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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대학교를 졸업한 뒤 뱅골에서의 아버지의 발자취

  막내 고모가 공덕동으로 이사를 결심하신 데는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 광택이 오빠의 진학 문제였을 거라고 생각한다. 당시에도 서울의 집값은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막내 고모는 뱅골 살림 일부를 정리해 서울로 이사하셨다. 예나 지금이나 가진 재산으로만 먹고살기는 힘들다. 더구나 아이들 교육비 문제는 더 심각하다. 막내 고모는 내 기억에 화성 인근을 다니며 목화솜 등을 매입해 되파는 방법으로 생활비 일부를 충당하셨다. 뱅골 주변 땅에서 나오는 식량으로 부족한 생활비를 그런 방식으로 채우신 듯하다. 서울 공덕동에 아버지가 약국을 차린 이유도 막내 고모 주변이 익숙한 탓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러나 그 약국은 결국 손해를 보고 정리해야 했다. 

 아버지는 민선 면장에 출마도 하셨다. 희미하지만 나는 그 시절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있다. 우리 동네서 안 뱅골로 내려가는 언덕이 있었다. 그 주변에는 제법 오래된 복숭아 과수원이 있다. 봄이면 과수원 근처 아카시아 군락지에서 꽃향기가 사방으로 퍼졌다. 우리는 봄이면 곧잘 그곳에 아카시아 꽃을 꺾으러 갔다. 그 주변 커다란 오동나무 아래는 제법 넓은 공터였다. 거기서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을 모아 연설하시던 모습이다. 큰오빠는 당시 지프차를 탄 기억밖에 없다고 했다. 

 당시는 지금처럼 지방의회나 행정이 모두 직선제였다. 4.19 나던 해부터 민주주의가 일시적으로 회복되던 시기였다. 군부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모든 행정직을 임명제로 바꾸었다. 정치 형태도 누가 정권을 잡느냐에 따라 때로는 역작용을 한다. 그걸 되돌리는데 3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으니 하는 말이다. 아직 해방이 된 지 얼마 안 된 때라 민선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금권 선거가 판을 쳤다. 그런 면에 약한 아버지는 그 선거에서 탈락하셨다. 그게 아버지가 정치판에 들어가 보려고 했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돈을 뿌린 상대에게 넘어간 사람 중에 가까운 친척들도 있었다니 말해 무엇하랴.

 청요리 창고 주변에 <산들래>라는 규모가 제법 큰 체험장이 있다. 아버지가 청요리로 이사하신 뒤 그 주인아저씨가 아버지를 알아보셨다. 면장 선거에 나섰던 아버지를 기억하셨던 것이다. <산들래> 아저씨는 당시 중학생이셨는데 아버지의 학벌이 너무 좋아 인상이 강하게 남아 계셨단다. 명절 때가 되면 음식까지 가져와 대접하시며 반가워하셨다. 하지만 아버지는 이미 오래 살았던 고향의 터전까지 잃고 엄마를 먼저 보내신 뒤라 늙고 무기력해지신 상태였다. 막내는 그 아저씨와 대화를 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너무 애처롭게 느껴지더라는 말을 했다. 아마 그분과 자신의 처지가 너무 다르다는 자괴감이 들었던 게 아닐까 싶었다. 

 아버지에 대한 막내의 다음과 같은 평가는 상당히 객관적이면서도 직관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 아버지가 월북을 하려 했을까? 아버지는 당신이 월북을 하려다 할아버지 때문에 다시 되돌아왔다고 했어. 결국 지인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어 수원교도소에 수감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고 십여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끝없이 되뇌셨지. 손주들을 다 모아 놓고. 결론은 판검사가 우리 집안에서 나와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아버지의 이런 토로를 들을 때마다 오늘도 그 소리를 한다고 푸념하기 일쑤였는데. 언제부턴가 아버지의 이런 열변이 사라졌지. 이제 연세가 들어 포기하셨나 싶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어. 

