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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아버지의 유년과 고단한 서울생활의 시작

        

 화성 뱅골에서 우리들의 유년시절은 나름 행복한 추억들이 많다. 물론 아버지의 다소 강압적이며 군대식 비스므리한 교육이 있었던 건 사실이다. 혼이 나거나 매를 맞을 일이 생겨도 반드시 단체로 책임을 물었다. 아버지는 형제간의 우애가 이렇게도 길러진다고 굳게 믿으신 모양이다. 당시는 아버지가 자신의 소신을 꺾을 필요가 없었다. 지금 같은 수평적인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가정에서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랫동안 우리나라도 자식은 가업을 함께 하는 보조원이었다. 자식을 하나의 독립된 인격체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어찌 되었건 집안의 어른들과 우리들은 그런 교육을 당연시했다. 당시 여러 사회 규정이나 동네의 규율 거기다 어른들이 주관적으로 보기에 잘못된 일이라면 반성을 목적으로 하는 분명한 교육(?)이 있었다. 다행히 그 규율들은 인성교육 수준이었다. 지금도 사회 문제가 되는 화풀이 수준의 학대 같은 건 아니었다. 우리가 어린 시절 우리 집처럼 자식들에게 잘못의 이유를 설명해주는 수준의 인성 교육을 받는 집은 거의 없었다. 그걸 우리들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버지는 어떤 가정교육을 받으셨을까?

 우리 아버지 위로 태어나신 누이들은 모두 무학이시다. 학교를 다녀 본 적이 없으셨다. 두 분의 노 할머니에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데려온 노비 가족까지 집안은 대가족이었다. 아버지는 누나들과 나이차가 제법 난다. 

 왜정 초기였으니 여자라고 학교를 보내지 않는 게 이상한 시절은 아니었다. 누나들과 달리 아버지는 남자에 장손이라고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당시는 남자들도 학교에 다니기 힘들었다. 어느 정도 먹고 살 만해야 학비인 월사금을 낼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닐 때도 의무교육이 아니었다. 부모가 월사금을 낼 형편이 안 되면 그 시절에도 학교를 쫓겨나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니 왜정 때는 남녀 불문하고 학교를 다니기 힘들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지금 비봉면 소재지에 있는 비봉 초등학교는 아직 개교 이전이었다. 그래서 지금 화성 시청이 있는 남양에 있는 남양 초등학교를 걸어서 다니셨다고 하셨다. 뱅골에서 남양 초등학교는 산 넘고 물을 건너야 갈 수 있는 제법 먼 거리에 있다. 지금도 비봉에서 남양까지는 자동차로도 20분 이상 걸린다. 다행히 초등학교 졸업 전에 비봉면 읍내에 비봉 초등학교가 개교했다. 아버지가 우리에게 종종 비봉 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어렴풋하게 난다. 

 ‘아버님은 키는 작은 편이었어도 힘이 좋으셔. 할아버님 체질 닮으셨어. 할아버님은 장사 스타일이신데 아버님은 그 체질에 할머님의 단아한 외모를 닮으셨어.

 불행히도 왜정 때라 초등학교를 처음에는 남양으로 걸어서 다니다가 나중에 비봉 초등학교가 생겨 거기 졸업하셨어.

 체력이 좋아 물구나무로 운동장을 몇 바퀴나 도셨대. 또 초등학교 졸업하신 뒤 열다섯 즈음 면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는데 기술이 좋아 어른들을 꺾고 결승에 가셨대. 그때 무리하셨다고 후회하셨어. 승부욕이 엄청 강해 누구한테 지고는 못 견디셨대. 

 초등학교 졸업 때 아버님이 일등인데 일본 교사 아들이 백으로 일등상을 받은 것 때문에 엄청 화가 났대. 그때 반드시 출세해서 힘을 갖겠다고 마음먹었고. 평생 고시 합격을 자식들에게까지 바란 이유야.

 초등 졸업 때 일제 소년비행단(가미가제 특공대)에 지원했는데 키가 작고 씨름에 기력을 낭비한 것 때문에 탈락하셨대. 그 좌절감이 크셨나 봐.’

