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 다가오면 나는 부산을 오갈 생각이 큰 걱정거리였다. 거기에 아버지의 호출도 걱정거리 중 하나였다. 특히 밤이 문제였다. 9월이 되면 곧바로 밤이 아람으로 벌어져 떨어지기 시작한다. 온 산에 떨어지는 밤들은 하루만 지나도 밤나무 아래 즐비하게 늘어섰다. 밤 맛은 분명 좋았다. 시중에서 그 정도의 밤 맛을 가진 밤을 구하기란 사실 하늘에 별 따기다. 아버지 주장대로 토질이 좋아 그런 맛을 내는 모양이었다. 더구나 몇 년간 각종 약재를 거름으로 준 덕에 약 밤이라 주장해도 믿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도 앞서 이야기했던 병아리처럼 너무 양이 많으면 문제가 되는 거다.
9월 초부터 밤은 나무에서 쉴 새 없이 떨어졌다. 내 기억에 어린 시절에는 밤나무에서 밤을 털어야 했다. 긴 장대를 가지고 밤나무 아래서 밤송이를 털다 보면 생각지도 않은 사고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어릴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큰오빠 친구인 원구 오빠가 바로 그런 일을 당했다. 장대로 밤을 털다 하필 밤송이에 눈을 맞은 것이다. 그때만 해도 의료 기술이 좋지 않던 때였다. 결국 한쪽 눈이 실명되었다고 했다. 정확한 사고 경위는 아마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큰오빠가 잘 알 터다.
비슷한 사고로 내가 기억하는 건 더 있다. 당시 사거리에는 제법 규모가 큰 방앗간이 있었다. 지금 버스 정류장 근처였던 기억이다. 방앗간은 추수철이 아니더라도 규모가 큰 편이라 사철 영업을 했었다. 그 방앗간은 나에게도 추억이 있다. 설날에 먹을 가래떡을 뽑아지고 와야 하는 머슴 아저씨를 여러 번 따라갔기 때문이다. 어린 마음에 커다란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가래떡을 뽑아내는 광경은 정말 대단했다. 설레고 즐거운 설날 일정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던 장면 중 하나였다. 무엇보다 복잡하고 거대한 기계의 모습이 나를 압도했다. 다소 어두침침한 분위기 속에서 쉴 새 없이 움직이는 기계들의 일사불란함이 내는 굉음! <찰리와 초콜릿 공장>이라는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배경으로 상상했던 건 사거리의 그 방앗간 모습이었다.
언제 그 방앗간이 사라졌는지 나는 잘 모른다. 기억에 없기 때문이다. 방앗간도 사양산업이었나 싶었다. 어느 날 보니 건물조차 완전히 사라져 빈터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방앗간 집 아들이 사고로 기계 속에 끼어 외팔이가 된 사실은 기억하고 있다. 마치 상이군인처럼 팔 하나가 사라진 것이다. 헐렁한 옷이 한쪽 팔이 없음을 보여주었다. 그런 상태로 학교를 다녔다. 다행히 어느 날 의족을 한 모양인지 더 이상 한쪽 소매가 덜렁거리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학교를 다니니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싶어 나름 안쓰럽게 느꼈던 기억이 난다.
원구 오빠는 실명한 한쪽 눈을 어떻게 치료했을까? 밤송이에 맞아 눈을 다치는 게 확률상 쉬운 일은 아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 동네에서 나랑 가장 친했던 복순이가 놀림 삼아 하던 말은 기억난다. 복순이는 원구 오빠와 가까운 친척이다. 친척이기에 치료 과정 이야기를 들어서인지 뭔가 그 오빠에게 화가 나면 ‘개 눈깔’이라며 욕을 했다. 원구 오빠와 복순이 오빠 남종이는 친구면서 친척이어서인지 어울리기도 자주 했지만 만만치 않게 다투는 사이인 모양이었다. 아마 그 과정에서 남종 오빠 편을 들던 여동생의 험담을 내가 들은 게 아닌가 싶다. 당시는 생각 없이 하는 험담이 다친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하는지 잘 몰랐다. 너무 어리고 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난 6월. 아버지 상을 치를 때 원구 오빠를 만났다. 주변에 소식을 거의 알리지 않았던 터라 무척 한가했다. 덕분에 아름아름 소식을 듣고 찾아온 오빠와 한 상에서 밥을 같이 먹게 되었다. 지금은 어린 시절의 상처를 모두 극복하고 남양에서 돈을 잘 버는 중간 상인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보기 좋았다.
원구 오빠네 집에서 어느 날 우연히 본 흰 산토끼 가죽도 내 기억에 선명하다. 마당 가 빨랫줄에 널어 말리던 그 산토끼 가죽은 누가 어디에 썼을까. 나중에 자라서 책을 읽다 보니 영국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었다. 산토끼는 아니어도 귀족들이 빨간 여우 사냥을 즐기는 장면이었다. 귀족들은 사냥으로 잡은 빨간 여우 털을 자랑스럽게 목도리로 사용했단다. 그런 비슷한 장면을 읽을 때마다 그날의 산토끼 가죽이 떠올랐다. 흰 토끼털을 빨랫줄에서 본 게 충격 이어서일까.
