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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아버지의 길

 아버지에게 우리 오 남매는 본인이 포기한 세상에 나아가 활개 치며 살아줄 꿈나무였다. 그중에서도 작은 오빠에 대한 아버지의 기대는 기대 그 이상이었다. 아마 자식 문제로 아버지가 가장 많이 좌절한 일이 있다면 작은 오빠와 관련된 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아버지는 자신과 자식들은 살아갈 조건 자체가 다르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노력만 한다면 세상에 거칠 것 없는 조건이라고 보셨다. 그래서 작은 오빠의 자잘한 일탈마저도 어떻게든 다잡아야겠다는 생각을 하신 거겠지. 둘째 아들의 영재성을 안타까워한 것은 엄마도 마찬가지셨다. 장사를 하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작은 오빠가 학교를 안 갔다고 연락이 오면 만사를 제치고 여기저기 찾아다니시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그러나 두 분의 교육관은 상당히 차이가 있다. 엄부자모다. 엄마는 작은 오빠의 일탈에 대해 야단을 쳐도 빠져나갈 구멍은 줘야 한다고 생각하셨다. 작은 오빠의 사춘기를 이해하신 것이다. 아버지 몰래 용돈도 챙겨주고 어떻게든 다독이려고 애쓰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기 인생의 실패를 아들이 반복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더 크셨다. 그래서 그렇게 둘째 오빠를 때로 모질게 대하신 게 아닐까? 엄마는 자식 교육에 대해 대부분 아버지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러나 아버지에게 이혼 운운하시며 달려드신 적이 있다. 자식 교육을 빙자해서 둘째 아들을 심하게 때린다며 말이다.  

 쓰다 보니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표면에는 보이지 않았던 이면의 모습이다. 당시 이해되지 않았던 것을 후일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 하고 깨닫게 되는 경우다. 나는 가끔 진원이 아빠가 성정이 몹시 급해 화를 잘 낸다고 생각했다. 그런 태도가 유별나게 힘들 때가 있었다. 어쩌다 가족이 외식을 하러 갔을 때가 그 예다. 사소한 일로 다른 사람과 부딪쳐서 큰 소리가 나는 게 나는 싫었다.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나온 가족들 기분이 상하는데 왜 그 모양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깨닫게 되었다. 진원 아빠가 타인에게 화를 낼 때는 공통점이 있었다. 누가 나나 아이들을 배려하지 않고 행동했을 때였다. 가족들이 좋아하는 것 먹고 기분도 내려고 나왔는데. 이런 내 생각과 같았던 것이다. 그러나 가족을 건드리는 건 참을 수 없어 그랬다는 걸 어느 순간 갑자기 이해하게 됐다. 나중에는 어디 가기 전에 혹 누가 가족을 건드려도 나나 아이들도 만만치 않으니 그렇게 보호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남들이 어떻게 행동하건 가족들이 기분 좋은 시간을 보내는 게 더 중요하다고. 그러니 생각 없이 말하고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굳이 화를 안 내줘도 된다고.

 아버지가 청요리에 계실 때 일이다. 하루는 내가 갔더니 아버지가 몹시 섭섭해하셨다. 막내랑 궁평 항에 바람 쐬러 간 사이에 작은 오빠가 왔다 갔단다. 좀 기다렸다 아버지를 보고 갈 것이지 그냥 갔다면서 얼마나 섭섭해하시는지. 아버지는 거의 매주 오는 나나 막내 셋째도 기다리셨다. 어떤 날은 그냥 전화를 해서 보고 싶으니 오라고도하셨다. 그러나 그 심중에 더 기다린 자식이 있었다. 위로 두 오빠들이다. 특히 작은 오빠를 많이 기다리셨다. 왜 안 오느냐는 말씀을 하셔도 내가 두 오빠에게 전한 적은 없다. 형편이 그런 걸 어쩌냐면서. 쉽게 올 수 없는 사정이 있다고 길게 변명은 했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난 뒤 큰오빠가 두 분 모시고 해외여행 한 번 가는 게 꿈이었는데 결국 못 갔다고 그게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가 끝끝내 허락을 안 하셨다는 거였다. 나 역시 몇 번 공무원 연금공단에서 운영하는 콘도에 두 분을 모시고 가려고 시도했다. 역시나 번번이 실패해 엄마만 모시고 가야 했다. 아버지 핑계는 단순했다. 개밥이나 닭 모이를 주셔야 한다는 것이다. 개나 닭에게 딸인 내가 밀리나 싶을 정도였다. 구포리 산 아래 살고 계시는 작은 할머니에게 부탁하고 가시자고 해도 소용없었다. 심지어 셋째가 미국에 살면서 두 분에게 오라고 했을 때도 엄마만 가셨으나 말해 무엇하랴. 

 그런 아버지가 구포리 산에 있는 일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중국을 가셨다. 나에게도 명령이 떨어졌다. 토요일과 일요일에 와서 닭과 개를 챙기라고. 그리고 작은 오빠에게 가셨다.  

