버지는 우리들이 모두 인정하는 대로 집념이 강한 분이었다. 출세를 해서 자신을 믿어준 할아버지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마음이 넘칠 정도였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이상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건이 아버지 주변에서 운명적으로 서서히 다가왔다는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이런 구절을 본 기억이 난다. 항일 운동을 하면서 가장 경계해야 할 일에 대해서였다. ‘우리 민족의 해방은 우리 민족의 힘으로 이루어내야 한다.’, 사실이다. 외부의 힘에 의해 얻어진 해방은 오늘날까지 우리 민족에게 대가를 요구하고 있다. 해방 직후는 더욱 심했다. 당시 능력과 자신감이 있는 아버지 같은 젊은이들의 삶을 곧장 파고들었다. 그분들의 길을 막고 대가를 요구했다.  

 해방 이후의 혼란 속에서도 가족과 자신의 앞날을 위해 노력해 오던 청년 시절의 우리 아버지에게도 이 상황은 엄중하게 닥쳐왔다. 먼저 변수의 전조는 개인적인 곳에서 찾아왔다. 아버지는 한양공고를 다니면서 불철주야 우리나라에서 가장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노력하셨다. 당시 전국의 수재들도 합격을 장담하기 어려운 대학은 공대였다. 

 왜정 때 일본인들은 조선인들의 공대 입학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가로막았다. 조선인들이 그들의 앞선 기술을 훔쳐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해방 후에 수력발전소를 운영할 기술자가 없어 한 동안 암흑 천지에 살 정도였다. 천재 시인 이상(본명 김해경) 같은 사람들이나 입학하는 곳이었다. 해방이 되어서도 공대 입학은 여전히 어려웠다. 최세기네 집에서 입주 과외를 하며 아버지는 공대에 입학하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아버지는 법대나 공대 어디를 택해도 자신 있을 정도의 실력을 기르셨었노라고 우리 앞에서 입버릇처럼 이야기하셨다. 그건 아버지 혼자의 착각만은 아니셨을 거라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학 진학의 방향을 틀어야 했다. 할아버지에게 심각한 건강 이상이 생기셨기 때문이다. 왜정 때 우리나라에서 알만한 시인이나 소설가가 단명했다면 병명은 대개 결핵이었다. 그 결핵이 할아버지에게도 찾아왔다. 각혈을 하실 정도로 병이 깊어지셨다. 엄마는 시집오신 지 얼마 안 되어 할아버지가 대야에 각혈을 하실 정도로 병이 깊으신 걸 봤다고 하셨다. 당시만 해도 치료약이 마땅치 않았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녀야 하는 공대나 법대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화성 뱅골에서 통학이 가능한 농대로 진학하셨다. 대신 농대에서 제일 좋은 농업경제학과였다. 그건 아버지가 맏아들로서 농사일을 돌보며 대학을 가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지였다. 

 우리 어린 시절, 수원에 있는 서울 농대 교정으로 가족 소풍을 간 적이 여러 번 있다. 희미하지만 동네에 없는 넓은 잔디밭에서 뛰어놀던 기억이 난다. 뱅골에 살던 무렵 아버지는 우리를 데리고 이런 가족 나들이를 가끔 하셨다. 겨울이면 저수지로 우리를 몰고 나가 스케이트를 가르쳐 주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지금은 육군 51사단 본부가 있고 그 저수지 가운데로 KTX가 지나가 과거의 풍경은 거의 잃어버렸다. 하지만 서울 살이를 정리하고 화성으로 낙향하신 다음에도 강도 방죽이나 그 저수지에 손주들까지 데리고 가 스케이트를 타던 기억이 있으니 가정에 나름 충실하셨던 것은 분명하다.

 서울 농대 농경제학과에 진학하신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병구완 틈틈이 농사일을 하시면서도 공부에도 열심이셨다. 그 이야기는 인천 고모에게 자주 들었다. 할아버지가 중학교(당시 5년제)에 가라고 허락해 주신 이전부터 올곧게 노력해 온 공부 습관은 방향을 바꾸었다고 해서 쉽게 좌절되거나 포기되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공부에 올인하셨다는 건 아버지 주위에 있는 분들이 모두 증언할 정도다. 우리를 모두 키워 독립시켜 놓고 화성으로 낙향하신 다음에도 시간 날 때마다 영어 단어와 한자를 공책에 써가며 암기하시던 분이셨으니 말해 무엇하랴.

