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에서 사는 건 어떨까? 그런 꿈을 꾸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다. 그러나 늙어서도 그 꿈을 이루는 건 쉽지 않다. 일단 여건이 허락하지 않겠지. 한적하고 조용하며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곳에 살 수 있는 땅과 집 그리고 매달 고정적인 수입이 필요한데 그게 쉬운 일인가.
언젠가 친구들과 은퇴 후 30년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의견을 나눠본 적이 있다. 자녀들이 일찍 결혼한 경우는 손·자녀 뒷바라지 때문에 어디 다른 곳으로의 이주를 특별히 희망하지 않았다. 형편이 되면 세컨드 하우스 정도는 좋지 않을까? 이 정도 의미 이상을 기대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노년에는 대도시 대형 병원 근처에 살아야 한다는 데 의외로 많은 공감을 표했다. 나도 엄마와 아버지가 고향으로 옮겨 사시는 모습을 봤기 때문에 병원 문제에 대해서 전적으로 공감했다. 나이 들면 신체 활동이 불편한 것은 당연하다. 당연히 병원만이 아니라 각종 편의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는 접근성은 필수 불가결한 조건이 된다. 요즘 말이 많은 지방의 공공 의료 설치가 얼마나 중요하고 꼭 필요한 지 나만큼 잘 아는 사람이 있을까.
사실 젊어서는 병원이 그리 필요하지 않다. 건강보험 통계에도 보면 1년 내내 병원을 전혀 가지 않는 청장년들이 의외로 많다. 내 경우에도 그랬다. 거의 병원에 갈 일이 없었다. 건강 보험료는 월 수십만 원을 내는 데도 그건 당연했다. 그러나 노년이 되면 다녀야 할 병원 문제는 심각하다. 특히 근처에 대형 병원이 없는 경우 긴급한 사태에 적절히 조치하기가 힘들다는 건 누구나 인정하는 일이다. 나이가 들수록 주거 환경 필수 조건에 접근성이 쉬운 병원이 있어야 함은 분명하다.
아버지는 평소 입버릇처럼 이런 공치사를 자주 하셨다. 아버지의 결정으로 엄마가 공기 좋은 데 와서 그래도 그 나이까지 살 수 있었다는. 도시에 있었더라면 언제 돌아가실지도 모를 만큼 건강이 나쁘셨다는 뜻이다. 내가 보기엔 엄마가 아버지에게 맞춰 살아 주신 것 같은 데. 아버지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엄마가 처음 병원에 입원하신 것은 언제였을까?
어느 해 5월이었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해 입원했다는 아버지의 다급한 연락이 왔다. 지금 동수원 병원인 남양 들어가는 곳에 그 무렵 새로 생긴 나름 종합병원이었다. 수업을 하다 이게 무슨 소린가 싶어 혼비백산해 진원 아빠와 화성을 내려갔다. 엄마는 입원해 계셨다. 구포리 산 앞 39번 도로에서 사고를 당하셨다는 것이다. 엄마는 급정거하는 차에 떠밀려 붕 떠서 길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고 했다. 얼굴 여기저기 상처에다 차마 보기 힘들 정도로 멍이 들어 퉁퉁 부은 상태였다. 다행히 병원 관계자는 상처가 심하긴 해도 목숨에 지장은 없다고 하셨다. 엄마 얼굴만 봤을 때는 금방 돌아가시는 건 아닌지 걱정되어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였는데.
내 기억에 그즈음 남양으로 현대자동차연구소가 들어왔다. 꽤 큰 회사가 들어왔는데 도로 확충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퇴근 시간만이 아니더라도 구포리 산 앞 신작로엔 통행량이 장난 아니었다. 도대체 엄마는 왜 위험을 무릎 쓰고 그곳을 건너다 사고를 당하셨을까? 엄마는 부은 눈을 간신히 뜨고 어떻게 왔냐고 묻더니 더듬더듬 이야기하셨다. 안산에서 비봉 쪽으로는 도로가 막혀 있지 않았단다. 반대로 비봉에서 안산으로 가는 사거리 쪽은 심하게 막혀 있었다. 그건 아버지 이야기와도 일치했다. 사고를 낸 운전자는 주의 운전을 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조심조심 도로를 무단 횡단하던 엄마를 제대로 못 보고 사고를 낸 운전자의 잘못이었다. 국도는 시골 노인들의 통행이 잦은 데 그걸 무시하고 씽씽 달렸으니.