겨울 흰 눈이 내리면 뱅골에서 자라는 소년들은 토끼 사냥을 했다. 주변에 야산이 많았던 터라 그 일은 시골에서 사냥이 아니었다. 그냥 흔한 놀이였다. 토끼가 아래에서 위로는 잘 뛰어 달아나지만 위에서 아래로는 다리가 짧아 제대로 피하거나 도망가지 못한다는 것도 그때 알았다. 왜 산 위에서 아래로 토끼를 모는지. 토끼몰이를 하는 남자아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저절로 알게 된 사실이다. 여자 아이들은 행동이 느리다고 토끼몰이를 시켜 주지 않아 실제 그 놀이에 끼어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눈이 하얗게 덮인 산기슭을 소리를 지르며 뛰어다니던 어느 겨울 뱅골 주변 야산의 풍경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
당시는 간척을 위해 아직 남양만을 막지 않은 상태였다. 뱅골 근처에도 넓은 갯벌이 펼쳐져 있었다. 여름이면 남자아이들은 그곳으로 맛이라는 조개를 잡으러 다녔다. 장마 등으로 물길이 더 많이 열리면 뱀장어도 잡아들였다. 그걸 숯불에 구워 먹던 원구 오빠네 집의 어느 저녁 무렵도 기억난다. 나는 뱀장어가 뱀이랑 똑같이 생긴 것 같아 먹어 보라고 줘도 슬슬 피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뱀장어야 말로 순수한 자연산에 숯불에 구워 웰빙이 분명한 장어구이인데 왜 안 먹었는지? 그만한 보양식도 없었을 텐데. 아마 실물을 보고 너무 징그러워 피한 게 아니었나 싶다.
밤송이 사건이 아니었더라도 당시 뱅골에서 자란 소년들은 사시장철 각종 놀이에 정신이 없는 장난꾸러기들이었다. 텔레비전도 라디오도 없던 한적한 시골에서 딱히 시간을 보내기에 주변 자연환경을 이용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었을 것이다. 내가 주로 했던 고무줄놀이나 널뛰기 공기놀이도 모두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놀잇감들이었다. 할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연날리기 팽이 돌리기 썰매 타기 등 남자 형제들이 했던 놀이도 재료는 모두 자연산이었다.
산과 들 그리고 갯벌로 뛰어다니며 자라다 보니 뱅골의 어린이들은 나름 각종 사건과 사고를 일으키는 주범들이었다. 반짝거리는 눈만 빼고 햇볕에 그을릴 대로 그을려 말 그대로 다들 새카만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다들 못 말리는 장난꾸러기들이었음이 분명하다.
사실 내가 구포리 산에서 밤 줍기를 즐기지 못한 가장 심각한 이유는 모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 피를 모기에게 헌혈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산의 모기는 크기가 일단 너무 컸다. 시커먼 녀석이 내 피를 빨아 빵빵하게 배를 불리면 쉽게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은 있다. 그러나 가려움증 때문에 짜증이 절로 나니 모기 물림은 무조건 피하고 싶은 일이었다.
모기만큼 싫어하는 게 더 있다. 한여름 더위에 지쳐 시냇가에 발을 담그노라면 시원함을 느낄 틈도 없이 슬그머니 공격해 온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피를 빨리게 되는 그 생물의 정체는? 거머리다. 다리에서 피가 주르르 흐르는데도 느낌이 없다. 나중에야 깨닫고 질색을 하고 떼 내려 난리를 피우게 된다. 거머리는 손으로 만지기에 물컹거려 엄청 징그럽다. 게다가 잘 떨어지지도 않는다. 모기처럼 좋아하려고 해야 좋아지지 않는 생물이다.
원구 오빠의 사고를 본 탓인지 나는 밤송이를 장대로 따는 걸 극구 피해왔다. 행동이 둔한 내가 언제든 그런 사고를 당할 수 있다고 지레 겁을 먹어서다. 모기를 피하기 위해 긴 옷을 입고 전투적으로 밤을 줍던 한 철. 아람이 벌어 떨어진 것들이라 빨리 거둬들이지 못하고 비라도 맞으면 상품성은 하루가 다르게 사라진다. 밤도 보관이 쉽지 않다. 풀숲에 떨어진 밤을 빨리 주워 건조하고 각종 보관 방법을 동원해 훈증해야 한다. 그런 과정 모두가 다 사람의 일손이 필요하다. 우리들이 아버지에게 가장 많이 들었던 잔소리가 바로 밤을 주우러 오라는 호출이었다. 심지어 추석에 명절을 보내기 위해 가족들이 모이면 모두 밤 줍기에 동원되었다. 일손이 필요한 아버지의 입장에서야 우리들 모두는 노는 일손처럼 보인 게 사실이다. 손주들까지 동원해 거둬들이는 밤 줍기의 추억을 권씨네 패밀리들은 숙명처럼 받아들인 것 같다. 사실 그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지만.
