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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가족이란 이름

 진원이가 태어나고 3년 후 진형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상당히 고민했다. 이미 화성으로 입주해 있던 아버지에게 엄마를 보내드려야 하는지 아니면 육아를 엄마에게 맡겨야 하는지 선택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진형이를 낳고 휴직을 결심한 데는 이유가 있다. 엄마의 꿈을 포기하게 만들면 안 된다는 마음이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엄마의 꿈은 꽃과 새를 기르며 노년을 보내시는 것이었다. 당시 엄마는 오 남매의 학비 조달에 건강이 심각하게 망가져 더 이상 버티기 힘든 상태셨다. 아버지가 보셔도 얼마 살기 힘들다고 느끼셨을 정도였단다. 그런 엄마에게 다시 노년 육아의 덫을 씌우는 건 너무 잔인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로 마음 깊은 곳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의 노후를 지켜본 후유증도 컸다. 두 분의 노후 그 뒷바라지 감수가 보통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이기적인 내 입장에서 부모님의 노후를 책임져야 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은 것도 있었다.

 휴직 2년 만에 내가 워킹 맘으로 돌아가야 했던 가장 큰 이유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복직하자마자 아이들을 데리고 영화 ‘기생충’에 나오는 방보다 더 좁은 반 지하 방으로 이사했다. 학교 근처에 이런 집이라도 구한 이유가 있다. 적어도 아이들 근처에 있어야 출퇴근 시간이라도 절약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 근처로의 이사는 나로서도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학생들과 학부모들이 우글거리는 곳으로 어린 아들들을 데리고 오가야 하는 일이었다. 사생활이 보호되지 않는 데다 넉넉지 않은 형편을 알리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주변에 알리게 되니 말이다. 

둘째 아들 진형 - 이렇게 자라 촬영 감독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구포리 산으로 완전히 이주하신 엄마는 그래도 가끔은 내 호출에 수시로 먼 길을 오가셨다. 버스와 지하철을 여러 번 갈아타시면서도 불평 한마디 없으셨다. 

 어느 날 밤이었다. 나는 쌀이 떨어진다는 의미를 생각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쌀과 함께 생필품들이 줄줄이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절감하며 내일은 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한 기분에 잠을 못 이루고 있었다. 진원 아빠는 운영하던 회사에 경제적인 문제가 생겨 입건되었다. 그것도 후배에 의해서였다. 당연히 집에 돌아오지 못했다. 

 그 늦은 밤 반 지하 우리 셋방의 문을 엄마가 두드리셨다. 머리에는 쌀자루를 이고 계셨다. 문을 열자 제법 찬바람이 밀려들었다. 쌀자루를 이고 그 먼 길을 오신 엄마 때문인지 바닥을 치던 내 마음에 따뜻함이 밀려들었다. 눈물이 핑 돌았다. 철이 든 순간부터 나는 엄마에게 아프다는 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런 소리가 엄마를 얼마나 괴롭히고 걱정하게 만드는지 알았기 때문이다. 그날도 뭐 하러 힘든 데 그 무거운 걸 이고 여길 왔냐고 마음에도 없는 흰소리를 했다.

 그 밤 우리 집에 오신 엄마의 말은 그랬다. 큰오빠가 우리 집에 가 보라고 했다고. 그리고 돈을 보냈으니 당장 필요한 곳에 보태 쓰게 전해달라고. 엄마가 들고 오신 그 돈이 얼마였는지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기억나는 건 그 돈이 나에게 정말 절실했다는 것이다. 당장 내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할 때 가족이 왜 힘이 되는지 저절로 알게 된 일이기도 했다. 

 맏아들로서 큰오빠가 부모님에 더해 동생들까지 보살폈던 수많은 일들을 나는 다 모른다. 그 부분에 큰오빠는 조금이라도 자신이 한 일에 대해 동생들에게 떠벌리거나 생색을 낸 적이 없어서다. 그냥 동생들까지 숙명적으로 보살폈을 뿐이다. 나는 동생들이 큰오빠의 그런 마음을 잘 알고 있다고 믿는다. 그 밤 오빠의 심부름이라며 먼 길을 무거운 쌀자루를 이고 오신 엄마의 출현은 나에게 정말 의미가 있었다. 내게 억지로라도 살아갈 용기를 내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식구는 그 반 지하 방을 거의 4년 만에 떠났다. 지상 1층 빌라에 1년 정도 전세를 살다 정말 운이 좋게 지금 집으로 이사 왔다. 나는 집과 관련해서 지금 집 이상으로 욕심을 낸 적이 없다. 내가 집으로 얻을 수 있는 모든 운을 이 집에 썼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사이 내가 이 집을 지키기 위해 했던 노력은 말로 다 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다행히 논술이 필요한 시절이 왔다. 그 분야에서 내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탁월했음은 곧 증명되었다. 논술은 내게 기회를 허락했다. 각종 이자로 월급이 다 들어가고 남은 게 없어 또 빚을 계속 얻어야 하는 형편을 막을 수 있게 만들었다. 당시 나는 웃어가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 능력 발굴은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얻은 거나 마찬가지라.'라고 