내가 물었다. 도대체 그렇게 차가 많은 데 왜 도로를 건넜느냐고. 엄마의 대답이 나를 더 놀라게 했다.
‘그날따라 이상하게 신작로 건너 논가에 있는 쑥이 더 탐스럽고 좋은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라고 말이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속으로 찔끔했다. 혹시 내가 쑥떡을 먹고 싶다는 소리를 해서인가 싶어서였다. 사실 나는 봄날 쑥이 들어간 쑥절편을 해마다 먹고 싶어 했다. 그래야 봄을 봄답게 보내는 느낌적인 느낌 때문이랄까? 이런 내 말에 엄마는 해마다 쑥을 뜯어 쑥떡을 해 주셨다. 떡을 좋아하는 건 아버지 유전이다. 할아버지의 호는 국보시다. 국을 좋아하셔서이다. 아버지의 호는 내 기억에 떡보였다. 어디를 가던 엄마는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떡을 확보하시기 위해 열심을 다하셨다. 우리와 평창에 놀러 갔을 때도 근처 떡집에서 파는 떡을 사 아버지 선물로 가져가실 정도였다. 아버지는 내가 아무리 졸라도 우리와 어디를 가려고 하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엄마는 혼자 놀러 온 것에 늘 미안해하시며 아버지를 위해 뭔가를 가져가고 싶어 하셨다.
어느 겨울 어디 수수엿 직접 만드는 집 없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돈을 주고라도 그 수수엿 좀 먹어보고 싶다고. 그랬더니 기어코 그런 집을 찾아 수수엿을 구해 주신 분이 엄마다. 아마 우리들은 모두 이 비슷한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자식들이 두서없이 해 본 말인데도 그걸 구하거나 직접 해 주시던 분이셨다.
더듬더듬 이어진 엄마의 말은 나를 더 놀라게 했다. 정후의 생일은 5월 8일 어버이날이다. 막내아들이 금쪽같이 아끼는 딸의 생일에 쑥떡을 해 주고 싶어서였다는 것이다. 예하 정후 진형이는 모두 같은 해 5월에 태어났다. 내가 그걸 잊을 리가 없었다. 내 마음이 얼마나 찡해졌는지 엄마에게 잔소리도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에 와서 정후가 할머니에게 미안해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할머니의 사랑이 얼마나 깊고 컸는지 그것만 알면 되지 않을까?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각인된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고난과 역경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다들 힘들게 그 시간의 강을 건넌다. 루비콘 강처럼 말이다. 그때 나를 사랑했던 사람들의 기억을 떠올리면 자존감이 바닥을 쳐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서 사랑받았던 기억이 그렇게 중요한 거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그럼에도 그걸 이기게 만든 많은 순간에 엄마가 계셨다. 그게 삶을 버티는 중요한 힘이었다.