모기도 모기지만 떨어진 밤을 줍다 보면 아직 더위가 완전히 꺾이지 않은 터라 온몸은 금방 땀에 푹 절었다. 모기를 피하기 위해 긴 옷을 입고 작업을 했기 때문에 상황은 심각했다. 이마에서 흐르는 땀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주운 밤을 창고 앞으로 끌어 오는 일도 문제였다. 밤의 무게가 만만치 않아 나는 자루를 들지도 못했다. 내가 모아 놓으면 진원 아빠가 지고 올라와야 했다. 주말이면 아버지의 호출에 안 갈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나라는 일손도 아주 쓸모가 없는 건 아닌가라는 헛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거기에 집안일을 나날이 힘들어하시는 엄마 때문에 청소부터 반찬 마련까지 일은 항상 쌓여 있었다. 여유 있게 앉아 좋은 공기를 마셔가며 시골 풍경을 감상해 본 기억이 별로 없고 늘 무슨 일인가에 쫓기다 온 느낌이 드는 것도 아마 그런 이유가 아닐까.
기진맥진 기운이 다 빠져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우리는 주로 이런 대화를 해야 했다. 저녁은 어디서 무엇으로 때울까 하는. 먹는 것조차 귀찮았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차라도 막히면 진원 아빠가 졸까 봐 안달이 나서 이런 대화로 시간을 끌 수밖에 없었다. 그런 내 모습도 이제 시간의 강을 건너갔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강을 건넌 것이다.
그래도 아버지는 내가 여자라고 비교적 험한 일을 시키지는 않았다. 늙은 호박을 나르거나 콩을 수확하는 것, 배추나 무를 수확할 때도 대개 나를 제외시키셨다. 순식간에 자라는 풀 뽑기도 열외였다. 풀의 키가 나보다 큰 데다 각종 벌레에 물리면 금방 여기저기 부풀어 올라 징징거렸기 때문이다. 대신 울산 호계 매곡리에서 막내로 태어나 부모님의 농사를 도와 본 진원 아빠가 그 일을 대신 맡았다. 기본적으로 체력이 좋은 데다 일손으로 부족함이 없는 깔끔함의 진수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늙은 부모를 돕는 걸 당연하다고 생각하신 아버지 덕분에 나 대신 진원 아빠가 그런 일에 자주 동원된 것은 어쩌면 권씨네 사위로 짐 져야 했던 숙명이 아니었을까.
수확하는 계절이면 진학지도로 시간을 빼기 바쁜 나 대신 진원 아빠 혼자서도 구포리 산을 수없이 오갔다. 오죽하면 ‘대리 효도’를 시킨다며 나에게 툴툴거렸을까. 오가는 차 운전에 힘쓰는 일까지 맡았지만 그렇게 우리 가족으로 진원 아빠도 자연스럽게 편입되었다. 진원 아빠는 고등학생 때 서울로 올라와 긴 시간 혼자 살았다. 친부모님과는 겨우 15년 안팎밖에 함께 살아보지 못했다. 일 년에 많이 만나야 두세 번 얼굴 보는 게 다였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가족이 되어 30년이 넘게 이런저런 이유로 화성을 드나들었다. 친가보다 더 긴 세월을 보냈으니 구포리 산도 장인이나 장모님도 갖은 정이 든 게 사실이다. 그래서 더 부모님처럼 느껴지고 돌아가신 뒤에도 마음을 쉽게 달래지 못하는 모양이다.
‘산에 늘 일이 천지다.’며 우리를 호출하던 아버지는 그 산을 어떻게 놓고 가셨을까? 거의 헐값에 LH에 수용이 확정된 다음에도 각종 소송을 하며 시간을 보내시던 아버지의 모습을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지켜봤을까? 처음에는 말리는 시늉이라도 했는데 나중엔 설득을 모두 포기한 마음의 저변에는?
우리들은 아버지의 의사와 결정을 존중했다. 아버지 여생의 마지막 결정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 인생은 원치 않는 포기를 수없이 하셔야 했다. 우린 그걸 목격하며 자랐다. 그러니 남은 여생에 아버지가 하시고 싶어 하는 일까지 막지는 말자는 마음들이었다. 나는 그걸 자식들의 마음 씀씀이라 믿는다. 유산 한 푼 받지 않았어도 그래도 나는 내가 권가네 가족의 일원이며 이런 문제로 다투지 않게 가르치신 우리 부모님의 딸이라 다행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