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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갈피에 끼워 둔 추억들을 꺼내보네

             

 아직 손주들이 어릴 때는 구포리 산에 모이는 경우가 꽤 많았다. 손주들 출입이 잦아지자 아버지도 놀이 장소를 마련하셨다. 시멘트로 야외수영장을 만들어 여름이면 그곳에서 놀도록 하셨다. 물에서 하루 종일 놀던 아이들의 배를 채워주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산에 가면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당시 비교적 가까운 사거리에는 규모 있는 가게가 없었다. 하다못해 편의점 비슷한 상점도 없었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그곳은 제법 흥성거렸다. 그러나 차들이 그냥 지나치는 곳이 되면서 대부분의 상권이 비봉면 사무소 주변으로 집중되었다. 비봉에는 비봉 중·고등학교에 면사무소, 우체국만이 아니라 각종 편의 시설들이 있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하나로 마트가 아직 입점되지 않았었다. 대신 아이스크림 하나를 사려고 해도 우체국 근처 ‘우리 마트’로 가야 했다. 그곳은 각종 공산물만이 아니라 농산물 판매까지 제법 규모가 있는 슈퍼였다. 지금은 그 가게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차가 없을 때는 '우리 마트'를 가기 위해 배 과수원 쪽으로 걸어갔다. 신작로로 가면 거리상으로는 가까웠다. 그러나 차들이 많이 다니는 데다 인도가 따로 없어 위험했다. 한가한 과수원 쪽이 걷기 편했다. '우리 마트'에 가서 기껏 사 봐야 과자 나부랭이에 아이스크림 정도를 입에 물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다들 '우리 마트'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른다. 낮에는 물에서 정신없이 놀고 해가 갸웃거리면 '우리 마트'까지 걸어가 군것질거리를 사던 시절이었다. 아마 그때보다 더 포만감이 넘치는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물론 막내나 진원 아빠가 있으면 차로 후딱 태워줘 5분이면 갈 거리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왕복 1시간이 걸려도 즐겁게 오갔다. 걸어가는 거리가 멀어도 상관없었다.

 명절이면 읍내에 우리 가족들이 제법 출입했을 게 뻔하다. 시장이 있는 남양읍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오락실이나 노래방도 출입했다. 나는 명절이면 시댁이 있는 부산을 오가야 했다. 우리 식구는 말 그대로 30년이 넘게 추석이나 설을 ‘고난의 행군’으로 보냈다. 오가는 길이 너무 심하게 막혀 어느 때는 아침 10시에 제사만 지내고 부산을 출발해 대구 아래 경산까지 오면 해가 질 정도였다. 고속도로던 국도던 어디라도 막히지 않는 곳이 없었다. 화성에서 명절을 보내고 식구들이 각자의 처갓집으로 흩어지고 난 다음에야 우리 가족이 헉헉거리며 도착했다. 대부분은 보름달이 환하게 길을 밝혀 주는 늦은 시간이었다. 구포리 산은 명절 파장 뒤끝이어서 아주 쓸쓸했다. 두 분은 다들 떠나보내고 한가하게 텔레비전을 보고 계셨다. 집은 시끌벅적하던 자식들을 떠나보낸 뒤 아쉬움 가득한 공간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제야 먼 길을 오가고 도착하는 우리들이 그 아쉬움의 자리를 메꾸었다고나 할까.

 1997년 말 우리나라는 IMF에 돈을 빌려야 할 정도로 경제에 치명적 문제가 생겼다. 심각한 정도였다. 당시 막내는 노동부 공무원이었다. 내 기억에 갓 사무관이 된 것 같다. 1998년 막내는 노동부 관계자 브리핑을 위해서나 인터뷰 때문에 가끔 뉴스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정후를 데리고 '우리 마트'를 자주 갔던 막내는 권가네 아들로 나름 비봉에서 알려진 인물이었던 모양이다. '우리 마트' 주인아줌마가 텔레비전에서 보는 것보다 실물이 더 잘생겼다고 칭찬하셨다며  어색해하던 막내 모습이 기억난다. 우리 가족들은 막내를 장난치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둘째 오빠를 노래하는 삼촌이라고 부른 것처럼. 애들 데리고 툭하면 장난치는 삼촌이었는데 비봉에서는 나름 먹힌 모양이었다. 점잖고 지명도 있는 어른으로 말이다. 구포리 산의 여러 추억 중에서 ‘우리 마트’는 우리 권가네 가족들과 특별한 공생 관계처럼 느껴진다.  

