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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고향 구포리 산으로 돌아가다 -
수구초심[首丘初心]

   

 수구초심[首丘初心]은 ‘여우도 죽을 때는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둔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자주 빗대는 말이다. 글을 쓰기 전에 나는 우리 부모님도 고향을 그리워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다. 조부모님에게 했던 실수를 한 것이다. 심지어 안양에서 구포리로 이주해 살 생각을 하시는 걸 약간 의아해했던 것 같다.

 우리 부모님은 전쟁터 같은 서울에 살면서 자식들의 학비에 올인하셨다.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할 틈도 없었을 거라고 오래 믿었다. 그런데 할아버지의 마지막 남은 유산의 조각을 터전으로 삼아 고향으로 돌아가셨다. 남은 생의 터전으로 삼으셨다. 그곳을 그렇게 힘들여가며 가꾸려고 애를 쓰실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과 조상님들의 산소와 산을 돌보며 사실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본 것이다. 

 입신양명을 이룬 것도 아니고 할아버지의 전답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향으로 돌아가시는데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지 않았을까 싶다. 거의 빈손이 되어 돌아오시는 우리 부모님을 누가 환대할 것인가? 다행히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 부모님 뒤에는 어디에 내놓아도 번듯하고 장성한 자식들이 다섯이나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나 됐지? 갑자기 날짜를 헤아려 보게 됐다. 겨우 두 달. 그런데 왜 이렇게 까마득하게 먼 옛날이야기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슬픔도 ‘복기’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나는 ‘복기’를 하기는커녕 벌써 많은 것을 잊고 있다. 청요리에 계시던 아버지, 무엇보다 구포리 산에서 지내시던 부모님 모습이 이젠 선명하게 생각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지 얼마 안 되어 구포리 산 근처를 지나간 적이 있다. 산이 있던 주변 땅은 평평한 토지로 변해 어느새 아파트 구조물이 올라가고 있었다. 그곳에 살게 될 그 누군가는 알게 될까? 수십 년간 목숨처럼 그 땅을 아끼고 일구던 사람들이 있었음을, 무엇보다 그곳을 스쳐 지나가기만 해도 지나치게 변한 고향 풍경이 보기 싫어 고개를 돌리고 지나가야 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물론 그곳에서 마주 보이는 산이 왕재봉이며 한 때 그곳이 왕의 자리를 버리고 낙향했던 양녕대군이 살던 곳임은 전설처럼 들을 수는 있을 것이다. 

 사거리 집 마당과 안방 창에서 바라보던 가을 산의 아름다운 풍경은 신기루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콘크리트 숲으로 빠르게 변해 간다. 다시 그곳을 지나가게 될 일이 생기더라도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 더 먼 길로 우회하더라도. 아버지 자식들은 전부 같은 마음일 거라 생각한다. 

 처음 엄마와 아버지는 구포리 산에 오시면서 작은 컨테이너를 들이셨다. 안양에서 산을 드나들다 정착을 염두에 두신 의도였다. 아직 안양에 집이 있었다. 그러나 이리저리 자식들이 분가하고 난 뒤 더 이상 안양에 머물 이유가 없어지셨다. 얼마 후 관양동 아파트는 세를 주고 구포리 산으로 완전히 이주하셨다. 구포리 산은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유산의 마지막 한 조각이다. 두 분이 이주한 시기는 오 남매가 모두 결혼해 분가한 80년 중후반이다. 그리고 2018년까지 그곳에서 지내셨다. 중년 이후부터 노년까지의 30년이 넘는 적지 않은 시간을 그곳에서 보내신 것이다.

 아버지는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기 위해 어떤 용기를 내셨을까? 분명 낙향이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미 할아버지가 남기신 대다수 땅은 남의 것이 되었다. 막내는 아버지가 과천에서 국수를 만들어 파시던 기억을 하고 있다. 노점상이었다. 엄마가 힘들게 마련하셨던 제기동 집과 제기시장 가게를 정리해야 했던 그 뒤의 일이다.

 구포리 산으로의 이주는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식구가 모두 뱅골에 살 때 희미하지만 그곳에 원두막이 있었던 생각이 난다. 수박밭이 있었던 기억이다. 잡목이 우거진 곳은 아니었다는 의미다. 하지만 오랜 시간 구포리 산은 방치되었다. 