 큰오빠의 설명이다. 내 기억에 아버지는 60대에도 아들들보다 기운이 더 장사셨다. 그래서 아들들 체력이 약하다고 잔소리를 달고 사신 게 아닌가 싶다. 설날이면 강도 방죽에서 명절로 모인 가족들과 스케이트를 타셨다. 그때마다 손주들이 탄 썰매를 혼자 끌고 다니실 정도였다. 아들들 건강관리가 부족하다고 걱정하실만했다. 

 아버지가 초등학교를 다니시던 시절. 아버지의 경쟁 상대는 같은 한국인이 아니었다고 하셨다. 그건 나도 들은 기억이 있다. 당시 지배 세력은 일본인들이었다. 아버지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식민지의 이등 국민이었다. 

 우리가 배워 아는 것은 일본이 동양척식 주식회사를 앞세워 한국인들의 땅을 빼앗는 수준으로 사들였다는 사실이다. 그 땅은 일본인에게 헐값에 불하되었다. 식민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일본인들의 조선 땅 이주가 중요함을 알았기에 그런 정책을 쓴 것이다. 거기에 각종 차별과 불평등을 당하는 건 주로 식민지 조선 사람들 몫이었다.

 화성은 지리적으로 경성에서 가까운 데다 인천과 수원을 오가는 수인선 철도까지 연결되어 일본인들이 눈독을 들인 만한 입지였다. 특히 남양만을 끼고 있어 서해 바다도 가까웠다. 강도 방죽이 만들어지기 전까지 우리 동네 구포리도 갈매기 나는 포구였다. 우리가 어렸을 때까지도 남양만은 간척되지 않았었다. 뱅골에서도 조금만 나가면 크기가 작은 목선이 오가는 걸 멀리서 볼 수 있었다. 

 내가 비봉초등학교에 다닐 때였다. 유포리에 사는 친구 중 하나가 자기네 집은 마당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고 했다. 어느 토요일. 그 친구 집에 놀러 갔었다. 초가집 안마당까지는 아니어도 밀물이 집 근처까지 일렁거리는 걸 보고 ‘여기서 어떻게 살지?’ 하며 겁을 낸 기억이 난다. 비가 많이 오고 태풍이 부는 밤에는 친구 집 걱정에 잠을 못 이룰 정도였다. 

 지금은 간척사업으로 남양만부터 막아 버려 뱅골 주변 갯벌 일부만 수로 형태로 남아 있다. 그렇게 넓었던 갯벌은 넓은 논으로 바뀌어 흔적도 없이 모두 사라졌다. 

 일본인들의 직접적인 수탈 증거들은 내 기억에도 제법 많았다. 우리 어린 시절에는 김동인의 소설 ‘붉은 산’은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유별나게 민둥산이 많았다. 지금은 울창한 숲이 된 태행산도 바위투성이의 민둥산이었다. 친구들을 따라 다람쥐를 잡으러 직접 가 봤기에 확실히 기억난다. 더구나 그곳은 우리가 다니던 초등학교의 단골 소풍 장소였다. 그런 산들 주변으로 어른들이 일본인들 땅이었다고 증언하시는 상당한 규모의 배나 복숭아 과수원들이 있었다. 

 엄마도 왜정 때 다니셨던 수지 초등학교 이야기를 가끔 하셨다. 그중 기억나는 건 학교에서 우리말을 사용하면 무슨 딱지를 뺏긴다는 말씀이셨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비교육적인 행태가 자행된 것이다. 학생들이 무조건 일본어만 쓰도록 만들기 위해 서로 고발하도록 장려했다니? 일상생활에서 할 수 있는 작은 실수조차 용납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일제 말로 갈수록 학교에서 우리말 사용은 엄격히 금지했다. 그들이 악착같이 조선 어린이들에게 일본어를 강제한 이유는 왜일까?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말이다. 그들에게 조선은 영원히 지배해야 할 자신들의 영토라고 생각해서가 아닐까. 

 아버지 역시 1930년대 후반에 초등학교를 다니셨으니 학교에서 일본인과 이런저런 사유로 얽혀 차별을 당하신 일이 잦았을 것이다. 게다가 가문의 명운을 본인이 짊어져야 한다는 출세 지향적 성격에 호승심이 장난 아니셨으니 차별에 대해 굴욕감과 분노는 더했을 것이다. 그리고 절대 일본 놈들에게 지는 일은 없어야 된다며 더 열심히 공부하셨을 것이다. 그건 우리 할머니나 막내 고모의 증언이 아니더라도 아버지를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고 납득이 간다. 