 어느 날 비봉 읍내를 지나다 보니 그 가게가 없어져서 놀랐다. 아마 대형 하나로 마트가 생기면서 경쟁력이 떨어져 사라진 게 아닌가 싶었다. 우리 가족들 추억의 장소 하나가 또 사라졌구나 싶어 몹시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자라면서 아버지의 사회성을 의심해 본 적은 없다. 그러나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신 다음 아버지의 행적은 엄마와 완전히 상반된 모습을 보이셨다. 엄마는 각종 모임에 적극 참여하셨다. 노인정으로 사용되는 마을 회관에도 자주 다니셨다. 노인대학을 통한 어떤 모임도 마다하지 않으셨다.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신 초기부터 자주 모임을 나가 다니신 것은 아니었다. 우리 애들이 어려 급한 일로 서울에도 자주 오가셔야 했고 막내나 안양 집도 다니셔야 했기 때문이다. 대신 창옥이 할머니를 통해 여러 모임을 알게 되신 게 아닌가 싶다. 

 창옥이 할머니는 우리 할아버지 동생이신 분의 아내셨다. 다 돌아가시게 생긴 증조할아버지를 모시러 마차를 끌고 진천 어딘가를 함께 가신 그 동생과 혼인하신 분이시다. 구포리에 살고 있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바로 그 집이다. 초임 시절 제자들과 수인선을 타러 갔다 야목에서 내려 배고픈 학생들을 끌고 예고 없이 들이닥친 집이기도 하다. 그곳에 창옥이 언니네 가족이 살고 있어서였다. 창옥이 할머니는 엄마와 아버지가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신 후에도 10년 정도 더 사셨다. 똑똑한 아들 둘을 6.25 전쟁으로 앞세우시고 평생을 한을 품은 채 사셨다. 그러나 창옥이 할머니 자신은 구포리에서 드물게 성격이 화통하고 배움에도 열심을 다하는 트인 분이셨다. 남편과 두 아들을 먼저 보내셨어도 말년을 노인대학과 동네 모임을 활보하며 즐겁게 보내시는 게 내 눈에도 보였다.

 큰오빠의 말이다. 

 -작은 할아버님은 아들이 셋이야. 큰 분이 진택 아저씨인데 아버님보다 약간 위야. 총명하신 데다 특히 대중연설을 잘했대. 전쟁 이전에 좌익 선동 연설을 잘하셨다고 해. 그 아드님이 창안이 형인데. 형도 달변가야. 그분은 아버님과 함께 수원 형무소에 수감되셨다가 거기서 돌아가셨어. 풀려나지 못하고 50년 여름 형무소에서 병사했대. 많이 맞고 제대로 먹지 못하고 치료는 꿈도 못 꾸었대. 알티 농장 서쪽 기슭 제일 아래 무덤이 그분 묘소야. 둘째가 영택 아저씨. 창옥이 누이 아버님. 셋째는 아버님보다 어린데 이름은 기억이 안 나. 그분도 역시 부역했다가 월북했어. 그 뒤로는 소식을 듣지 못했어. 창옥이 할머님이 평생 그분 그리워하다가 돌아가셨는데 점치니까 북한에서 잘 산다고 했대. 그분 때문에 혹시 간첩으로 내려오거나 접선할까 봐 그 집이나 우리 집이 항상 감시 대상이었던 거야. 네 말대로 여러 번 신고도 당했고. -

 앞에서도 한 말이지만 다시 한번 정리했다. 

 아버지는 노인대학을 함께 다니자는 엄마의 말에 단호히 거부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취미처럼 다니시면 오가는 길에 차를 태워주시니 좋고 점심도 무료로 해결하니 편한데. 엄마의 요청을 아버지는 유별날 정도로 거부하신 것이다. 