 구포리 산을 개간할 때 아버지를 가장 괴롭힌 것은 아카시아 나무였다. 뿌리가 구천까지 뻗어 있다는 아카시아는 아버지 입장에서 아무 쓸모없는 잡목이었다. 심지어 땔감으로도 쓸모없었다. 가시가 있어 손을 찔리거나 다치기 때문이었다. 아카시아는 원래 우리나라 산에 주종으로 심었던 나무가 아니었다. 방치되었던 기간 동안 주종이 되었을 뿐이다.

 왜정 때 수탈은 다양한 곳에서 이루어졌다. 그중 산에 있던 수십 수백 년 된 나무를 각종 개간이나 전쟁 물자 명목으로 마구 베어갔다. 울창한 숲은 그렇게 사라졌다. 산들은 황토색을 그대로 드러낸 민둥산이 되었다. 민둥산은 여름이면 각종 물난리를 불러왔다. 치수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조림 사업으로 쉽고 빠르게 자라는 아카시아를 산에 마구 심었다. 우리 주변의 아카시아는 이런 사연으로 영역을 넓혀 갔다. 아카시아를 캐내는 일을 진원 아빠가 도우면서 알게 된 사실이다. 나는 그때서야 동서양을 막론하고 아카시아 전설이 왜 그런 질긴 인연의 대상으로 이야기되었는지 깨달았다. 캐내도 어디선가 솟아나는 아카시아 나무를 없애기 위해 나중에는 석유를 나무 밑동에 시커멓게 발라 두었다. 구포리 우리 산에서 아카시아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나무가 되었다. 전쟁은 아버지의 승리였다. 

 잡목은 아카시아만이 아니었다. 산딸기나무도 쉽게 주변을 점령했다. 역시 나무로써의 가치는 별로 없는 잡목이었다. 주변으로 퍼지는 속도도 순식간이었다. 우리 산과 경계를 둔 곳은 산딸기나무가 꽤 있었다. 어느 여름. 장화를 신고 그곳에 들어가 산딸기를 땄다. 양이 제법 많았다. 씨앗이 많아 그냥 먹기에는 애매했다. 산딸기에 설탕을 넣고 잼을 만들었다. 진원이 진형이 정후까지 합세해 실컷 물놀이를 하고 난 다음 식빵에 산딸기 잼을 발라 먹던 모습들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산딸기 넝쿨은 워낙 생명력이 질기다. 순식간에 주변을 점령한다. 가시 덩굴이 우거지면  사람들 출입이 힘든 곳이 된다. 그러니 뱀들의 서식지로 적당할 수밖에 없다. 나는 그곳 출입을 좋아하지 않았다. 뱀을 만날까 봐 은근 겁이 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날 내가 거둬들인 산딸기는 비록 딱딱한 씨앗이 잔뜩 들었어도 맛과 향이 일품이었다. 애들은 기억도 못하겠지만. 물놀이 후에 먹는 간식으로 최상의 것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천연의 재료로 만든 수제 잼이었으니. 식빵 한 줄이 순식간에 사라지던 마법이 그날도 일어났다.

 여기저기 산소가 있었지만 아버지는 잡목을 제거한 자리에 밤나무와 각종 과실나무를 심으셨다. 특히 셋째의 처가에서 구해 온 밤나무는 명물이었다. 공주에서 사돈을 통해 구하신 밤나무였는데 밤 맛이 기가 막혔다. 밤고구마보다 더 달았다. 

 그 밤나무에 들인 아버지의 노력도 장난이 아니었다. 안양 등지 한약방에서 한약재로 사용한 찌꺼기들을 구해 나무 주변에 뿌렸다. 거름 중에서도 아버지는 그것을 최고라고 생각하셨다. 약 밤이라며 밤 맛을 자랑하셨다. 그만큼 밤나무에 들인 정성이 컸다. 

 아쉽게도 그중 많은 밤나무가 태풍 곤파스에 쓰러졌다. 아버지는 그 해 태풍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가끔 이야기하셨다. 우리가 가보니 아버지의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밤나무의 피해는 심각했다. 우람했던 밤나무들은 바람에 뿌리 채 뽑혔거나 쓰러졌다. 회생 불능의 나무들이 뒤엉켜 있는 광경은 처참했다. 곤파스의 중심이 하필 화성을 지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결국 밤나무를 모두 베어버려야 했다.