 그러나 이번에는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다른 문제가 터졌다. 아버지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6.25 전쟁이 들이닥친 것이다. 아마 정보가 조금 더 많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다면 피신이나 다른 방법을 찾으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시 대학 입학은 4월이었다. 갓 대학에 입학해 겨우 두 달 학교를 다닌 스물두 살의 청년에게 던져진 역사의 소용돌이는 그걸 버텨내고 뛰어넘을 수 없는 큰 상처를 주었다. 무엇보다 전쟁은 평생 되돌릴 수 없는 낙인을 만들어 아버지의 삶을 옥죄는 올가미가 되었다.

 전쟁은 빠른 속도로 순식간에 세상을 바꿔버렸다. 뭐 어떻게 해 볼 틈도 없을 정도였다. 이십 대 젊은이들에게 전쟁은 더 가혹했다. 당시 군에 입대한 아들이 있는 집은 국군으로, 세상이 뒤집혀 의용군으로 끌려간 아들은 인민군으로. 뱅골에도 그런 집들이 하나 둘이 아니었다. 

 우리 집 바로 위에 살던 할머니도 큰아들은 국군으로 나가 전사하고 작은 아들은 의용군에 끌려가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국군으로 전사한 큰아들의 연금을 받아 근근이 생활한다는 소리를 들었으니 비극은 사람들의 삶을 빈틈없이 파고들었음이 분명하다. 당시 10대 청소년부터 장성한 청년들은 어떤 경우에도 피할 수 없는 역사 앞의 숙명이었다. 군인이 되기에 조금 나이가 있는 어른들은 각종 부역에 끌려 나갔다. 아버지 역시 전쟁은 빠져나올 수 없는 덧이었다.

 더 심각한 일은 할아버지가 화성 근방에서는 나름 지주였다는 점이다. 지주들은 갑자기 존경받는 동네 어른에서 노동자 농민을 수탈하는 지배계급이 되어 타도 대상이 되었다. 우리가 듣기에 갑자기 들이닥친 인민군들은 가가호호 다니며 각종 전쟁 물자를 강탈했다. 당연히 뱅골 집에도 그들이 들이닥쳤다. 그땐 지금 같은 농기구가 없던 시절이다. 각 가정에서 가장 값나가는 것은 소였다. 총칼을 들이대고 막무가내로 소를 끌어가려는 인민군들에 맞서 누가 부당함을 주장했을까? 우리 집에서는 당연히 우리 할아버지셨다. 할아버지는 꼬장꼬장한 성품으로 뱅골에서도 유명하셨다. 젊은 시절 내 노라 하는 부자였던 친척이 주시겠다는 전답도 단칼에 거절해서 평생 할머니의 핀잔을 받으시던 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엄마는 우리에게 당시 할아버지가 언제 끌려 나가 처형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에 처한 상태였었다고 이야기하셨다. 

 아버지는 생전에 나에게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하셨다. 인민군이 화성에 들이닥치자마자 곧 인근의 젊은이들을 비봉 초등학교 운동장으로 소집했다. 중·고등학생부터 대학생까지 청년들 대상이었다. 그곳에 모인 학생들에게 인민군이 청년위원장 감을 추천하라고 하자 학생들이 손가락으로 모두 아버지를 지목했단다. 아버지는 야목 역에서 수인선을 타고 수원으로 통학을 하셨다. 당시 아버지가 입으셨던 교복은 왜정 때 드라마 <이수일과 심순애>에서 이수일이 입었던 대학생 복장을 연상하면 된다. 서울대 교표를 단 모자와 망토를 단 교복을 입은 아버지를 야목 역에서 수원으로 통학하는 근동 누구도 부러워하지 않은 학생들이 없었다. 아버지 말이 아니더라도 내 생각에도 그랬을 것 같다. 이후에 아버지의 삶을 지나치게 억압한 사람들의 마음속을 들여다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게 있다. 그 속에 담긴 질투심을 말이다. 그건 단지 내가 자식이기에 느끼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6.25는 사실 대다수 우리 국민들에게 부지불식간에 들이닥친 엄청난 대재앙이었다. 전쟁 중에 자신의 멘털을 온전히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당시 우리 집안에는 아버지와 비견할 만한 똑똑한 인재가 몇 분 더 계셨다고 한다. 바로 아버지의 사촌들이었다. 체경 할아버지의 10대 손들에서도 인재가 우리 아버지뿐 만은 아니었다. 전쟁만 아니었으면 다양한 방면에서 나라에 기여할 사람들이 있었다는 의미다. 