- 내가 서울대학을 다닌 놈인데 무슨 노인대학을 가느냐? - 

 이게 아버지 거부 논리의 핵심이었다. 내가 직접 들었으니 분명하다. 오랜 시간 맏며느리로서 조상의 수많은 제사를 모셨고 자식 다섯을 장성하게 키우는 데 애쓰셨으니 아버지가 조금 양보해서 엄마랑 함께 다니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 생각이지만 구포리 산의 일이라고 해야 화급을 다툴 정도는 아니었다. 딸인 내가 보기에 엄마에 대한 배려가 좀 부족하시구나 싶어 가끔 엄마랑 여기저기 다니시라고 잔소리를 한 적이 있다. 무릎 관절도 안 좋으신 엄마가 힘들게 걸어 다니시는 게 안타까워서 한 소리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집을 꺾기는 힘들었다. 나중에는 서울대 나온 것이 아버지의 유일한 자존심인 모양이라며 그냥 포기하고 말았다. 하긴 땅을 모두 팔아 서울로 올라가서 빈손으로 고향으로 돌아오셨으니 그런 마음이 들 수는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오 남매는 엄마의 행보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사람들과의 교제가 많아질수록 엄마의 사고방식도 눈에 띄게 개방적이 되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노인들을 위한 프로그램에서 배우는 게 많음을 엄마도 느끼시는 것 같았다. 하지만 고향 친척들의 시선은 우리들과 관점이 약간 다른 것 같았다. 

 어느 해 김장을 하기 위해 구포리 산에 내려간 날이었다. 구포리 산 인근에 사시던 작은 할머니가 김장을 도우러 오셔서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우리 엄마는 시골 사람들이 하는 일을 전혀 안 하신다고. 농장일은 아버지가 혼자 하시고 엄마는 뭔가를 배우러 다니는 일에 바쁘다며 나무람을 담은 표현을 하셨다. 엄마에 대한 불만을 은근히 돌려 말하신 느낌이었다. 이런저런 사정을 알고 있던 나는 작은 할머니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친척이신 분이라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에 내가 반박하기 어려운 이유도 있었다. 

 그런 오해를 할 만은 했다. 엄마는 이재에 밝은 편이시다. 아버지는 신 새벽부터 나가 농작물을 이것저것 열심히 기르셨다. 특히 밤나무에 들이는 노동력과 돈은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들인 노력만큼 수입이 보장되는 건 아니었다. 나는 가끔 엄마의 이재와 수완에 놀랄 때가 있었다. 엄마가 뭔가를 배우러 다니신다면 돈이 드는 일이 아니었다. 수영을 하러 다니시던 그랜드 골프를 하러 다니시던 모두 노인들을 위한 정부 지원 사업을 활용하신 것이었다. 그걸 누리셨을 뿐이다. 우리 아버지가 절대 안 하신 일이기도 했다. 그런 정보력은 어디서 얻으셨을까? 노인대학과 연계된 정부의 홍보 덕이었다. 그것만이 아니다. 정보가 엄마에게는 무궁무진했다. 의외로 쉬운 일로도 작지만 가계에 보탬이 되는 정보를 가져와 그걸 활용해서 본인의 용돈을 버셨다. 예를 들면 초등학교 학생들 등하교 지도 같은 것이다. 시간도 많이 걸리지 않았다. 월 20만 원이 엄마의 노령 연금 외에도 통장으로 입금되었다. 나중에는 동네에서 홀로 지내시는 분들을 방문해 이야기를 나누고 사인을 받는 것만으로도 똑같은 돈을 버셨다. 이것만 해도 자식들에게 손을 덜 벌려도 되셨다. 어떤 일이 돈이 되는지 잘 아셨다고나 할까? 

 처음 정부에서 자식들의 수입과 상관없이 노령연금을 준다고 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이 반대했는가? 주 5일제를 만드는 데도 참 많은 반대가 있었다. 마치 토요일에 일을 하지 않으면 나라가 금방 망할 것처럼 각종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과연 나라가 망했는가? 

 한 달에 20만 원을 부모에게 꼬박꼬박 생활비로 드리는 게 쉬운 자식들이 얼마나 될까? 지금은 30만 원으로 올렸지만 그것도 아직 모두에게는 아니다. 각종 이유로 제외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에게 하루 10000원씩 한 달 30만 원을 주는 노령연금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이제는 아무도 말하지 못한다. 아니, 부모님이 받으시는 노령 연금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엄마는 꽤 긴 시간 노인대학에서 회계를 보셨다. 워낙 계산에 분명하고 영민하셨다. 대인관계는 물론 평판도 좋으셨다. 인근에 또래 친구도 많이 사귀셨다. 노인대학 관계자들도 엄마를 좋아하신 분들이 많다. 내가 퇴직을 하고 진원 아빠와 가끔 엄마를 모시러 노인대학을 가게 되면 사람들이 엄마에게 얼마나 많은 호의를 가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제기시장에서 장사를 하실 때도 엄마의 사람 상대는 수준 이상이었다. 그런 것들은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신 뒤에도 여전하신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학벌에 대한 불필요한 자만심을 버리고 엄마 같은 행적을 하셨다면 더 즐겁게 사시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있다. 아버지는 생애 마지막까지 노동에 대해 과도한 집착을 하셨다. 그러나 노동의 가치를 육체노동에 한정해 두신 게 문제였다. 아버지 나이에도 정신노동에 가치를 두고 계신 분들이 적지 않다. 힘들게 땀을 흘리는 가치를 폄훼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자식들 하는 일이 육체노동에 비해 쉽다고 생각하신 건 분명하다. 그런 문제로 자식들과 불필요한 언쟁을 자주 하셨으니 하는 말이다. 

