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친구들과 약속을 했다. 올림픽 공원 장미원에 장미가 피기 시작하니 구경하러 오라고.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방역으로 넘어간 시점이었다. 낯설다면 낯선 이 말들이 어느새 낯익은 언어가 되었다. 그래도 이제는 자발적인 거리 두기를 마치고 친구들과 따뜻한 차라도 마시며 밀린 수다를 풀어놓고 싶었다.
인류가 집단생활을 하기 시작한 뒤부터 얼마나 많은 세균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는가? 세균에 대해 문외한인 나는 전혀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코로나 19라는 세균만큼 인류의 생활 패턴을 완전히 바꿔 놓은 것이 있을까? 세상은 코로나 19가 나오기 전과 후의 생활로 완전히 달라졌다는 걸 이제는 나도 확실히 깨달았다.
3개월 가까이 친구들까지 거리두기를 하다 공원을 사이에 두고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아도 되는 친구들에게 먼저 연락을 했다. 그러나, 장미원 만남 전 날 밤. 갑자기 컨디션이 이상했다. 감기 기운처럼 목이 칼칼해지더니 가끔 재채기인지 기침인지 알 수 없는 증상이 나타났다. 물론 김치를 한다고 시장에, 마트까지 다니며 무리한 건 맞다. 우리 엄마는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한다는 말로 어릴 때부터 나를 조련하셨다고 앞에서도 말한 적이 있다. 열등감이 전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여전히 살림에 서툴고 두서가 없다. 그날 무리한 이유도 김치의 필수 재료를 빼먹었거나 부족하게 사서 시장을 두 번이나 왕복한 탓이었다.
미열이나 두통은 없다 하더라도 의심 증상이 생긴 건 확실했다. 긴장했다. 걱정은 무한대로 뻗어갔다. 인터넷을 뒤져 의심 증상을 찾아 하나하나 들여다봤다. 심지어 후각이 정상인지 확인하기 위해 집안 곳곳을 다니며 냄새를 맡고 돌아다녔다. 냄새 맡기는 정상인데 행여나 맛을 느끼지 못하는 문제는 없나 싶어 배가 고프지 않은 데도 이것저것 먹어봤다. 평생 살 빼는 데 안 해 본 노력이 없는 나다. 그런데 식욕이 왕성한 걸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날이 오다니! 정말 별일이다. 헛웃음이 났다. 이번에는 송파 구청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폭풍 검색을 해서 혹시 내가 잘 모르는 확진자 그 누구와 동선이 겹치는 일은 없는지 샅샅이 살폈다. 다행이었다. 시장이나 마트는 가도 음식점을 가거나 대중교통이나 다중시설을 이용한 적이 없으니. 정확히는 걸어 다닐 수 있는 곳만 갔다.
그래도 혹시 몰라 단톡방에 내 컨디션 증상을 밝히고 내일 만나도 될지 물었다. 고위험군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물론 고혈압이 있는 나도 고위험군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좀 우습지만. 친구들과는 약속을 한 주 미루기로 했다. 하지만 집콕 생활을 견디지 못한 친구가 다음 날 장미원으로 날아왔다. 그리고 아직 다 피지 않은 장미라도 즐겁게 구경하고 돌아갔다.