 아버지는 물구나무서기로 비봉 초등학교 운동장을 세 번 돌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고 하셨다. 아버지 자신이 자식들을 앉혀놓고 자주 말씀하셨기에 나도 그 이야기는 기억이 난다. 그때 지나친 체력 소진으로 당시 일본인들이 가미가제 특공대를 모집할 때 지원했다 탈락한 원인이기도 했다는 소리도. 우리들은 그 특공대의 불순한 의도를 역사 공부를 통해 배웠다.  그러나 당시 정보가 전혀 없는 조선인들 입장에서 일본인들의 검은 속내를 알기는 어려웠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는 호승심으로 지원을 하셨을 것이다. 

 오빠 말대로 체격이 우람한 편은 아니지만 운동을 열심히 하신 건 맞다. 나이가 꽤 드신 상태에서도 운동장의 각종 기구들을 거침없이 이용하시는 걸 봤기 때문이다. 특히 비봉 초등학교에 오실 일이 생기면 평균대를 가볍게 넘나드는 재주를 어린 우리들에게 시범 보이셨다. 그 모습은 어린 내 눈에도 멋져 보였다. 

 우리 할아버지는 학교를 다니신 적이 없다. 하지만 장남인 아버지의 교육에 남다른 소신을 가지고 계셨다. 그런데도 비봉 초등학교를 졸업한 아버지는 곧장 진학을 위해 서울로 가지는 못하셨다. 당시 경성 학교는 전국에서 모여드는 수재들이 들어가는 곳이었다. 화성에서 나름 난다 긴다 하셨더라도 바로 입학하는 일은 수월치 않았을 거라 추측된다.

 아버지 또래 고향 친구들은 가업인 농사일을 돕느라 학교를 전혀 다니지 못한 분들도 많다. 지금은 다 무료지만 매달 학교에 내야 하는 월사금을 부담스러워한 가정이 대부분인 시절이었다. 다행히 열린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 할아버지 덕분에 아버지는 서울로 올 수 있었다. 농사일을 돕는 대신 학비와 생활비를 직접 벌어 서울에 가서 공부를 더 하라는 할아버지의 허락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런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평생 고마워하셨다. 

 지금이라면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한 열 너덧 살의 아이에게 그게 무슨 기회를 주는 거냐 싶을 일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초등학교만 졸업해도 자신의 생계 정도는 책임질 수 있는 어른 비슷한 대접을 받았던 모양이다. 

 아버지는 혼자 서울로 상경해 처음에는 양복점에 취업하셨다. 지금처럼 기성복이 없던 시절 양복점에서 미싱을 배워 생활비를 버셨다. 꼼꼼한 성정에 그 일도 얼마나 열심히 하셨을지 짐작이 간다. 그때 배우신 재봉틀 실력은 일상에서 다양한 일에 활용된다. 나이가 들어서도 재봉틀로 웬만한 옷들은 직접 고쳐 입으셨다. 심지어 어디서 얻어온지도 모르는 옷감으로 보자기를 만들어 파시 기도 하셨다.

 게다가 잠시라도 짬이 나면 책을 끼고 사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부분은 동생인 작은 아버지와 상당히 다른 면이다. 능력보다 노력을 더 중시하신 건 그때도 마찬가지 셨을 거라는 건 굳이 추측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암기식 반복 학습은 아버지의 공부 방식으로 우리들이 물려받은 것 중 하나다. 암기의 효과는 나도 직접 경험했다. 아버지는 주경야독 이상의 노력으로 당시 꽤 가기 힘들었던 한양공고를 단번에 편입학하셨다. 지금은 6년 제인 중고교가 그때는 5년제였다. 

 오직 성공해서 가문의 본보기가 되겠다는 강한 일념이 아버지의 원동력이었다. 주경야독으로 첫 번째 목표를 클리어하신 아버지는 양복점 보조 생활을 접으실 수 있었다. 아버지를 곱게 보신 분 댁 가정교사로 입주하게 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알고 있는 광산 재벌 아들인 세기라는 학생을 가르치는 가정교사 자리였다.    

뱅골 구포리 우리 집 주변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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