 가장 심각한 일은 아버지의 노동을 돕지 않는다는 불만을 자식들이 자주 들어야 했다는 점이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거나 회사에서 하는 일도 힘들다는 것에 대해 아버지는 생각을 바꾸려 하지 않으셨다. 자신의 노동에 비해 아주 적은 노력이나 힘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굽히지 않으신 것이다. 오히려 이 면에서 엄마의 이해도가 훨씬 높았다. 아버지는 왜 자식들이 하는 일은 자신이 하는 농사일보다 강도가 낮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게 되셨을까?

 나는 그 문제점을 곰곰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아버지는 공부하는 일이 농사일보다 훨씬 쉽다는 생각을 가지셨다. 공부에 노력을 들이면 얻는 결과가 분명하다고 생각하신 것이다. 그건 무엇보다 본인이 직접 경험으로 얻은 확신 같다. 반면 농사일은 모든 악조건에서도 명백한 성과가 나오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셨다. 어려운 게 농사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자식들이 하는 일에 대해 그 정도 노력을 들여 성과를 얻지 못한다면 그게 더 문제라 생각하신 게 아닐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린 사람들이다. 교육이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것은 물론 부유함까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해서다. 힘겨운 농사일에서 벗어나 조금 더 쉬운 삶을 얻을 방법이 교육에 있다고 믿었다. 그런 눈치를 일찍 알아차렸다. 우리 민족은 눈치만 빠른 게 아니라 사고력도 비상하다. 머리가 좋았다. 다른 나라 사람들이 따라오기 힘든 이런 깨달음을 일찍 얻었다. 교육열은 넓은 영토도 풍부한 자원도 없는 우리 민족이 발 빠르게 움직여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 배경이 되었다. 

 아버지도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신 것은 맞다. 물론 할아버지의 선경지명이 아버지에게 끼친 영향이 크다. 그런 할아버지를 아버지는 존경하셨다. 그래서 시간과 힘이 닿은 대로 농사일을 거드셨다. 주경야독도 불사하셨다. 그런 시간을 오래 지내다 보니 당연히 자식들에게도 기대하신 것이 있다. 그게 생각대로 되지 않자 자식들에게 불평을 늘어놓으셨다. 왜 자식들은 본인처럼 하지 않는지 늘 의문을 가지셨다. 이 부분은 할아버지 태도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엄마가 아무리 말려도 소용없었다. 당연히 아버지보다 수익을 더 많이 올리는 엄마에게 화를 내신 적도 많았다. 정부의 돈을 받는 엄마의 수익을 부당하다고 생각하신 듯하다. 엄마가 하시는 일이 일로 보이지 않으신 것이다. 이런 고정관념을 언제부터 갖고 계셨을까?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나 회사 일도 농사일을 웃도는 노동력과 체력, 스트레스에 시달린다는 사실을 좀 더 알아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엄마의 이해도만 가지고 자식들을 대했어도 가족들 모임은 더 화기애애하지 않았을까. 그런 아쉬움은 나만 가지는 걸까. 주말에 일부러 들르는 자식들을 쉬게 해 주려고 엄마처럼 안달하실 정도는 아니라도 그 정도의 이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려 하셨다면?

 ‘마이삭’이라는 태풍이 몰아쳐 온다는 소리를 들어서일까? 종일 쉬지도 않고 내리는 비 때문에 마음이 뒤숭숭해서일까? 오늘은 이상하게 이런 아쉬운 생각이 자꾸 떠오르는 날이다. 

    

     

아버지가 손주들을 위해 시멘트로 만드신 구포리 산의 수영장

                                     

노무현 대통령 감사장 - 아버지는 누구보다 노무현 대톨영을 좋아하셨다. 노력의 가치를 실현해 줄 분이라고 믿으셨다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 시위에 참석하신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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