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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영순 Oct 10. 2021

 우리들의 아버지 -
지금은 전설인 이야기들

    

 체경 할아버지의 10대 손이며 안동 권 씨 35대로 태어나 윤(允)자 택(澤)자를 쓰신 우리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 60년이 넘는 시간을 가족으로 지내다 보니 내가 아버지의 장점보다 단점에 더 집중해서 판단해 온  것은 사실이다. 아버지에 대한 평가가 박할 수밖에 없었다. 현실에서 서로 부딪치며 살다 보면 단점이 클로즈업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자라면서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것들에 대해 원인이 무엇인지 찾아본 적이 없다. 아버지에 대해 우리가 저지른 가장 큰 실수였다.

 한 가문 이야기에는 그 나라의 역사가 반드시 연관된다. 필연적으로 역사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버지 역시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지 못하셨다. 꿈을 이루려는 각오가 대단했던 만큼 더 심각한 피해자였다. 

 아버지는 1928년생이시다. 당시 상황은 일본인들이 조선 여기저기에 들어와 정착을 하던 시기였다. 아마 그들은 오래오래 이 땅을 차지하고 살 수 있다고 여긴 모양이다. 우리가 조상 대대로 살아오던 화성도 그랬다. 일본인들이 야금야금 들어와 헐값에 땅을 불하받고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부를 축적했다. 그 흔적이 지금도 여기저기 남아 있다. 

 대단위로 경작되던 배 과수원이 바로 그 증거 중 하나다. 우리가 지금 먹는 배는 모두 일본 사람들이 들어와 재배를 시작했다고 전해진다. 당연히 토종 배는 서서히 사라져 지금은 일부러 찾지 않으면 보기 힘들 정도라고 한다. 

 내가 어릴 때 야목 근처에는 검은색 지붕을 인 커다란 창고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다. 일본으로 실려 갈 소금 등의 물자가 거기 보관되었다고 전해진다. 구포리가 바다에서 멀어지게 된 것은 강도라는 이름을 가진 일본인 때문이었다. 넓은 갯벌을 막아 간척한 땅을 우리는 강도 방죽이라고 불렀다. 해방이 되어 일본으로 쫓겨 가기 전 주변은 모두 그 사람 땅이었다.

 아버지는 37년 무렵 소학교에 들어가셨다. 지금 화성 시청이 있는 남양 소학교에 입학하신 것이다. 입학 당시 학생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대부분 일본인들이었다. 아버지는 학교에 들어가시기 이전부터 가문을 이끌어 가야 할 장자로 자라고 있었다. 아버지의 남다른 가문 부흥의 책임감에는 사연이 있다.

 앞에서 우리 할아버지는 아들이 없는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 온갖 고생을 하시면서 가산을 일구셨다는 이야기를 했다. 아버지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의 할아버지 즉 우리 증조부모님 이야기를 뺄 수 없다. 아주 먼 옛날 전설처럼 느껴지는 시절의 이야기다. 

 한일합방이 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시류에 이리저리 흔들렸다. 삶이 뿌리 채 한꺼번에 뽑혀 알지도 못하던 세상으로 던져진 사람들이 하나둘이 아니었다. 우리 생 증조할아버지는 세 분 형제 중 둘째셨다. 맏이 되시는 형님은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다. 20세 갓 지나 정확히 어떤 병인지도 모른 채 돌아가셨단다. 문제는 그 증조부님이 혼인을 한 지 반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신접살림을 차린 지 얼마 안 돼 일어난 안타까운 죽음이었다. 큰 증조할머니는 청상이 되셨다. 꽃다운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신 것이다. 아이도 없었다. 겨우 남편의 얼굴을 익힐 만하니 돌아가셨으니 큰 증조할아버지가 얼마나 원망스러웠을까? 내 생각이다.

 증조할머니의 처지가 후손인 우리를 안타깝게 하는 건 그분이 너무 어린 나이에 생과부가 되셨다는 점이다. 당시만 해도 양반집에서 여자가 재가를 하는 건 가문의 수치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왜 여자만 그런 삶을 강요당하는 분위기였을까? 게다가 나라의 상황은 풍전등화. 세상이 정신없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남양 홍 씨 집안에서 안동 권 씨 집안으로 시집오신 그분은 평생을 청상으로 수절하시면서 가문을 일구고 지켜내셨다. 심지어 열녀문도 없었다.

