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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지난한 세월

          

 사연이 없는 가족이 있을까? 아니 단언한다. 절대 그런 집은 없다고. 눈물로 과거를 들추지 않아도 사연이 없는 가족은 없다. 특히 우리나라는 근대화의 과정을 거치며 듣다 보면 아연실색하거나 코끝이 찡해지는 일들이 생각보다 많다. 내 이야기 실력으로 우리 가족 이야기를 제대로 전할 수 있을까? 아직도 이 대답에는 고개를 갸웃거린다. 이야기 실력이 남들보다 탁월하지는 못해도 넉넉하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안타깝지만 우리 엄마의 이야기 실력에도 미치지 못한다. 나는 그렇게 실감 나게 이야기하기 힘들다. 이야기 실력도 어떤 면에서는 타고나는 능력인데. 어디서 문장의 신이 있다면 내게도 가끔 접신해 주시면 좋을 텐데???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을 읽으면서 나는 놀랐다기보다 충격을 받았다. 우리 어린 시절은 도덕 대신 반공을 배우며 자랐다. 반공이 교과에 포함되어 있었다. 이승복 어린이의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가 교과서에 실려 높은 사상적 교훈으로 교육되던 시절이었다. 그 사건이 어떤 연유로 어떻게 전해졌는지 진위 여부를 가리기도 전에 서둘러 교육되었다는 사실에 대해 반론하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비판이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던 내게 <태백산맥>에 나오는 많은 공산주의자들은 의외였다. 그들은 너무나 인간적인 이상주의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이야 정치가 교육의 많은 부분을 지배한다는 걸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태백산맥>이 나에게 준 충격은 오래 뇌리에 머물렀다. 내가 교육자가 된 시기는 하필 가장 부도덕한 방법으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정권 때였다. 그들은 정권을 잡자마자 교육에도 손을 댔다. 학교에 갑자기 <윤리부>란 부서를 만들었다. 본인들의 부도덕함을 숨기기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이후 20여 년 간 각 공립학교에는 도덕과와 체육과 출신 교장이 대거 임용된다. 수업 시수가 많아 상대적으로 교사 수가 많은 국어나 수학 영어보다 훨씬 많은 가산점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특히 88 올림픽 유치를 위해 각 학교에 설치한 체육 특기생 제도는 체육과 교장의 대거 진출 요인이 된다. 그리고 학교는 그 체육과 교장들의 주도하에 긴 시간 교육과 관계없는 각종 부패와 추행 부도덕 등이 만연해진다. 지금 와서 밝힐 수 없어 그렇지 긴 시간 교육계에 횡행했던 부패와 성과 만능주의의 만연은 그들의 주도였다. 덕분에 참 교육에 뜻을 뒀던 많은 교사들이 교단을 떠나는 데 한몫했음도 부정할 수 없다.

 아버지 이야기를 쓰다 화성 뱅골이라는 부락에 가까운 공간에서 우리 가족은 6.25 이후 어떤 대접을 받았나 생각해 보았다. 서울이야 워낙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과거 이력도 본인이 떠들지 않는 한 쉽게 숨길 수 있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뱅골은 남의 집 숟가락 숫자까지 쉽게 알 수 있는 곳이었다. 나라 안팎 소식도 풍문에 가까운 단편적인 것들이 전부였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 동네에 대형 건전지를 끼운 라디오라도 있던 집은 우리 집 밖에 없었다. 외부 정보에도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흔치 않았다. 사람들의 이동도 적었다. 삶에 필요한 대부분을 마을 안에서 해결했다고나 할까?

 우리 가족은 뱅골에서 마을 사람들에게 배척당하지 않았다. 특별히 부역자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모욕적인 언사를 들은 기억이 없다. 내가 너무 어린 데다 눈치가 없어서 못 느꼈을 수도 있다. 학교에서 역시 그런 이유로 차별을 당한 적이 없다. 사실 전혀 없다. 오히려 학교에서는 비교적 있는 집 딸로 특별히 공부 잘하는 오빠들 덕에 입학해서부터 각종 수혜를 입었다. 의문의 1패라는 걸 당해 본 적이 없었다. 