 막내의 말에 의하면 태풍 곤파스는 2010년에 왔었단다. 나는 태풍의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막내는 당시 화성의 피해가 얼마나 심했는지 줄지어 쓰러진 나무들을 사진으로 찍어 두고 있다고 했다. 태풍의 중심이 하필 화성을 지나가 그런 피해가 났다는 것도 자세히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느끼신 상심은 훨씬 크셨을 터였다. 진원 아빠는 밤나무들 피해가 심한 이유를 과영양이었을 거라고 진단했다. 한약재로 인한 영양 과다로 나무들이 웃자라 땅에 뿌리를 깊이 뻗지 못해 이런 피해가 생겼을 거라는 판단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태풍 곤파스로 피해를 입었을 때 아버지 나이는 이미 80이 넘으신 상태였다. 다시 밤나무를 심어 매출을 얻기 위해서는 5년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다. 밤나무 피해를 보상받기 위해 아버지는 여러 노력을 하셨다. 하지만 당시 피해가 심한 다른 농작물이 많아 보상은 받지 못한 걸로 알고 있다. 

 나는 아버지가 구포리 산에서 밤 농사를 지으실 무렵부터 제기시장 수원 상회 집 딸에서 밤 농장 집 딸로 바뀌어 살았다. 판매처가 애매한 밤을 아버지는 주로 자식들에게 맡기셨다. 그러나 자식들 역시 아버지처럼 이재에 밝은 편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처한 위치들이 남에게 돈을 받고 밤을 팔기에는 애매했다. 솔직히 그런 주변머리가 없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에게 용돈처럼 돈을 드리고 밤을 가져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선물로 돌렸다. 엄마가 자식들에게 돈을 받는다며 난리를 부리셔도 소용없었다. 농사에 들어가는 각종 비용에 생활비 등도 부담하는 자식들에게 엄마는 항상 미안한 마음을 가지셨다. 

 지금 돌아보면 밤 농사에 가족들의 각종 노력 동원도 만만치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에는 구포리 산으로 접근하는 도로가 많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 오가는 데만도 네다섯 시간이 소비되었다. 토요일이면 아버지 일을 도우러 오지 않는다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억지로 집을 나서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으로는 구포리 산에 가서 하는 일이 나에겐 직접 경험이 되었다. 그 경험 중 열무 밭 잡초를 뽑던 일은 청소년 선도 방송 ‘마음의 문을 열고’ 원고에 활용한 적도 있다. 내용은 이렇다. 아버지의 명으로 열무 밭 잡초를 열심히 뽑았다. 그러나 너무 힘이 들어 다음 주에 와서 나머지를 뽑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돌아왔다. 다음 주에 가보니 지난번 뽑은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다. 설마 한 주일 사이에 무슨 문제가 생기랴 했던 내 방심이 문제였음을 깨달았다. 그 경험을 예화로 들며 일의 마무리가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는 내용이었다. 

 내가 나이가 들어 은퇴를 하면 귀농을 해 볼까 하던 꿈을 접은 이유는 간단하다. 두 분이 구포리 산에 계신 동안 수없이 그곳을 드나들며 충분히 느끼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농촌에서 절대 농사를 지으며 살 성품이 아니다. 전원생활이 싫은 것은 아니다. 다만 노동에 적합한 체력이나 타입이 절대 아니라는 확신이 생겼기 때문이다. 진원 아빠 역시 마찬가지다. 아버지의 일을 돕고 돌아오는 길은 도로가 막혀 더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주말이 어서였다. 돌아오는 길에 진원 아빠는 가끔 졸음운전을 했다. 아버지가 시키는 일을 하다 보면 과한 체력 소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졸음운전에 대해 잔소리를 하기 어려웠다. 농사는 기본적으로 체력 싸움이다. 그런 체력과 인내심은 아버지 정도의 강단이 뒷받침되어야 가능한 건 아닐까? 수시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문득 그 기억이 떠오른다. 큰오빠가 대학원을 가야겠다고 말했을 때 아버지 허락의 말은 이랬다. 아무리 큰오빠를 둘러봐도 교수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을 것 같아 허락하신다고. 아버지의 그 판단은 확실히 신의 한 수였다.

구포리 산을 추억하면 이런 차 한 잔의 여유가 늘 아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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