 하지만 최근 들어 아버지의 젊은 시절 열정을 다시 이해하게 됐어. 특히 <산들래> 아저씨가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기억해 내고 아버지도 담담히 그 시절 기억에 동조하시는 것을 보면서. 아버지의 토로 이면에 존재했던 가치와 회한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었어. 4.19 이후 면장 선거에 나서 열변을 토하는 젊은 인텔리로 기억하는 <산들래> 아저씨는 아직은 소수파였지만 아버지 주장에 공감한 적극 동조자였다고 하더라고. 이후에도 명절 때 음식을 가져다주기도 하시고. 하지만 아버지는 그 당시 기억을 또렷이 소환해 내면서도 무척 어색해하시더라고. 이제 인생의 마지막을 앞두고 산들래 아저씨와 비교해 초라해진 당신의 모습에 약간은 위축된 듯이….

 이후 나는 아버지가 명절 때마다 자식과 손주들에게 반복해서 주입하려 했던 말씀들이 단순히 판검사가 되어 당신의 회한을 풀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아마도 아버지는 타의로 면 청년위원장이 된 것이 아니라 자의로 또는 드러나지 않는 그룹의 의사결정에 의해 청년위원장이 된 것이고…. 그로 인해 월북하려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됐어.

 이런 믿음은 아버지로부터도 그렇고 그 누구로부터도 확인받은 바는 없는 오직 내 관찰과 추정에 의한 것이지만. 아버지의 삶의 궤적과 고지식한 언행, 그리고 과도한 정치적 의사표시 등을 고려해 보면 자식으로서 나는 상당한 확신을 갖게 됐어. 아버지는 경제적으로는 유능하지 않았지만 결코 다른 사람에게 나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어. 아마도 한국 전쟁 시 아버지가 부역자임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으신 것은 동네 사람들에게 극단적인 선택을 강요하지 않으셔서 인심을 잃지 않으셨기 때문이기도 하고. -

 아버지는 군대에서 제대한 이후에도 4H 운동 등 농촌 문제에 관심을 가지신 것 같다. 화성에서 드물게 일본어와 영어에 능통하셨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선진국에서 먼저 개발되어 일본 농업 잡지에 소개된 새로운 농법의 도입에도 나름 애를 쓰셨다. 큰오빠는 우리 집 앞에 있던 텃밭에 구포리 4H 운동 본부 비슷한 건물이 있었다고 했다. 거기서 청년들이 모여 회의하는 것도 봤다니 맞을 것이다. 그 건물에 대한 기억은 작은 오빠도 가지고 있었다. 나도 희미하지만 그 건물이 기억난다. 

 지금은 흔한 비닐하우스를 화성에서 처음 만들어 시험한 분도 아버지셨다. 비닐하우스는 사거리 근처의 밭에 있었다. 신작로에서 우리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 마을 길 옆에 있던 밭이었다. 거기 비닐하우스에서 수확한 오이를 가족들이 나르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오이 나르기에만 동원되었다. 그러나 오빠들은 야목까지 종종 리어카를 밀어드리거나 야채 짐 나르기를 도와 드렸다. 심지어 삼륜차에 실려 인천 공판장까지 따라다녀야 했다. 

 안타깝게도 아버지는 생산 능력은 있으시지만 판매와 같은 장사꾼의 마인드는 부족하시다. 그런 능력은 오히려 엄마가 월등하다. 

 외갓집은 용인 수지의 땅이 수용되며 거액을 보상금으로 받았다. 자산 규모가 급성장한 케이스다. 보상금으로 자산이 늘어난다고 다들 그것으로 부유하게 사는 것은 아니다. 순식간에 탕진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심지어 가족 싸움으로 번져 재산을 날리고 여전히 빈털터리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우리 외가 식구들은 이재에 밝은 편이다. 다들 안정적으로 투자하여 지금도 상당한 재산들을 굴리며 살고 있다는 이야기를 앞에서도 했다. 엄마도 그 피를 물려받은 사람이다. 당연히 아버지에 비해 이재에 밝고 장사에도 수완이 있으셨다. 엄마가 장사에 뛰어들자 단골 확보도 어렵지 않았다. 같은 채소를 사도 엄마에게 산 것이 고소하고 맛이 있으며 특히 믿을만하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제기시장 손님들 중 꽤 많았다.