 나는 지금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가정 형편이 좋았다면 나는 몰랐을 것이다. 남보다 논술 첨삭 지도에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능력이 있었는지 어찌 알았을까. 논술은 내 인생의 터닝 포인트였다. 그때까지 쉬지 않고 읽어 왔던 다양한 독서가 배경 지식으로 넉넉히 활용되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운영한 성동 논술 중심학교는 서울시교육청에서 1년 만에 성과로 주목받는 연구학교가 되었다. 우리나라는 성과 위주다. 서울시 11개 교육청에서 운영하는 각종 연구학교 중 독보적인 성과를 낸 덕에 성동교육청까지 갑자기 논술로 주목받게 되었다. 서울시 논술대회 입상자 60명 중 성동교육청은 대상부터 휩쓸어가며 38명이 대거 입상하기도 했다. 입상한 학생들은 외고 입시에서 가산점을 받고 쉽게 원하는 고등학교에 갔다. 당연히 논술 중심학교 학생을 늘려달라는 학부모들의 전화가 교육청에 수시로 걸려왔다. 강남이나 목동의 학원에서도 못하는 일을 학교에서 했으니 소문이 날 만했다. 당연히 꿀맛 논술 사이트에 내게 논술지도를 청하는 학생들의 숫자도 나날이 늘어갔다. 매일 퇴근하고 돌아오면 밤마다 그 지도를 하는 게 또 다른 업무였다. 아무리 지도 건당으로 돈을 받기는 했지만 건강엔 무리가 된 게 사실이다. 

 그리고 기회가 기회를 데려왔다. 학생만 가르친 게 아니었다. 수입이 더 많은 교사 연수와 교과서 집필 등 교직 생활 후반기 토론과 논술 교사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고 용돈을 줘 가면서도 집을 날리지 않을 수입은 그렇게 얻었다. 이 모든 과정에 내게 도움을 가장 많이 준 사람은 누구일까. 진원 아빠와 두 아들이었다. 모두 내가 밖에서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던 지지하고 격려해 주고 살림살이에 도움을 주었다. 가족들의 지지가 없었다면 나는 막중한 책임을 지는 그 일들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이 집에 들어와 산 지 17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베트남에 사는 여경이에게 연락이 왔다. 곧 태어나야 하는 딸 한나 문제였다. 한나를 아산병원에서 꼭 낳아야 하는 사정에 대해 들었다. 우리 집에 빈방이 있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난 당장 오라고 했다. 안방을 내줄 테니 와서 지내도 된다고. 큰오빠가 나를 도울 때도 여유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공주에 18평짜리 주공아파트에서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다. 그래도 틈틈이 어려운 동생들 형편을 돌아보았다. 

 내가 어려울 때 미리 짐작해 몇 번이나 손을 내밀어 준 큰오빠에게 난 조금도 갚고 살지 못했다. 이 기회에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고 싶었다. 우리 식구들에게 불편하지만 함께 지내자고 이야기하자 모두 알겠다고 했다. 특히 진원 아빠는 뭐라도 돕고 싶다며 적극적이었다. 나는 한나가 너무 예쁘다. 인하와 둘이 수다를 떤 적이 있다. 왜 한나에게 그렇게 정이 가고 예쁜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다며. 나 인하 한나로 이어지는 가족의 계보가 있다. 3대로 이어지는 장남들의 유일한 딸이라는 그 계보. 어떻게 안 예쁠 수 있을까. 아픈 한나를 보는 게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이제는 더 잘 알 것 같다. 그렇게 한나도 우리 가족이 되었다. 

3대째 맏아들의  고명딸 한나 - 아기 선녀 같다

 인생유전이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의 삶에는 당연히 굴곡도 있고 변곡점도 있다. 엄마 아버지를 돌보는 문제에 내가 나름 열심을 다하려고 한 이유도 분명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늘 손을 내밀던 분들에 대한 보답이다. 육십이 넘어서도 부모 돌보기가 끝나지 않았다고 수시로 툴툴거렸지만. 