 우리 할아버지는 아들을 아주 늦게 얻으셨다. 앞에서 말한 대로 연화동에서 뱅골 집터로 이사하고서야 대를 이을 아들을 얻으신 것이다. 그 사이 할아버지의 동생에게 먼저 아들이 태어났다. 그분은 덕수상고를 졸업한 드문 재원이었다. 덕수상고도 전국의 수재 중의 수재만 입학할 수 있는 학교였다. 6.25 이후 경제부흥기에 덕수상고 출신들의 약진을 보면 이해가 될 것이다. 

 얼마 전 오 남매가 모인 자리에서 아버지가 왜 부역을 선택하셨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막내는 당시 서울 농대가 공산주의 사상이 많이 퍼져 있어서 아버지도 그런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했다. 특히 전 신민당 총재였던 이철승 국회의원의 책에서 읽은 내용을 이야기하며 수원과 화성 등지에서 좌파 활동을 하던 이들이 많았기에 아버지도 그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큰오빠는 전혀 다른 주장을 했다. 아버지의 사촌 형이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을 거라고 말이다. 특히 창안이 오빠의 아버지셨던 그분은 대중 연설에 능하셨다고 했다. 창안이 형도 달변인데 아마 아버지를 닮은 게 아닌가 싶다며. 더구나 아버지가 농대에 입학한 지 두 달 만에 6.25가 일어났는데 학교에서 사상교육을 따로 받았을 리 없다는 말이었다. 

 화성은 바다에 인접해 있어 지리적으로 새로운 사상을 일찍 받아들일 조건이었기에 신문물로 공산주의 사상도 활성화되었을 거라고 했다. 다만 아버지는 공산주의식의 방법이 옳은 건 아니었다는 걸 일찍 깨달으신 것 같다는 말도 부연했다. 본인이 당한 왜정 때의 불평등이나 차별이 옳지 않으니 그건 고쳐야 한다는 생각 정도였지 사상을 강요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제와 폭압을 행하는 일에 대해서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도 없으셨을 거라고 말이다.  

 사실 아버지의 공산 치하 1년도 안 되는 시간은 엄마나 고모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남들이 말하는 부역을 저지른 게 별로 없다. 당연히 이후의 삶을 저당 잡힐 만한 행동을 하신 게 없다는 뜻이다. 큰오빠가 어른들에게 들었던 말에 의하면 청년위원장이 해야 할 일은 의용군 차출이었다. 학벌만 좋았지 이 일에 아버지는 전혀 적임자가 아니었다. 아버지도 당시 상황을 회고하시면서 직접 그런 말씀을 하셨다. 

 ‘다 아는 이웃 간에 누구를 차출해 전쟁터에 보내느냐?’ 

 그런 의문을 가지고 계셨으니 일이 잘 될 리 없었다. 더구나 할아버지는 정직이 삶의 모토였던 분이셨다. 그분의 맏아들이 뻔뻔한 거짓말과 회유로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 댈 것이 뻔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는가? 

 그 일에 성과가 없자 이번에는 전쟁물자 공출 임무가 주어졌단다. 엄마는 그 일에 할아버지가 어떻게 대처했는지 내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셨다. 낮에는 총을 든 인민군들이 아버지를 앞세워 민가에 다니며 강제로 공출을 했다. 아버지는 인민군들이 반항하는 민간인들에게 총을 쏘거나 폭행하는 일이 없도록 양쪽을 조율하셨다. 밤에는 우리 할아버지의 시간이었다. 낮에 강제로 공출당한 집을 아들을 앞세워 찾아다니신 것이다. 그리고 낮에 빼앗은 식량이나 물건을 변상하셨다. 우리 할아버지에게도 총을 들이대던 사람들이니 인민군들이 민간인들을 어떻게 대했을지 우리는 어린 시절부터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한다. 인민군들은 서둘러 북한 땅으로 퇴각했다. 그리고 우리 아버지에게도 북으로의 소개령이 떨어졌다. 태백산맥을 타고 북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아버지 말은 사촌 동생과 여주 근처까지는 가셨다고 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생각해서 무슨 일을 겪더라도 돌아가야겠다고 마음을 바꾸셨단다. 

 한편으로 아버지는 이미 인민군들의 행태에 실망할 대로 실망한 데다 나름 자신도 억울한 희생자라는 생각을 하신 듯하다. 결국 아버지는 소개 명령을 거부하셨다. 