엄마는 이 이야기도 하셨다. 그날 낮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방바닥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쑥 나오더니 엄마를 잡아가려 했다는 것이다. ‘악’ 소리를 내며 깨어나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드셨단다. 아직 몸은 떨리는데 신작로 건너 쑥을 뜯으러 가고 싶어 칼과 바구니를 들고 집을 나섰다. 이상하게 꼭 거기 쑥을 뜯어야 할 것 같아서였다고. 마침 산에서 일을 하고 계시던 아버지가 신작로로 내려가는 엄마를 보고 뭐 하러 그걸 뜯으러 거기까지 가냐며 잔소리를 하셨단다. 아버지는 엄마가 내려가신 지 얼마 되지 않아 ‘쿵’ 소리가 나길래 불길한 생각이 들어 뛰어 내려가셨다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차에 치어 쓰러져 있고 사람들이 차에서 내려 몰려들었다. 사고를 낸 운전자가 바로 가까운 병원으로 엄마를 옮겼다. 시간 지체가 많이 걸리지 않은 덕에 엄마는 목숨을 건지신 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버지는 평소 잘하는 소리로 ‘쓸데없는 짓을 하다’ 그렇게 다쳤다며 엄마를 나무라셨다. 얼굴을 심하게 다치셨어도 엄마는 레인지 로버와의 둔중한 부딪침을 이겨내고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셨다. 나는 가끔 엄마가 꾸셨다는 불길한 꿈 이야기를 떠올릴 때가 있다. 뭔가 불길한 징조를 그렇게 이해하신 엄마의 예지력에 놀라서다.
엄마의 위암을 발견한 건 아마 그다음 일인 것 같다. 위암 원인은 좀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엄마의 두통처럼 위암도 제기동 시절 수원 상회를 운영할 때가 출발점이다. 그 시절 엄마는 체력을 과하게 쓰셔야 했다. 장시간의 노동만 고된 것은 아니었다. 장사를 하시면서 틈틈이 식사를 하셔야 했는데 손님들은 엄마가 밥을 다 먹고 일어나도록 기다려주지 않았다. 언제나 손님이 먼저였다. 그러다 보니 항상 밥을 빨리 대충 먹어야 했다. 느긋하게 천천히 밥을 먹을 시간이 없었다. 엄마의 빨리 드시는 식습관은 그래서 생겼다. 위암 수술을 받고 몇 해 뒤였다. 엄마를 평창에 있는 한화콘도에 모시고 간 적이 있다. 조식 뷔페를 먹으러 갔는데 엄마가 얼마 후에 보이지 않아 찾아다녔더니 화장실에서 토하고 계셨다. 위 절제술을 받은 사람들은 천천히 오래 밥을 먹어야 한다. 그런데 급히 먹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신 탓에 거기서도 사달이 난 것이다.
나는 가끔 사람들에게 농담처럼 우리 엄마에게 가장 좋은 병원은 모두 딸네 집 근처에 있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병원을 모시고 다니다 보니 결국 우리 가족이 다니는 병원을 가야 했다. 늘 소화에 문제가 있다는 건 알았는데 그날은 의사 선생님이 위암 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면서. 엄마 세대는 우리처럼 건강 검진 대상자가 아니었다. 2년에 한 번 건강 검진을 해 사전에 뭘 발견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다 보니 어디가 아파도 그냥 그러려니 하며 살았다고나 해야 할까? 병의 발견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가 돼야 발견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동네 의원이라 엄마의 검진 결과는 아산병원에 보내 받아야 했다. 위내시경 소견에서 이상한 부분을 발견해 낸 이홍재 내과 의사는 얼마 후 결과를 알려주었다. 위암이시라 적어도 70% 정도 위를 절제해야 한다는 진단이었다. 놀란 가족들이 수소문을 시작했다. 엄마에게 물어보니 서울대병원에서 수술하고 싶다고 하셔서 결국 진원 아빠가 나섰다. 진원 아빠 고교 동기 중에 서울대 병원 다음 병원장으로 유력한 친구가 있었다. 저명한 법의학자 이교수다. 진원 아빠는 친구에게 당장 장모님이 입원할 병상과 의사를 확보해 달라고 부탁했다. 당시는 그런 게 가능했다. 엄마는 이교수 덕분에 오래 기다리지 않고 소개받은 교수님의 진료를 받아 바로 수술하셨다. 다행이 아닐 수 없었다.