다시 며칠 전의 일이다. 갑자기 목이 답답하고 코가 마르면서 두통 증상까지 생겼다. 여느 해 같았다면 통과의례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5월에는 진형이의 생일이 있다. 생전에 엄마는 애를 낳은 달이면 몸이 좋지 않다고 하셨다. 대가족의 맏며느리로 출산을 하고도 제대로 쉬지 못해 그런 게 아닌가 싶다. 출산한 달의 후유증 같은 증상이 나타난 걸 느낀 것은 내가 40대를 지나면 서다. 어느 날부터 몸이 붓는 느낌이 나고 유달리 힘에 겹다고 생각되면 5월이나 7월이었다. 여름이 닥치기 전부터 건강에 이상을 느끼면 그때서야 깨닫는 것이다. 올해는 좀 나으려니 했다. 봄 내내 당뇨 걱정으로 과도할 정도의 걷기 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혈액 검사 결과 수치는 갈수록 나빠졌다. 당뇨 약을 먹느냐 안 먹느냐? 결국 운동량을 늘렸다. 먹는 걸 줄이는 게 쉽지 않으니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덕분에 늦겨울부터 일상적으로 앓아오던 봄 감기에서는 너끈히 벗어났다. 놓여났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지도. 심지어 진형이 생일날 올해는 안 아프고 잘 지나간다며 흰소리까지 했다. 그러나 다음 날부터 조금씩 컨디션이 나빠지더니 부기가 빠지지 않았다. 한 번에 해치운다고 김치에 오이지와 양파 장아찌를 한 게 문제였다. 그로기 상태가 되어 의자에 앉았다. 쉬려고 앉아서도 습관적으로 컴퓨터를 켰다. 확진자가 늘어 내일부터 수도권은 다시 모임을 자제하고 다중이용 시설은 문을 닫는다는 발표가 있었다. 시간은 4시. 지난 2월 어느 날. 도서관이 예고도 없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3개월이 지나서야 문을 열었다. 책을 빌릴 수가 없자 내 뇌는 퇴보를 거듭하는 느낌이었다. 일상적으로 쓰던 단어도 잘 떠오르지 않아 치매의 전조증상일까 봐 걱정될 정도였다. 아무리 2주간이라도 일단 대출을 해 와야 했다. 무거운 몸을 벌떡 일으켜 도서관으로 직행했다. 6시면 문을 닫으니 거의 뛰어갔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가볍게 읽을 소설 3권을 대출했다. 사서들도 내일부터 문을 닫아야 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두꺼운 무게감의 책을 들고 터덜터덜 돌아왔다. 이게 사단의 원인이라면 원인이었을 지도.
평년이라면 통과의례처럼 몸이 좀 힘들다 정도로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코로나는 질병관리본부장 말대로 아주 나쁜 바이러스다. 코로나 19의 심각성은 생각보다 사람의 마음 중심을 강타하는 속성까지 있다. 자신도 모르게 컨디션이 나쁘면 각종 망상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하게 되는 속성 말이다. 망상은 거의 확신이 되어 내 생활과 생각을 지배한다. 밤에는 자다 깨다를 반복했다. 아직도 목이 칼칼한지 코로 숨을 쉬는 건 문제가 없는지 두통은 완전히 가셨는지 살피기 위해. 내가 확진되었을 때 주변 사람들에게 끼칠지도 모를 민폐를 생각하니 전전반측할 정도로 아찔한 생각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았다. 나만 그런 생각을 하나? 번민이 번민을 낳는 밤이었다.
내 생활은 평소라면 그냥 주부의 일상이다. 외출이라야 시장이나 마트를 가 집안에 필요한 물건을 들여와 채우고 먹거리를 사 오는 등 그냥 그렇다. 걷기를 위해 공원을 가도 누구를 만나 대화를 하지 않는다. 일기에는 그날그날의 동선도 매일 기록 중이다. 동선을 기록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정확한 동선을 미리 알려 감염 고리를 차단하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이런 댓글을 좀 피하고 싶어서다. 이 코로나 시기(엄중하므로 집콕을 해야 함에도)에 엄청 싸돌아다녔다는 비난 댓글. 특히 개념이 없는 사람 취급을 당하는 건 아닐까 싶어서.
나만은 아닐 거다. 특히 호흡기 관련된 건강 문제가 생겼을 경우 누가 자유로울 수 있는가? 지금 이 시국에. 마음은 갈등의 늪에서 허우적거린다. 왜 안 해도 되는 일을 몰아서 했냐는 후회가 밀어닥쳤다. 오늘은 김치, 내일은 오이지. 모레는 순차적으로 양파 장아찌를 해도 우리 집 식단이 피폐한 수준인 건 마찬가지인데. 갑자기 식단이 화려해지는 일은 절대 없을 텐데. 미각이나 후각의 소실이 없는 건 맞지만 아직까지 몸의 부기는 빠지지 않았다. 조금 걸으면 이르게 찾아온 더위 탓인지 몸의 열기 덕인지 땀이 몽글몽글 솟아난다. 분명히 전자겠지만 미열이 아닌지 슬쩍 겁이 난다.