 아버지는 가끔 그 북한군이 물러난 다음 이야기를 하셨다. 특히 야목 근처에 있는 창고에 끌려가 부역자라며 당한 무자비한 폭행에 대해 꽤 여러 번 자세히. 그 폭행은 아버지에게는 죽을 정도였지만 가해를 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냥 화풀이였다. 워낙 체력이 강건한 덕에 살아난 아버지는 그들에 의해 곧바로 경찰에 넘겨졌다. 전쟁 통에 억울한 죽음은 여기저기 넘쳐 났을 것이다. 수순대로 수원경찰서에 끌려간 아버지는 곧 수원 교도소에 수감되셨다. 적어도 재판을 받을 수는 있었던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 누가 아버지를 구했을까? 큰오빠는 먼저 백이 남달랐다고 증언한다. 아버지를 살려 주신 분은 아버지가 큰어머니(당숙모님)라고 불렀던 분의 사촌오빠였다. 그분은 당시 수원법원 부장판사로 재직 중이셨다. 우리가 뱅골에 살 때는 그분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동생을 살리기 위한 막내 고모의 구명운동 또한 지극정성이셨다. 수시로 수원의 판사 집을 큰어머니를 대동하고 찾아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다. 

 큰어머니는 우리 할아버지의 정직한 성품을 늘 칭찬해 오신 분이셨다. 그 집안에서 주겠다던 땅도 거절할 만큼 정직한 사람이라고 믿으신 것이다. 공출로 빼앗았던 식량 등을 밤마다 돌려주러 아버지를 앞세워 다닌 사연도 사촌 오빠에게 빠짐없이 증언하셨다. 총으로 위협당해 어쩔 수 없이 한 부역이었음을 강조하신 것이다. 그 덕에 아버지는 면제형으로 풀려 나오셨다. 

 그건 아버지에게 천운이었다. 얼마 후 1.4 후퇴 때 비슷한 혐의로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던 사람들은 거의 살아남지 못했다. 10년 형을 받고 복역하던 사람들은 북한군이 다시 돌아왔을 때 변절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해 재판 없이 대거 총살되었다. 덕수 상고를 나온 아버지의 사촌 형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 폭행을 심하게 당해 시름시름 아픈 상태였는데 치료를 해 주지 않고 방치하여 차가운 시신으로 가족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장례까지 치른 사촌 형으로 인해 두고두고 아버지를 걸고 넘어가는 사람들이 수시로 있었다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촌 형이 월북해서 고위직에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기 때문이다. 나도 어렸을 때 그 이야기를 어렴풋이 들은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풀려나 대학까지 마치는 것을 질투한 사람들 탓이었다. 그들은 아버지를 고정간첩이라며 툭하면 신고했다. 갑자기 들이닥친 형사들에게 끌려가 고초를 치르는 일도 여러 번 반복되었다. 아버지를 돕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버지를 질투한 사람들도 만만치 않게 존재했음을 우리는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듣고 자랐다.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로 호된 시간을 보낸 아버지는 그때부터 더 고시에 대한 집착이 강해지신 듯하다.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이 권력이라고 생각하신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실력과 노력으로 되지 않는 일도 있다. 아버지는 어떤 경우로도 공직에 들어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신 것이다. 그러나 본인은 부역자라는 낙인 때문에 세상의 벽을 돌파할 수 없었지만 자녀들만은 가능하다고 생각하셨다. 그래서 자녀들에게까지 입버릇처럼 판검사가 되라고 읊어대신 게 아닐까?

 아버지는 자신이 겪은 억울함을 남들은 겪지 않도록 자식들이 돕는 사람이 되기를 강하게 바라신 것 같다. 내 생각이지만. 그러나 그건 자녀 대까지 연좌제의 시퍼런 서슬이 있음을 모르셔서 가졌던 어림없는 희망이었다. 헛된 희망이 자손들과의 관계에도 금이 가게 만드셨음을 언제 서야 깨달으셨을까? 

 목숨은 건졌지만 안타깝게도 평생 부역의 낙인을 벗어나지 못하신 우리 아버지. 성품은 공무원으로 사셨으면 딱 적당한 분이시다. 아버지의 순진함은 세상의 변화를 읽지 못한 탓이었음을 지금 우리는 안다. 그래서 아버지의 삶이 더 안타까운 게 아닐까? 

 아버지는 정권이 몇 번이나 바뀌어도 오래 그 낙인을 벗지 못하셨다. 무엇보다 겨우 입구에 들어섰던 학창 시절이 앞으로 다가올 지난한 세월의 시작이었다는 것을 결코 알지 못하셨다. 

     

안동 권 씨 종친회 유사로 대종회에 참석하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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