혜화동은 당시 내가 근무하던 풍납 중학교와 거리가 꽤 멀었다. 결국 엄마와 관계되는 각종 업무는 모두 진원 아빠가 떠안았다. 내가 진원 아빠에게 고마워하는 이유에는 이런 것도 있다.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진원 아빠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어려움을 마다하지 않고 그런 일을 나서서 해 주는 게 아버지와의 차이점이기도 하다. 아버지에게 나는 가끔 엄마 문제로 섭섭함을 느낀 적이 있다. 자식은 1촌인데 부부는 무촌이다. 엄마에게 자식은 남편보다 멀어야 맞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순간에도 구포리 산에 더 집착하셨다. 엄마를 병원에 두시 고도 잘 보러 오시지 않으셨다. 병간호는 안 하시더라도 자주 오가시기라도 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수술 5년 뒤 엄마는 완쾌 판정을 받으셨다. 5년 동안 엄마는 일 년에 두 번 병원을 오가며 검진을 받으셔야 했다. 우리가 병원을 못 모시고 다닐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혼자 씩씩하게 구포리에서 혜화동 서울대 병원을 오가셨다.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서도 잘 다니신 것에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다행인 것은 엄마가 자신의 몸을 나름대로 돌보시는 분이었다는 점이다. 적어도 어디가 아프시거나 힘드시면 그걸 우리에게 알리시고 병원을 찾으셨다. 자기 몸만 아끼셨다는 소리가 아니다. 그런 의사 표현을 자식들에게 하셔서 다행이란 의미다. 부지불식 중에 부모를 여의는 경우들이 있다. 그런 경우는 부모님들이 자식들에게 아픈 곳을 숨기거나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하지 않아서가 대부분이다.
엄마는 통증에 민감하신 편이다. 아픈 데 민감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체질적으로 엄마는 통증에 민감한 타입이시다. 언젠가 외가 식구들이 엄마가 아프다는 어리광을 잘 부리는 편이라고 한 적이 있다. 아마 어린 시절부터 통증에 민감한 탓에 외가 식구들도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나 보다. 남보다 통증에 민감한 나도 어리광이 심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통증을 심하게 느껴서다. 그것도 유전일까?
하지만 질병으로 진짜 고생하셨던 건 무릎 관절 문제였다. 과체중 탓도 있지만 젊어서 몸을 너무 무리하게 쓴 탓에 관절에 심각한 문제가 생기셨다. 관절 통증은 심각하게 엄마를 괴롭혔다. 그것도 수술 한 번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나중에 한 번 더 수술을 하셔야 했다. 전혀 걸을 수 없는 상태가 되셔서 야. 무릎 관절 수술은 수술로 끝나지 않는다. 걸을 수 있기 위해 통증이 심한 재활 치료를 견뎌야 한다. 어느 날 정형외과로 엄마 면회를 갔더니 재활 치료실에서 엄청 아파하는 소리가 들렸다. 다리 꺾기라 부르는 그 재활 치료를 그래도 엄마는 무사히 버텨내셨다. 그리고 병원에 거의 업혀 들어가셨다 걸어서 나오셨다. 그 의사 역시 진원 아빠 친구의 도움을 받았다. 마침 그 의사는 독립을 해 우리 집에서 멀지 않은 성내동에 병원을 낸 상태였다. 그분 덕에 엄마는 두 번 다 걸을 수 있게 되셨다.
아버지도 굽은 허리 때문에 그분에게 진료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너무 늦게 병원에 온 탓에 허리의 원상 복귀가 힘들다는 진단이 나왔다. 아버지가 원하시는 운동 기구를 사 드려도 소용이 없었다. 통증을 덜어주는 약에 의존해야 했다. 구포리 산으로 이주해서 아버지가 노년에 얻은 것은 내가 보기에 심각한 허리 질환이다. 시골 할머니들이 늙으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이유도 우리 아버지와 비슷하다. 허리도 펴지 못하고 장시간 일을 한 탓이다.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허리도 펴지 못하고 산을 개간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 부조리에 대해 나는 지금도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허리가 굽어 남은 인생 동안 심각한 통증을 안고 사셔야 했던 우리 아버지. 청요리에서도 일어서실 때마다 힘들어하셨던 아버지 허리 통증이 지금도 마음을 아프게 한다.