 서울에 전학 와서야 내가 가산이 부족한 집 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아버지가 뱅골에서 동네 사람들의 신용을 잃은 일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당연히 미움받을 일을 하신 적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우리 오 남매 모두 학교를 다닐 때도 자신들이 연좌제에 묶여 있다는 걸 인식하지 못했다. 사회에 진출해서야 ‘이게 뭐지?’ 하고 자신이 닥친 상황에 당황스러워했다. 우리가 그렇게 자랄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할아버지 때부터 쌓아온 신용이 작용한 게 아닐까? 

 우리 민족이 입은 6.25의 폐해는 돈으로 환산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지막지하다. 그건 세계사에서도 아주 드문 경우라 한다. 그렇다면 우리 동네는 어떤 피해를 당했을까? 어린 시절 어른들은 공산당이 저지른 다양한 이야기를 하셨다. 경찰 가족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이 몰살을 당했다던가 심지어 온몸의 껍질을 벗겨 당수나무에 매달렸다는 끔찍한 이야기까지 있다. 그러나 뱅골에서 그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은 내 기억에 없다. 오히려 불운한 주검은 좌파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수원교도소에서 재판에도 넘겨지지 못하고 총살당했다거나 비명횡사했다는 이야기들이 더 많았다. 

 앞에서 우리 아버지가 사지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도운 분이 있다고 말했다. 아버지의 생존에 직접 관여한 분은 당시 수원지법원장을 하던 판사 정존수라는 분이다. 이승만 정권에서 국회의원으로 출마 당선되어 활동하기도 했단다. 큰오빠 말에 의하면 6.25 당시 사상범들은 사형, 무기 아니면 적어도 15년 형을 선고받았단다. 판사였던 그분은 자신의 사촌누이와 우리 막내 고모의 청탁을 들어주셨다. 나중에 전해진 말에 의하면 아버지 서류를 맨 아래로 빼돌려 가장 낮은 10년 형을 받게 했단다. 1.4 후퇴 때 다른 수형자들은 총살을 당했다. 하지만 아버지만은 풀려나 집으로 돌아오실 수 있었으니 그분의 힘이 얼마나 막강했는지 알 수 있다. 

 나는 동네 이웃들이 그런 전력이 있는 우리 집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걸 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아버지는 뱅골에서 드문 지식인으로 마을 청장년들의 지도자 역할을 하셨다. 아버지는 동네에서 나름 반듯한 이미지를 가지고 계셨던 게 분명하다. 

 그 연유는 모범적인 학교생활과 술이나 담배 또는 개인적인 처신에서 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으셔서가 아닐까 한다. 아버지는 술에 취해 누구와 다툼을 벌이신 적도 싸움판에 끼어든 적도 없으셨다. 오히려 그런 문제가 일어났을 때 중재자 역을 하셨다면 몰라도. 특히 자식 교육에도 모범을 보인 데다 자녀들 또한 남들에 비해 어려서부터 근동에서 알아주는 수재였으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무엇보다 할아버지는 남들에게 인색하거나 성정이 못된 분이 아니셨다. 농사일을 돕는 머슴들이나 할머니가 시집올 때 데려온 종들에게조차 함부로 하대하지 않으셨다. 그건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강직하다는 평판은 더더욱 우리 집을 이웃들이 만만히 보지 못하게 하는 울타리가 되지 않았을까 싶다. 6.25 때 할아버지의 행동은 동네 사람들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더 그런 인상을 이웃들에게 심어준 게 아닌가 싶다. 

