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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시장에서 채소를 파는 상인으로

      

 삶을 강물에 빗대는 사람들이 있다. 흘러간다는 의미겠지. 그것도 쉴 새 없이. 아버지 역시 그 흐름에 맞춰 자신을 다독이셨을 터다. 맞지 않는 옷을 입기 시작한 시간은 6.25 전쟁 이후 20대부터였다.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어 아마 할 수 있는 온갖 노력을 다해 보셨을 것이다. 노력이 무용지물임을 깨닫고 이것저것 포기해야 하는 아버지의 시간이 얼마나 힘드셨을지 이제는 조금씩 가슴으로 스며 들어온다. 

 그 사이 우리들은 쑥쑥 자랐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아버지의 자식 교육에 대한 관심은 제기시장 이전과 이후로 현저히 달라진다. 제기동 시절 아버지 일과는 새벽에 일어나 큰 시장에서 물건을 해 와야 하니 새벽 5시 무렵이었다. 장사를 마치고 정리한 다음 집에 귀가하는 시간은 밤 10시나 되어서였다. 아니 넘어서였다. 사실 두 분은 거의 제기 시장 수원 상회에서 먹고 자며 돈을 벌어야 했다. 주말도 없었다. 시장을 벗어나기 힘든 일상이었다. 고된 노동으로 가족의 생계와 오 남매의 학비를 벌기 위한 돈벌이에 나설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몇 살이 되면 자신이 어렸을 때부터 가졌던 꿈이나 이상을 현실과 맞바꿀까? 나는 엄마가 제기시장에서 힘든 일상을 사시며 늘 되뇌었던 꿈을 들어서 알고 있다. 악바리 같이 살아야 하는 시장 생활에서 엄마가 자주 입버릇처럼 하셨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고향으로 돌아가 꽃과 새를 기르며 살고 싶다고. 

 나는 오랫동안 제기동 생활을 엄마 중심으로만 생각해 왔다. 그러나 가족 이야기를 쓰다 보니 탄식이 터져 나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제기동 집으로 모신 다음 두 분의 여생을 돌아보면서도 놀랐다. 오랜 시간 내가 많은 걸 놓쳤구나 하는 생각도 그때서야 들었다. 조부모님 두 분은 화성을 떠나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실 수 없었다. 전혀 알지 못하던 곳으로의 이주였다. 그것도 다 늙어서. 단지 가족들이 이곳에 있으니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게 엄마나 아버지에게는 마지막 부양 의무를 다하는 효도였다. 하지만 두 분의 말년은 어떠셨는가? 그냥 낯선 곳에서의 답답한 생활이었다. 말동무할 친구 하나, 아는 분하나 없이. 그게 얼마나 외로운 일상이었을지 우리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두 분은 서울에서 말동무가 될 만한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기엔 너무 늙으셨다. 거동은 불편했다. 무엇보다 사람들은 좁은 공간에서도 타인을 경계하며 문을 닫고 살았다. 다들 먹고살기 바빠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몰랐다. 우리들은 모두 한창 학교를 다녀야 하는 처지였다. 한 집에 같이 살기만 했지 두 분에 대한 돌봄에 우리 부모님도 손을 대기 힘든 형편이었다. 조부모님을 살피기에 두 분도 너무 지쳐 계셨다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아침에 우르르 몰려 나갔다 저녁이면 다들 지쳐 돌아왔다. 게다가 집안일까지 도와야 했다. 하루 종일 집에 계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넬 형편이 될 리 없었다. 그냥 밥이나 드셨는지 살피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고 나 할까? 그것도 그나마 큰오빠가 챙긴 거나 다름없었다. 두 분이 긴긴 낮 동안 무얼 하며 지내시는지 관심도 없었다. 아버지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돌아가신 다음에야 고향에 가셨으니 두 분의 여생도 얼마나 힘드셨을까 싶다. 그런 생각이 이제야 들다니! 철이 너무 늦게 든 것 같다.

 아버지 역시 꿈과 이상을 모두 접어두고 정신없는 10년을 시장에서 보내셨다. 이 시기 아버지에게 가장 괴로운 일은 무엇이었을까? 두 분을 돕기 위해 우리들은 학교에서 돌아오면 종종 시간을 나눠 배달이나 가사를 도운 일에 대해서는 앞에서도 자세히 이야기했다. 어찌 되었건 자식들은 실패나 어려움이 있더라도 잘 극복하며 자라고 있었다. 제기시장 내에서 아버지의 자식들만큼 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내는 경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달에 한 번 여지없이 어색한 얼굴로 아버지를 찾아오는 존재들이 있었다. 형사나 파출소 순경들이었다. 요 관찰 대상자인 아버지는 그들에게 여전히 부역자였다. 한 달에 한 번! 과거 단 3개월의 실수를 되새기게 해 주는 일이 그들이 맡은 임무였다. 그들은 과연 그 일의 잔인함을 알고 했을까? 