 엄마는 조개도 손질해서 팔 경우 값을 더 받을 수 있다는 걸 아셨다. 덕분에 손은 다 망가져 마디가 굽을 정도로 조개를 까서 파셔야 했다. 팔다 남은 무는 치자와 단 성분을 이용해 단무지로 만들어 파셨다. 손재주가 좋아 그런 단무지도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특히 고대 앞 주변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던 분들에게 엄마의 각종 채소들은 인기가 많았다. 적어도 상품의 가치를 높이는 일에 대해 아버지보다 한 수 위였다는 건 분명하다. 지금의 가락시장 같은 역할을 하던 용산 시장이나 청량리 시장에서 물건을 떼 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엄마는 사람들의 입맛에 맞는 채소를 고르는 안목이 있었다. 채소의 산지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일 수 있다는 걸 알고 계셨다. 

 나도 배추나 무 등을 고를 때 생산지를 먼저 보곤 한다. 엄마에게 김치의 맛은 기본 재료가 결정한다는 걸 배웠기 때문이다. 열무는 일산이나 포천에서, 배추는 평창이나 해남에서 올라온 것들을 고른다. 딸의 살림 습관 대부분은 어쩌면 엄마 솜씨의 대물림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엄마 같은 안목이나 소질은 부족하다. 제대로 물려받을 시간도 노력도 없었다. 그러나, 솜씨 좋은 엄마에게 곁눈질이라도 배운 것을 활용해 식구들을 굶기지 않고 살아간다. 다행이다.

 아버지가 새로운 농법으로 오이 등을 길러도 문제는 있었다. 판로가 없었던 것이다. 인천 등지에 내다 팔아도 오이는 제값을 받지 못했다. 지금처럼 유기농이 배 이상의 가격으로 팔리거나 대접받던 세상이 아니었다. 삼시 세 끼를 때우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더구나 농산물은 예나 지금이나 금값이 아니었다. 가격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반대로 공산품은 만드는 족족 떼돈을 벌던 시절이었다. 농촌에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던 이유가 짐작된다. 우리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가족들을 모두 동원해 농산물을 길러도 자식들 학비 충당이 어려울 것을 아버지는 심각하게 느끼신 것 같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언제 뱅골을 떠나기로 완전히 결심하셨을까? 그 배경은 언제였을까? 약국이 어느 정도 경영되었다면 우리는 어디 살게 되었을까? 막내 고모는 광택이 오빠가 인하공대로 진학하게 되면서 근거지를 서울에서 인천으로 옮기신다. 고모가 이사를 하지 않으셨다면 아버지도 공덕동 인근에 살 집을 마련하셨을 것이다. 하지만 작은 아버지와 함께 제기동으로 이주하셨다. 왜 어떤 경로로 갑자기 제기시장으로 옮기게 되었는지 나는 잘 모른다. 너무 어릴 때 일이기 때문이다.  

 아마 작은 아버지 집이 제기동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작은 아버지는 신혼살림을 제기동에 차리셨다. 초혼에 할아버지에게 받은 재산 대부분을 사기당하신 뒤였다. 작은 아버지는 이해타산적이고 영악한 사람은 아니다. 큰오빠 말대로 도련님 기질에 허영심이 우리 아버지보다 좀 더 있을 뿐이다. 어른들도 영악했다면 놓치지 않을 기회를 자주 놓쳤다고 아쉬워하셨다. 처음 작은아버지의 기회는 명동 ‘대번’이란 음식점 지배인으로 일하시며 생겼다. 그 주인이 조카사위를 삼으려 하셨다. 그런데 엉뚱하게 그 집 종업원 작은 엄마와 결혼하셨다. 결혼해서 그곳을 그만두고 4.19 즈음엔 교도관으로 일하셨다. 왜 그 일을 그만두셨는지는 잘 모른다. 이후 과부가 되신 창안이 오빠 어머님의 소개로 청계천 광장 시장 과자 도매점에서 지배인으로 일하셨다. 