 혹독한 옥고를 치르고 나오신 아버지는 대학에도 복학을 하셨다. 학교 측에서도 별 문제를 삼지 않은 것 같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엄마와 선을 보고 결혼도 하셨다. 두 분의 선을 주선한 분은 앞에서도 말했지만 우리 둘째 외숙 모시다. 할머니의 친정이 있던 화성 상기리 출신인 외숙모는 아버지와 엄마의 주선자가 되신다. 수원으로 선을 보러 나서는 아버지를 향해 할아버지는 그 처녀와 무조건 결혼하라고 거의 명령하셨다는 이야기도 앞에서 했다. 할아버지에게 툇마루 아래 오글거린 다섯 마리 하얀 새끼 호랑이 꿈은 쉽게 포기될 수 없는 길몽이셨을 테다. 할아버지 예지몽이 어느 정도는 맞은 것 같기도 하고!

 작년, 청요리에 계신 아버지에게 갈 때마다 내가 쓰고 있는 가족 이야기를 조금씩 읽어드렸다. 그러면서 갖가지 의문에 대해 물어본 적이 있다. 엄마와 선을 보고 왜 70점만 주셨냐고 물었더니 아직 학생인데 아버님이 결혼하라고 해서 그러셨다는 답을 하셨다. 내 생각에 아직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는데 결혼은 빠르다고 생각하셨다는 의미로 이해되었다. 

 아버지는 언제부터 고시 공부를 해야겠다고 생각하셨을까? 아마 혹독한 옥고를 치르는 과정에서 필요를 절실하게 느끼셨다고 본다. 나름 합리적인 의심이다. 아버지의 목숨을 쥐락펴락한 것은 결국 판사 1인의 판단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리 억울해도 백이 없으면 자신의 억울함을 풀 수 없는 상황이 전쟁 중에는 비일비재했을 거였다. 그걸 이용해 각종 이권을 차지하고 배를 불린 사람들 역시 얼마든지 존재했다. 심지어 일본에 적극 협력했던 사람들과 그 후손들이 여전히 잘 살고 각종 국가 안보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국립묘지에 안장되는 일이 아직도 벌어지고 있으니 말해 무엇하랴. 오죽하면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거지꼴이라는 말이 생겼을까?

 혼인을 하고서도 아버지는 틈만 나면 공부에 열중하셨다. 엄마와 막내 고모의 증언이다. 학교 다니랴 집안 농사일 도우랴 거기에 고시공부까지 나섰으니 아무리 아버지라도 힘이 드셨을 터였다. 덕분에 갓 시집와 이것저것 할머니에게 핍박을 당하고 계신 엄마를 도울 여력이 거의 없었을 건 자명한 일.

 아버지는 오랫동안 엄마와의 혼인이 옳은 판단이 아니었다고 생각해 오신 듯했다. 엄마와 해로하신 것도 의무감이나 책임감에 더 무게를 두고 말씀하신 적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아직 어린 내게 가끔 아버지가 인근 처녀들에게 호감의 대상이었다는 말을 하신 적이 있다. 아버지가 자전거로 통학하실 때면 울타리 너머로 몰래 훔쳐보던 처녀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큰오빠 역시 아버지의 부역 전력으로 외가 식구들이 혼인을 기피하지 않았을까 하는 막내 질문에 이런 답변을 한 적이 있다.

 ‘아버지 서울대 생이지. 키가 좀 작은 편이셨지만 꽃미남이시지. 살림 넉넉한 집안의 맏며느리 자리인데? 반대로 엄마는 중인 출신 외할머니가 재취로 가셔서 낳은 딸이라 그렇게 좋은 조건은 아니지.’

 아직 혼인에도 반상의 엄격함이 자리 잡고 있던 70여 년 전 이야기이니 그럴 수도 있었겠다 싶다. 엄마가 돌아가신 날이다. 혼자 윤경 빌라에 계신 아버지에게 먹거리를 챙겨 갔을 때였다. 아버지는 그날도 나에게 엄마하고 혼인하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집안 간의 약속이라 어쩔 수 없었다는 이야기셨다. 그래도 수십 년을 함께 하다 돌아가신 날인데 아직도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에 솔직히 섭섭했다. 돌아와 그 말을 전하자 손자녀들이 더 흥분해서 할머니 편을 들어 날 놀라게 했다. 손자녀들이 어릴 때 툭하면 품 안에 넣고 ‘우리 강아지! 강아지!’하시며 예뻐하신 덕을 이렇게 보시는구나 싶었다. 