 제기시장에서 상인으로 산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 지금도 갑을 관계에 대해 사람들 인식은 크게 달라지지 않고 있다. 내가 모르는 게 경제뿐이랴만은 그래도 아는 게 있다. 시장에서 수요자와 공급자 중에 갑이 누구인지를 말이다. 상인들은 공급자다. 무엇보다 경쟁 대상이 많다. 당연히 수요자들이 갑이다. 사람들은 채소를 고르러 가도 등급을 매긴다. 보기에 좋은 것이 그중 하나의 판단 기준이다. 이게 아버지의 가장 큰 문제였다. 아버지는 생산을 직접 하신 분이다. 직접 무엇을 길러 본 사람들은 먹을 수 있으면 겉보기에 비루해 보여도 먹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자가 부족한 시대에 자라셨으니 더하셨을 거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쩌다 밥풀을 흘리면 쌀이 우리 입으로 들어오기까지 농부의 헌신과 노력이 얼마나 컸는지 훈계를 들어야 했다. 쌀 한 톨은 농부가 88번이나 허리를 굽혀야 생산될 수 있다고. 우리는 흘린 밥알을 다 주워 먹어야 했다. 이게 농부의 관점이다. 기른 사람의 수고를 먼저 고려하다 보니 채소도 보기 좋아야 잘 팔린다는 사실을 아버지는 납득하기 어려워하셨다. 장사꾼은 당연히 보기 좋지 않은 부위를 미리 다듬어서 모양 좋게 내놓아야 하는 게 맞는다. 그러나 아버지는 장사꾼의 이런 기초적인 상식을 이해하지 않으셨다. 아니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아버지의 고지식함은 엄마와 장사를 하시면서 자주 부딪치는 문제였다. 심지어 중고생인 자식들도 아는 기본을 아버지는 고집스럽게 우기셨다. 덕분에 채소를 다듬다 그걸 돕는 아들들과도 충돌이 있었다. 더 다듬어 내놓으면 잘 팔릴 거라는 자식의 권유를 듣지 않으신 것이다. 결국 채소들은 심하게 상한 뒤에야 쓰레기로 버려졌다. 

 제기시장에서 채소 장사를 하실 때도 사람들은 아버지가 파시려는 채소를 좋아하지 않았다. 엄마의 채소를 좋아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심지어 엄마가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은 다른 곳을 다니다 돌아왔다. 엄마를 봐야 하나라도 저렴하면서도 좋은 물건을 제값을 주고 산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엄마는 상품 가치가 적은 물건을 덤으로 주는 데도 거리낌이 없으셨다. 그렇게 잡은 단골들은 엄마의 야채를 사기 위해 사실 줄을 선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채소는 쓰레기가 많이 나온다. 우리 가게는 그걸 처리하기에 용이한 장소에 있었다. 더구나 시장 초입이라 나름 입지 조건도 나쁘지 않았다. 우리 가게 자리 주변은 사람들이 다니는 통로라 가게 물건을 진열하는 데도 공간 확보에 유리했다. 아직도 시장 입구 가게에서 배추나 무 등을 다듬으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손을 잡힐 듯 기억난다. 전쟁으로 빛나는 미래를 잃고 그 좋은 학벌에도 시장 바닥에서 채소를 팔며 을로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의 심정도 이제는 조금씩 손에 잡힌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자식들을 위해 아버지가 하신 세상과의 타협은 거기까지였다는 점이다. 고지식함은 넘사벽이었다. 공부는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결과가 어느 정도 보장된다. 그러나 사회생활도 그럴까? 학교에서 공부로 높은 성과를 내던 사람들이 사회생활에서도 그럴까? 모두는 아니다. 바닥을 기던 친구들의 부하 직원으로 들어가야 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걸 나는 ‘눈치’라며 제자들을 구박했다. ‘머리가 나쁜 건 용서가 되지만 눈치가 없으면 답이 없다.’고 말이다.

 아버지는 소신이 너무 확고해서 문제였다. 일단 옳다고 생각하면 누구도 이길 수 없었다. 화성에 돌아오셔서 밤을 길러서 파실 때도 마찬가지였다. 밤은 아버지 말대로 약밤에 맛이 특별히 좋았다. 어디서 그런 밤 맛을 찾기 힘든 건 사실이었다. 남양 장에 그것을 직접 팔러 다니실 때였다. 아버지의 물건을 실어다 드리기 위해 시장을 오가던 진원 아빠는 고개를 여러 번 절레절레 흔들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사는 사람들이 기대치가 무엇인지 아버지는 나이가 그렇게 들어서도 여전히 모르시는 것 같았다. 시장에 물건을 사러 오는 사람들은 좋은 물건을 싸게 사기 위해 온다는 아주 단순한 걸 말이다. 