 지난 삼우제 때 이야기다. 작은 오빠에게 물어보니 아버지가 중국에 오셨던 이야기를 그제야 했다. 오빠가 운영하던 중국 공장은 규모만 10000평에 직원이 1500명 정도였다. 아버지는 공장을 둘러보시고 해방 이후 군수업체를 하던 창신동(동대문 밖) 이모할머니 공장보다 더 크다며 엄청 뿌듯해하셨단다.

 막내는 매주 토요일이면 화성에 가서 엄마를 모시고 장도 보고 남양 주변으로 바람도 쏘이러 다녔다. 아버지는 아무리 함께 나가자고 졸라도 따라나서지 않으셨다. 그건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심지어 사위인 진원 아빠가 아무리 같이 나가시자고 해도 거의 허락하시는 일이 없었다. 뭐 하러 돈 쓰러 다니느냐며 난 안 간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신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에야 막내를 따라나섰다. 그제야 막내를 따라나서시는 걸 보고 이제 마음이 많이 달라지셨나 했는데. 글을 쓰면서 아버지도 어쩔 수 없이 편애하는 자식이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물론 그 대상이 내가 아닌 것에 아쉬움은 없다.

 구포리 산을 담보로 작은 오빠를 위해 대출을 해 줘도 되겠냐는 전화를 받은 적이 있다.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엔 나에게 직접 전화를 거시는 일이 없었다. 나에게만 물은 것은 분명 아니었을 거다. 그때 아버지가 하신 말은 다들 들었을 거라 생각한다. 

 - 나처럼 밑천이 부족해 망할까 봐 담보를 해서라도 돈을 마련해 주고 싶었노라고 - 

 이게 아버지의 본심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허투루 돈을 써 보신 적이 없다. 마음이 급해서 급전을 쓰신 적은 있다. 그것이 문제를 일으키고 엄마를 고생시키는 빌미가 된 적은 많다. 그 급전은 대부분 사업 자금이었다. 좀 더 치밀하고 계산적이었다면 안 써도 될 돈이었다는 게 함정이다. 성정이 그런 분이셨다. 평생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돈을 쓰거나 시간을 낭비해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아쉬운 것은 절제와 검소가 몸에 배어 있으나 그것이 재산의 축적에 도움이 되지 않았을 뿐이지만 말이다.

 언젠가 친구들과 단양의 콘도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다. 그때 친구들 아들과 남편에 대한 이야기로 밤을 새웠다. 화제의 공통점은 남편이 아들을 대하는 태도였다. 특히 아들에 대한 과도한 기대가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망치고 그걸 중재하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였다. 들어보니 내용은 똑같았다.

 - 너는 나보다 좋은 조건이다. 공부만 하면 다 이룰 수 있는 걸 왜 그것밖에 이루지 못하느냐? - 

 아무리 아들이 노력을 해도 개천에서 용이 된 아빠를 어떻게 뛰어넘을 수 있는가? 아버지가 보기에 공부만 하면 이룰 수 있는 것들을 아들들은 기회를 날렸다고 생각하는 게 문제였다. 게으름과 무능력 거기다 유약함 때문에 말이다. 한마디로 아들은 부족한 놈이었다. 아들이 무엇을 이루어도 그게 부족해 보이는 아버지들. 우리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 생각의 기저에 깔려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작은 오빠의 일탈이라야 요즘 세대 입장에서 볼 때 별 거 아닌 것들이다. 34년 동안 중학생을 가르쳐 본 내 입장에서야 그걸 일탈이라고 부르기에도 좀 우스운 일들이라는 뜻이다. 아버지는 혼자 서울로 와 양복점 시다로 취직해서부터 조금도 한 눈을 판 적이 없으셨다. 평생 술 담배를 안 하셨으니 타인에게 실수할 일도 없었다. 당연히 자식들도 그 눈높이에 맞춰 그 수준에서 아버지만큼은 노력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혹 작은 아버지 같은 사람이 될까 봐 우리들을 더 다잡았다고 나는 생각한다. 큰오빠는 작은 아버지에 대해 이렇게 간단히 요약했다.

 - ‘작은 아버님은 선린상고 졸업하신 뒤에 군대 다녀오시고 5·16 나던 61년 즈음 교도관을 지내셨어. 서대문 구치소인 듯. 주로 부정축재자와 정치 깡패들이 죄수로 잡혀왔을 때래.

 그즈음 동거하던 여자가 있었어. 뱅골 집에도 왔었는데 키가 큰 신식 여성이었어. 내게 할아버지 재산과 땅에 대해 묻더라고. 초등학교 2·3학년 때였는데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 뒤에 유부녀인 게 들통났어. 사기꾼이었나 봐. 아마 그때 삼촌 몫 재산을 일부 날린 게 아닐까 해.