 그분들의 시간을 돌아보면 우리 자식들은 하나같이 걱정덩어리였다. 이만하면 내가 잘 살고 있어 부모 걱정 안 시킨다고 자신만만하게 굴었지만 어불성설이다. 그런 분들에게 구포리 산이나 청요리 오가기가 힘들다고 어찌 안 가 볼 수 있을까.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기는 한 걸까? 

 아버지 돌아가시기 얼마 전 4월이었다. 꿈에 엄마가 우리 집으로 오고 계셨다. 여름이면 늘 입으시던 하늘색 블라우스를 입고 계셨다. 그 옷은 생전에 즐겨 입으셨던 탓에 내 기억에 많이 낡았었다. 여기저기 얼룩덜룩했다. 꿈속에서 그 옷은 깨끗한 새 옷이 되어 있었다. 방이 초등학교 골목길을 따라 우리 집으로 향하시던 엄마를 보며 왜 그렇게 서럽게 울어댔는지 모른다. 잠이 깼는데도 엄마를 부르며 흑흑거리던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어떤 감이 왔다. 아! 엄마가 아버지를 데리러 오셨구나. 그냥 직감이었다. 엄마가 혼자 청요리로 이주하신 아버지를 얼마나 걱정하셨을지. 무엇보다 아버지 돌봄의 힘겨움을 자식들이 얼마나 힘들게 버티고 있는지 엄마가 알고 계셨을 거라 생각했다. 자식들 힘들까 봐 생전에도 전전긍긍하셨던 분이셨음을 우리 오 남매는 모두 알고 있다. 그분의 손에서 자랄 수 있었기에 오늘날 이렇게 사람 구실하고 자식 키우며 살 수 있었는데 모를 리 없다. 

 막내가 보내주는 구포리 산의 사진들은 그 산에 남은 생을 쏟으신 아버지를 더 생각나게 한다. 아버지 이름은 윤택이었으나 신은 아버지에게 평생 넉넉한 경제력을 허락하지 않으셨다. 무엇보다 아버지의 말년을 생각하면 우리 오 남매의 눈시울은 금방 붉어진다. 삶이 참으로 무상하구나 싶을 정도로. 

 아버지의 노력이,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진 구포리 산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엄마는 생전에 자주 ‘올려다보니 절터’라는 속담을 인용하셨다. 눈에 보일 만큼 빤한 나쁜 결과를 빗댄 표현이다. 노력이 모두 보상받는 건 아니구나 하는 걸 결과를 통해 어쩔 수 없이 알았던 게 바로 우리 아버지의 경우다. 

 그러나, 아버지의 인생이 모두 실패였을까? 아버지는 누구보다 존경하는 할아버지 아래서 자라셨다. 남들보다 노력해서 좋은 학벌도 가지셨다. 고생은 하셨지만 학비 보조 하나 없는 시절에도 오 남매 모두 대학을 보내셨다. 자식들은 남들에게 나름 존경받는 위치에서 성실하게 열심히 살고 있다. 재물 운이 끝까지 따르지 않았다고 삶의 전부가 비극은 아니다. 자식들은 아버지가 하고 싶다고 하신 일을 끝까지 방해하지 않았다. 그게 옳은 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도 아버지의 삶이기에 인정했다. 아버지의 것이라고 인정해서 아버지 판단대로 하시라고 뒤로 물러서서 지켜만 봤다. 그런 자식들도 많지 않다. 많거나 적거나 부모의 재물로 다투는 자식들이 내 주변에도 부지기수다. 나름 형제간의 우애를 줄기차게 강조해서 키운 아버지의 소원을 자식들이 이루어 드린 게 아닐까. 적어도 아버지 앞에서 얼마 되지 않는 돈을 가지고 다투거나 싸우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으니. 내가 보기에 우리 엄마 아버지는 그만하면 성공한 인생을 사신 게 아닐까.

 가족이란 무엇일까? 최근 내 마음에 훅 들어온 글귀가 있었다.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을 읽다 보니 거기에 이런 말이 있었다.

 - 인간은 영원으로부터 와서 유한을 살다 영원으로 돌아가는 존재다. -

 그 유한한 인생에서 가족으로 만나는 인연은 얼마나 신비로운가. 운이 있다면 우리가 가족으로 만나 이렇게 저렇게 살아온 과정 모두에서 찾을 수 있다. 아, 내가 이 가족이 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운이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밤이다. 

 가을이 여물어간다. 밤마다 울어대는 벌레 소리가 밤이 깊어갈수록 점점 활기차게 들려온다. 벌레 소리에 가을이 담겨 있다. 그런 밤에 홀로 가족이 되어가는 과정을, 의미를 생각해 본다. 아직 내 생애 남은 행복이 많이 있겠구나 생각하니 삶이 유한해도 여한은 없겠다는 마음이 저절로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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