 아버지가 시장으로 가져가신 물건은 처음에는 좋은 품질이 분명했다. 당연히 팔 사람인 아버지가 가격을 결정한다. 그 가격이 너무 높다는 게 아버지 물건의 함정이었다. 물건을 알아보고 살 사람도 아버지의 밤이 너무 높은 가격이라는 건 금방 알아챘다. 문제는 흥정의 여지도 안 주신다는 데 있다. 그렇다 보니 물건은 잘 팔리지 않았다. 밤도 생물이니 날이 갈수록 품질이 떨어지고 썩어간다. 그렇게 쌓인 밤을 우리에게 줄 때도 있었다. 당연히 진원 아빠는 아버지의 그런 문제를 자주 지적질했다. 하지만 그건 고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농사일이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지만 힘들게 기른 물건도 팔리는 시기가 있다는 건 잘 모르셨다니??? 순진함도 병이 되는 걸 우리는 사실 아버지의 평생에 걸쳐 지켜봐야 했다.

 제기 시장에서 두 분이 장사를 하실 때 다행이었던 것은 무엇일까? 엄마와 아버지는 기초 체력이 좋으셨다. 손님이 시간을 정해서 오는 건 아니다. 그렇다 보니 밥을 먹다가도 손님을 맞는 일이 비일비재였다. 모든 건 손님에게 맞춰져야 했다. 당연히 끼니가 정상적으로 이뤄지는 날이 많지 않았다. 저녁 장까지 마치고서야 간신히 식사를 하실 수 있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시장에서 먹고 자면서 힘들게 노동을 하셔도 병원을 다녀야 할 정도의 질병이나 입원할 정도로 다치는 일은 없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엄마의 두통은 심각한 문제였다. 늘 두통약을 달고 사셨다. 원인은 스트레스였지만 그걸 고치러 병원을 드나들기에는 우리들의 학비 마련이 만만치 않았다. 

 ‘부모의 등골을 뽑아 자식들이 자란다.’

 는 말이 있다. 모든 부모는 자신들에게 스스로 그런 의무를 부여하는 건 아닌지. 지금은 그런 생각이 저절로 든다.

 아버지는 그 시절 엄마에게 나름 죄책감을 가지신 것 같다. 화성 구포리 산으로 이주해서도 얼마 살지 못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공기 좋은 곳이라서인지 오래 사신 것 같다고 자주 이야기하셨기 때문이다. 엄마를 만나 어려움을 함께 이겨나가고 점차 정을 쌓으시면서 나름 엄마에 대한 고마움도 느끼셨나 보다. 엄마 앞에서 큰소리를 치셔도 결국은 엄마의 말을 따르실 때가 구포리 산으로 이주해서는 의외로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제기 시장에서의 10년 넘는 시간은 아버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분명 두 분의 노동은 힘들었다. 그러나 부모님과 자식들을 곁에 두고 거두어 가면서 살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물론 부족한 건 돈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부모님과 자식을 굶기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지금과 같이 각종 이유로 학비 등이 보조되거나 의무 교육이던 시대가 아니었다. 당연히 학비는 부모들의 심각한 부담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부모들은 자력으로 자녀들의 학비를 벌어 대학까지 보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 부모님은 오 남매 모두에게 대학교육을 받게 해 주셨다. 그 어려운 일을 해 내셨다. 과정은 지난했다. 노동의 시간은 길었다. 하지만 화성 뱅골에서 가르친 기초 교육 덕에 우리들은 나름 학교에서 선전할 수 있었다. 공부의 맥도 비교적 잘 잡아 다들 성적이 나쁘지 않았다. 특히 우리들을 위해 뼈 빠지게 일하는 부모님들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 그게 우리들이 열심히 공부한 가장 큰 동력이었다. 

 큰오빠는 그 시절 이런 말을 자주 했다.  

 - 우리 부모님이 주시는 학비는 어디서 훔쳐온 것도 아니고 부정한 방법으로 남을 등친 것도 아니야. 순수하게 두 분의 노동을 통해 얻으신 거라고. 당연히 그 학비는 가장 깨끗한 돈이라 우리는 부끄럽지 않게 공부할 수 있었어. -    

                                                                                 

잔치에 참석하신 엄마의 환한 웃음 - 손주들을 대할 때도 늘 이런 모습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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