 그 뒤에 삼촌을 잘 본 사람이 명동에 <대번>이란 일식집을 해서 거기 지배인이 되셨어. 그 사장이 삼촌을 조카사위 삼으려고 했대. 일부러 조카딸에게 카운터를 보게 했는데 삼촌은 거기 홀에서 종업원으로 일하던 작은어머니와 사랑해서 결혼했어. 그 일로 지배인은 그만두셨어. 그 뒤 청계천 5가 광장시장에서 제과 도매상 지배인 하셨는데 아마 창안이 형 어머님의 소개였을 거야. 그 숙모님이 그 업계에 오래 계셨거든.

 나와 둘째가 안암동 삼촌 집 옆에서 방을 얻어 살고 일 년 정도 밥을 얻어먹다가 삼촌이 제기동으로 이사해서 이학년 때는 그 근처에서 살았어. 아마 내가 중3 때 제기시장에서 장사 시작하셨을 거야. 이학년 가을 이후나.’ -

 이런 요약은 사실 작은 아버지의 다양한 일탈을 약화시킨 내용이다. 내가 엄마에게 들은 이야기만 해도 작은 아버지는 본가를 자기 재산을 쌓아 둔 창고로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늘 우리 조부모님에게 손을 벌리면 돈이나 물건을 가져갈 수 있는 곳으로. 

 작은 아버지가 다니신 선린 상고는 상고 중에서도 제일 좋은 학교였다. 아버지 같은 노력을 했다면 작은 아버지의 삶도 훨씬 평탄했을 터였다. 그러나 우리 아버지에 비해 작은 아버지는 노력을 과소평가하시는 경향이 많았다. 거기에 부적절한 처신이 자주 있었다. 불필요한 언변도 상당히 문제가 되었다. 그런 성격적 문제에는 우리 할머니의 지나친 편애에서 비롯되었다. 할머니의 아들 사랑은 대부분이 작은 아버지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늦게 얻은 막내아들에 대한 사랑을 이해는 한다. 

 제기동에 살 때 술 취한 작은 아버지가 가끔 우리 집에 와서 소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할머니는 늙고 힘없는 자신 앞에서 부리던 난동에 가까운 행동이나 말을 그저 가만히 듣고만 계셨다. 작은 아버지에게 어떤 훈계도 하신 적이 없었다. 소식을 듣고 집으로 오신 아버지와의 다툼에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아버지의 과도한 요구보다 생활이 어려우니 큰집에서 도와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황이 안타깝고 안쓰러우셨던 게 아니었을까? 그게 부모의 마음일 것 같기는 하다.

 우리 아버지는 형제 복이 너무 없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그렇게 외갓집의 형제애를 부러워하신 모양이다. 우리에게 만복의 근원은 형제애에 있다고 강요하다시피 설교하신 이유도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혹 자식들이 형제 싸움으로 복을 날릴까 경계시킨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다행히 오 남매는 나이가 들면서 불필요한 다툼으로 형제애를 날리지는 않았다. 부모님 부양과 관련된 일도 서로 도우려 애썼다. 나는 주변에서 자식들이 부모님 부양 문제로 다툼을 일으키는 경우를 많이 봤다. 부모님들이 돌아가신 다음에는 거의 남이 될 정도였다. 

 그러나 우리들은 누가 부모에게 들이는 노력이 부족하다는 말을 한 적이 없다. 오해의 소지는 있더라도 이해하려는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각자 가정을 꾸리고 40년의 세월이 흘러 여러 가치관이나 삶의 방식이 많이 달라졌더라도 그걸 뛰어넘는 것들이 있었다. 그게 아버지가 우리에게 준 교훈이 아닐까? 적어도 우리는 부모님 앞에서 작은 아버지처럼 행동한 적이 없다. 아버지가 오 남매에게 부족함 없이 깔아 준 것 중 하나가 형제애 아닐까? 형제애가 나름 강한 우리들이야말로 아버지 인생의 최대 성공작이다. 

 우리들의 아버지 권자 윤자 택지를 쓰셨던 분은 개인적인 삶으로 봤을 때 참고 또 참아야 하는 인고의 나날을 사셔야 했다. 세상의 잣대만이 아니더라도 돌아가실 때까지 자식들에게조차 크게 인정받지 못하셨다. 그러나 자식들이 아버지를 외면하지는 않았다. 낳아주고 길러주신 은혜에 대해 나름 감사의 마음을 가졌다. 적어도 아버지의 자식이라는 걸 부끄러워한 적이 없다. 

 성공한 삶이란 무엇일까? 우리 아버지는 이 땅에 태어나 어두운 시절을 살다 간 수없이 많은 분들 중에 한 분이셨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그분의 행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자식들이 있기에 우리 아버지는 누구보다 성공한 삶을 사셨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엄마가 돌아가신 뒤 청요리로 홀로 이주하신 아버지가 베트남에서 온 맏손자 여경이 가족과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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