 대학에 재학하시면서 고시 공부를 하실 때 함께 공부한 분이 계시다. 우리가 의구 아저씨라고 불렀던 분이다. 고향이 이북이라 6.25 이후 생활비와 학비로 고생을 많이 하신 모양이었다. 비교적 가산이 넉넉했던 아버지는 친구의 형편을 알고 자주 도우셨다고 한다. 그분도 혼인을 일찍 하셨다. 하지만 고시를 위해 절에서 칩거하며 공부하다 보니 신부를 홀로 두는 일이 잦았단다. 나중에 아내가 낳은 아이가 자신을 너무 닮지 않아 당시 흔치 않은 유전자 검사를 했다. 결국 친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이혼을 하셨다는 소리를 들었다. 불행한 가정사에 가정 형편도 어려워 사법고시를 포기하고 행정고시로 전환해 합격. 교육부로 임용되신다. 수십 년 후 그분 덕에 큰오빠와 나의 임용이 해결되었으니 인연도 돌고 도는 모양이다. 살면서 누구라도 도울 기회가 있으면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막내 고모는 우리 아버지에게 바로 손위 누이이시다. 너무 일찍 소년 과부가 되신 데다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도 만만치 않게 하셨다. 무엇보다 남동생인 우리 아버지에 대한 정성이 얼마나 지극하신지 어린 우리들 눈에도 보일 정도였다. 아버지의 옥고에도 힘든 걸 마다하시지 않고 뒷바라지하셨다는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아버지도 청요리에서 그런 이야기를 직접 하셨다. 막내 고모가 떡을 해 이고 큰어머니와 정판사의 집을 수시로 드나들며 구명해서 아버지가 풀려나셨다는 이야기셨다. 

 게다가 수시로 아버지의 하숙집을 다니셔서 공부에 들이는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잘 알고 계셨다. 즉 산 증인이셨다. 우리들은 명절이면 막내 고모가 돌아가시기 전까지 빠짐없이 찾아 문안했다. 지금 돌아보면 명절마다 외삼촌댁이나 고모님들을 찾아뵈러 다녔던 건 단순한 집안 행사가 아니었다. 가족 간의 결속이었다. 덕분에 내가 이런 이야기를 쓸 자료들이 구술로 전해질 수 있었다. 차곡차곡 쌓아 놓았던 기억 저장 창고를 이제야 풀어놓는 느낌이 드는 건 그래서일 것이다. 

 아버지의 공부 방법의 핵심은 아마 암기식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건 우리들 교육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연필 잡을 나이만 되면 모두 <천자문> 공부에 동원되었으니까. 대학을 졸업하신 다음에도 아버지는 틈만 나면 공부에 열중하셨다. 심지어는 엄마의 출입조차 엄금하셔서 원망을 많이 들을 정도였다. 얼마나 공부에 들인 정성이 많았을지 짐작이 간다.

 그렇게 심혈을 기울여하시던 공부를 어느 시점에서야 포기하셨을까?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사법이나 행정 고시 그 무엇에도 합격할 수 없는 벽에 부딪쳤다는 걸 언제 서야 정확하게 아셨을까? 나는 그 부분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다. 다만 짐작컨대 노력이 전혀 보상받을 수 없는 상황에 대해 느끼셨을 아버지의 절망만은 이해된다. 모든 걸 포기하기까지 상심이 얼마나 크셨을지 생각해 보면 딸로서 안타까울 따름이다.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51년 후반기쯤 엄마와 혼인을 하시고 53년 정월에 큰오빠가 태어난다. 작은 오빠는 55년생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엄마는 작은 오빠가 태어나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심하게 열이 나며 아픈 적이 있었다며 당시를 자주 회상하셨다. 아버지는 군대에 의무병으로 입대하신 상태였다. 아버지가 군에 입대한 것은 내 짐작에 54년 대학을 졸업하신 직후였을 것이다. 전쟁은 휴전으로 일단 정리되고 사람들의 삶도 점차 일상을 찾아가기 시작할 무렵이다.