 그즈음 큰오빠가 경동 중학교에 입학하자 방을 하나 더 얻어 작은 오빠까지 돌보게 된 모양이다. 제기동 살며 책 할부 판매를 할 즈음 집에 책을 많이 쌓아 놓아 큰오빠는 그 책들을 보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그 무렵 해외문학 작품들이 우리말로 많이 번역되었다.  큰오빠는 작은 아버지 덕에 헤르만 헤세나 톨스토이 등 여러 작가들의 전집류와 우리나라 장․단편들을 잔뜩 보게 된 것이다. 

 두 오빠를 서울로 진학시킬 즈음 할아버지는 분가를 결심하셨다. 사거리 근처 밭에 집을 짓고 두 분은 이사하신다. 그 이전까지 엄마는 뱅골 집에서 안방을 차지하지 못하셨다. 대청마루를 사이에 두고 건넛방에 기거하셨다. 건넛방은 엄마가 시집오시면서부터 사시던 방이다. 그 방에는 엄마가 시집오실 때 혼수품으로 직접 수를 놓아 만드신 각종 물품들이 있었다. 지금도 이불보나 양복 걸이에 놓인 자수가 흐릿하게 기억난다. 

 할아버지는 뱅골 집을 큰아들인 아버지에게 물려주고 사거리에 지은 집은 작은 아버지에게 물려주실 생각이셨다. 이사하신 초기에는 엄마가 세 끼 밥을 해서 사거리까지 날랐다. 때로 그 심부름을 오빠들이 맡아한 것 같다. 가끔 할머니가 아직 정정하신데 며느리에게 밥을 해다 나르라고 한 일에 대해 아직도 의문이 생긴다. 그렇게 하도록 방치한 아버지의 행동도 이해 안 되는 건 마찬가지다. 당시 뱅골에서 아버지는 신세대 중의 신세대였다. 배운 사람은 행동 면에서도 뭔가 달라야 하지 않았나? 특히 공평이나 평등에 관심이 적지 않으셨는데.

 엄마는 아버지가 제기시장에서 작은 아버지와 장사를 시작하신 다음 상당히 위기의식을 느끼신 것 같다. 작은 아버지를 믿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걸 내가 여러 번 들어서다. 참다못해 서울 가게에 가보니 극장표가 수도 없이 나오더라고. 장사에는 뜻이 없고 먹고 노는 일에 더 열중하는 걸 보고 도저히 안 되겠어서 엄마가 직접 나서게 되었노라고. 

 엄마가 장사에 직접 뛰어들기 위해 작은 아버지와 어떤 협의나 마찰 과정을 거쳤는지 나는 전혀 아는 바가 없다.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인 막내까지 아이 셋을 시부모에게 맡기고 서울로 올라가시기까지 모두 어른들의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내 기억에 옛날이야기 잘해 주고 나름 사근사근하시던 엄마의 성격이 시장 아낙의 거칠고 억센 성격으로 변하신 건 그게 시작이었다는 거다. 물론 엄마의 본성이 억세고 강인한 기질이 없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시장은 자유경제의 밑바닥이다. 당연히 가장 치열한 삶의 전쟁터였을 것이다. 그곳에서 가족의 생존과 자녀들의 학비 마련을 위한 엄마의 노력은 사실 처절했다고 밖에 말할 수 없다. 상당히 무뚝뚝한 아버지도 엄마의 제기동 시절에 대해 이야기하면 고생이 많았다며 많이 미안해하셨다. 

 뱅골에서의 아버지는 우리들에게 그런대로 많은 관심을 쏟으셨다. 고시공부를 포기하신 다음에는 전력을 다해 자녀들의 교육에 매진하신 거나 마찬가지다. 매일 동네 한 바퀴를 뛰고 학교에 가도록 한 것도 그 시절의 이야기다. 나는 지금도 뱅골 우물가에서 동네 한 바퀴를 뛰고 돌아와 양치질하던 우리들 모습이 희미하게 기억난다. 옆 집 일순이네와 우리 집 텃밭 너머 저 멀리 구포동 고개까지 보이는 우물가에서 하던 양치질의 상쾌함 때문이리라. 왁자지껄 떠들던 우리들의 목소리도 함께.  

꿈을 포기하고 접어야 하셨던 아버지의 뒷모습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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