그렇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게 된 직접 원인은 다른 데 있었다. 소화가 잘 안 되신다며 활명수를 매일 드시는 건 알고 있었다. 청요리에 이주하시면서 더 많이 드시는 것 같았다. 셋째가 각종 혈액 검사 결과 혈액이 부족하다고 하여 수혈까지 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수혈 시간의 지루함을 견디기 힘들어하셨다. 심지어 팔에 꽂혀 있는 수혈 선을 스스로 뽑아 버리시며 집에 가신다고 하실 정도였다. 위 내시경은 여러 번 했는데 문제는 대장내시경을 하지 않은 데 있었다. 결국 아버지는 그 문제로 세상을 버리셨다. 병원의 실수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배가 아프다고 하실 때 더 철저히 찾았어야 했는데. 요양병원에 가실 때는 이미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엄마는 백내장 수술도 하셨다. 마침 김안과에 진원 아빠 고교 동기가 있었다. 영등포에 있는 그 김안과에도 진원 아빠가 엄마를 모시고 간 적이 있다. 분명 화성에서 모시고 올라올 때는 눈이 안 보이신다며 거의 걷지도 못하셨다고 했다. 진료 후 보이는 건 별 문제가 없을 거라는 말을 듣고 엄마는 혼자 버스를 타고 구포리 산으로 돌아가셨다. 다만 백내장 수술은 하셔야 더 선명하게 보이실 거라고 해 김안과 의사 선생님 조언대로 우리 집에서 가까운 성내동 공안과에 접수를 해 수술을 받으셨다. 다행히 백내장보다 더 무섭다는 녹내장은 생기지 않은 터라 안경을 상시 쓰지 않으셔도 될 정도였다.
내가 굳이 가족 이야기에 이런 이야기를 기록하는 이유가 있다. 우리가 살아야 할 노후 30년 중에서 조심해야 할 가족력을 부모님에게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두통이 생기면 과거 엄마의 고생을 떠올리며 지레 겁부터 먹는다. 엄마의 두통은 원인불명이라기보다 스트레스로 인한 통증이었음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그 이야기가 나오면 하나같이 죄책감에 빠진다. 그 원인에 우리 중 누가 발뺌을 할 수 있는가?
2014년 2월 나는 34년을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 뒤로 2, 3년 동안 엄마는 가끔 병원을 가시기 위해 서울을 오가셨다. 비봉에서 버스를 타고 수원역 근처에서 잠실까지 오는 1007번을 갈아타셨다. 한의원이나 내과를 가시기 위해서였다. 그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롯데타워 건물이 완공되었다. 버스에서 내리는 엄마를 모시고 월드타워 여기저기 점심을 먹으러 다녔다. 그때만 해도 엄마는 혼자 서울을 오가실 수가 있었다. 그러나 점차 버스를 타거나 외출을 겁낼 정도로 단기 기억이 사라지셨다. 비봉에 그즈음 한마음 병원이 생겼다. 정말 다행이었다.
지금도 나는 어디선가 우연히라도 1007번 좌석버스를 보면 마음이 울적해진다.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가신 엄마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나 싶어 더 그런 마음이 드는 모양이다.
한편으로는 차는 없어도 병원을 함께 가 줄 딸이라도 있어 다행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엄마는 딸이 없는 나를 많이 걱정하셨다. 심지어 진형이를 낳는 날도 딸이 아니라며 서운해하실 정도였다. 지금 돌아보면 엄마의 병들이 나를 힘들고 지치게 했다는 생각을 내가 자주 했다는 사실에 많이 죄송하다. 그냥 노년에 더 잘해드리지 못하고 툭하면 나도 힘들다는 내색을 했으니 엄마 마음도 많이 괴롭지 않으셨을까?
주는 것에 익숙한 부모의 마음이 이제 더 다가오는 날. 가을이 하루 사이에 성큼 우리 곁에 와 있다. 하늘이 오늘따라 무척 맑다. 뭉게구름은 어린 시절 보던 바로 그 구름이다. 그래서인지 엄마의 환히 웃는 얼굴이 오늘 더 그리운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