 아버지는 군 생활을 조치원 국군 통합병원에서 의무병으로 근무하셨다. 그 병원은 전후 미군들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그곳에서 아버지는 당시 최첨단 의약품들을 접해 보셨다. 당시 영어를 잘하는 한국인을 구하는 건 상당히 어려웠다. 아버지는 영어를 잘하신 덕에 그곳에 배치되셨다. 아버지 자신도 그런 비슷한 말씀을 가끔 하셨다.

 폐결핵으로 지병이 깊었던 할아버지의 환후도 아버지가 의무병으로 복무하면서 구한 미제  신약 덕분에 고칠 수 있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우리들에게 거의 의사 행세를 해 오셨다. 의무병 때 받은 교육에 신약의 치료 효과는 아버지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만병통치약들이었음이 분명하다. 결핵으로 거의 돌아가실 뻔한 할아버지를 구한 데다 우리들 5남매도 큰 병 없이 잘 자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6.25의 후유증이 심했던 터라 영·유아 사망률은 상당히 높았다. 밝혀지지 않은 것까지 통계에 포함하면 더 심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친구들 중에도 형제나 자매가 사망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우리 오 남매는 아버지 덕에 별 잔병치레 없이 모두 건강하게 자랄 수 있었다. 다만 시력 문제만은 효과를 못 본 것 같다. 아버지의 30센티 떼고 책을 보라는 강요에도. 다들 안경을 일찍부터 걸치고 살았으니. 물론 책을 좋아하고 공부에 많은 시간을 쏟다 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의무병 근무에 순 작용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제대하고 약국을 차려 실패한 일도 사실 원인은 거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공덕동 약국을 기억하는 큰오빠 말대로 좋은 약사를 만나지 못한 것도 작은 아버지의 불성실에서도 찾을 수 있겠지만 약국을 차리는 자체가 좋은 선택이 아니었던 건 분명하다. 50년대 후반 마포경찰서 부근에 차린 약국은 할아버지가 일군 자산을 탕진하는 시초였음도 확실하다. 차라리 의대나 약대로 편입하실 형편이 되셨다면 결과가 달랐을까. 공부하시는 게 취미이자 특기나 마찬가지셨으니 엄청 잘하셨을 텐데.

 문제는 이후에도 있었다. 이미 50년대 신약의 놀라운 효능은 더 효과가 좋은 약품으로 대체되었다는 걸 믿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이 문제로 아버지는 우리들과 자주 트러블이 있었다.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하는 일이 비일비재했던 것이다. 특히 엄마를 병원으로 모시고 가는 문제에 대해 아버지의 소신과 대처하는 일이 힘들었다. 다만 엄마가 아버지의 치료에 대해 긍정적이었다는 데 함정이 있다. 아버지의 치료가 별 효과를 보지 못해도 원망하지 않으시고 잘 참아주셨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구포리 산으로 이주하시고 한참 뒤 일이다. 내가 가 보니 엄마가 손목 주변 통증이 심하다고 하셨다. 발긋발긋한 상처들이 쿡쿡 쑤시듯 아프다고 하셨다. 대상포진이 재발해서였다. 그런데도 아버지가 발라주시는 소독약을 믿고 참고 계셨다. 나는 거의 강제로 비봉면에 갓 개원한 한마음 병원으로 엄마를 모시고 갔다. 역시 대상포진이었다. 당장 하루치 약이면 괜찮아지실 일을 아프셔도 아버지를 믿고 참고만 계셨으니. 병원을 다녀와 폭풍 잔소리를 하는 딸에게 ‘내가 그런 병인 줄 알았겠냐?’고 꼬리를 내리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아버지는 엄마의 그 공고한 믿음에 대해 지금 어떤 말로 변명을 하고 계실지??? 

엄마와 금강산에 가셨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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