누굴 만나는 데 마음의 준비만이 아니라 건강까지 준비되어야 하는 시대가 왔다. 빚쟁이를 만나는 것도 아닌 데 마음과 건강의 준비라니???
제법 긴 시간을 학교 선생님으로 살다 보니 댓글 중에 가장 마음에 걸리는 건 이런 거다.
‘이 시국에 어디를 그렇게 싸돌아 다녔냐? 제발 애들 학교 좀 가자. 우린 발 없어서 안 다닌 줄 아냐? 생각들이 있는 거냐 없는 거냐?’
내가 학교에 근무하는 수십 년 동안 감염병의 염려로 학교 문을 닫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코로나 19를 겪다 보니 앞으로 우리가 살아야 할 세상이 작금의 현실과 다르지 않을 거라는 암담한 예상이 든다.
지난주 아산병원 정형외과에 진료를 받으러 갔다. 입구에서 마스크 착용과 발열 체크만이 아니라 손 소독제도 발라야 했다. 진료실 앞에 서니 담당 간호사가 다가와 코팅된 A4 용지를 보여준다. 종류도 다양한 곳을 한 번도 간 적이 없다는 확답을 받고서야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평소 호흡기가 약한 친구는 대형병원 진료를 받기 위해 문제 발생 시 1000만 원 벌금도 감수하겠다는 서약서에 서명을 했다더니.
과거 어른들이 잘 쓰시던 말이 있다. 지금은 세월이 달라졌다고. 낙담과 포기가 담긴 말이라 하더라도 그 속에 담긴 인정에는 삶의 연륜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 우리 엄마 역시 이 말을 자주 하셨다. 엄마는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하다며 젊은 사람 못지않게 배우기를 즐기셨다. 그렇게 배운 것을 자녀들과의 관계에도 자주 응용하셨다. 나는 그런 엄마에게 감탄한 적이 많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언제 가장 아쉬웠을까? 살림살이의 소소한 부분에 대한 조언이 아쉬웠다. 노년 치매로 현재의 단기 기억은 못하셔도 이상하게 과거 경험치에 대한 기억은 오롯이 남아 계셨다. 과거 기억들은 또렷하셨던 것이다. 앞으로 내가 살아갈 시간이야말로 엄마의 노년의 시간과 일치한다. 가끔 엄마가 보내신 노년만큼 나도 적극적으로 살 수 있을까 자신에게 물어보게 된다. 이런 시기를 엄마는 어떻게 품평하셨을까? 누구보다 활달한 성품이셔서 봄이나 가을이면 전국 각지를 즐겁게 다니셨는데.
코로나로 동네 중심의 생활을 체험했다. 루틴 한 생활은 뇌 활동도 루틴 하게 만든다는 이론이 있다. 치매의 확률이 높아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지금은 어디 가는 걸 망설인다. 특히 걸어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니라면 더 망설인다. 마스크를 안 쓰면 밖에 나가기가 꺼려진다.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을 길에서 만나면 잠재적인 위험군으로 머리가 바로 판단해 그를 피해 더 멀리 돌아간다. 이런 일상을 언제 살아 봤는가? 나의 필요에 의한 착용이 아니다. 혹시라도 걸렸을지 모를 나의 잠재적인 상태로 타인을 괴롭게 할지 모른다는 고민을 다수가 하는 시대. 그게 지금의 상황이다.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분다. 하늘은 드물게 맑다. 쉬어야겠다. 코로나로 인해 스스로 불러들인 불안과 공포는 잠시 접어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