 다행히 둘째였던 우리 생 증조할아버지에게 우리 할아버지와 동생이 태어났다. 친자식은 없었지만 그분에게도 하늘이 내린 복이 있었다. 가문을 지켜야 하는 맏며느리로서 우리 할아버지를 양자로 들일 수 있는 권리가 있으셨기 때문이다. 대를 잇는다는 명목이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누구보다 의지도 굳세고 영민하셨지만 더 중요한 성품을 갖추고 계셨다. 바로 사람의 도리를 아셨다는 거다. 청상으로 홀로 남아 집안을 지켜 오신 양어머니의 서러움과 외로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해 주시고 극진히 대우하실 분이셨다. 할아버지는 증조할머니가 조선 시대 양반가의 맏며느리로서 부족함이 없는 분이었다고 장손인 큰오빠에게 자주 일러주셨다. 큰오빠가 태어났을 때 이미 오래전 고인이 되신 양어머니를 기억하시고 장손에게 제사와 무덤 관리를 당부하신 건 무엇 때문이었을까? 조선이 망하지 않았다면 당연히 열녀문을 하사 받을 분이셨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가문에 대한 헌신과 노력이다. 할아버지는 그걸 자손들이 기억해야 한다고 일러두신 게 아닐까?  

 할아버지는 양어머니의 인품과 당신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리고 자신을 도와 가문을 일으키려 애써 오신 노력을 오래 잊지 못하신 게 분명하다. 지금도 큰오빠는 양 증조할머니의 제사에 더 많은 정성을 들인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생 증조할머니의 제사는 관례에 따라 할아버지의 동생인 기안네서 지낸다.  

 내가 어렸을 때 우리 엄마가 하신 많은 일 중에 봉제사가 있었다. 특히 여름이면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의 제사를 지냈다. 아무리 큰 집이라도 왜 그렇게 많은 제사를 가지고 있는지 의문이었다.  어린 시절 제사는 동네 친인척들이 모여 함께 지냈다. 일종의 마을 행사였다. 엄마는 딸인 나에게도 제사의 중요성을 주지시켰다. 일종의 이야기를 통한 지속적인 훈화로 각인시키신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중 기억나는 건 이 이야기다.

 - 옛날 어느 나그네가 날이 어둑해져 인가를 찾아 헤맨다. 하지만 인가를 찾지 못한다. 다행히 산소가 여러 기 모여 있는 곳에서 하룻밤 노숙을 하게 된다. 당시 풍찬노숙의 최고 장소는 비교적 장소가 트이고 몸을 편히 누일 수 있는 무덤가였다. 산소에는 대부분 금잔디가 곱게 깔려 있어서다. 나그네는 먼 길을 걸어 무척 고단했다. 산소에 등을 대자 깜빡 잠이 들었는데 꿈결엔 듯 말소리가 들렸다. 

 두런두런한 말소리는 내외인 듯한 사람의 대화였다. 영감인 듯한 분이 ‘오늘 내 제사라 마을에 제사 밥을 먹으러 내려갔더니 밥에는 바위가 들어 있어 씹을 수 없고 국은 구렁이가 들어앉아 있어 먹지를 못했어. 혹시나 작은 아들 집에 먹을 게 있나 가 보니 내외가 어찌나 시끄럽게 싸우던지 부아가 나서 아이를 부엌 불구덩이에 밀어버리고 왔다.’며 화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그때 아내인 듯한 사람이 아무리 화가 나도 그렇지 손자를 불구덩이에 넣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다음 날 날이 밝자 나그네는 인근 마을을 찾아 내려갔다. 마을은 몹시 어수선했다. 전날 제사가 있는 집 아이가 부엌 아궁이 근처에서 놀다 화상을 심하게 입어 난리가 났기 때문이었다. 

 나그네는 자신이 지난밤 산소에서 들은 이야기를 전하며 앞으로 정성을 다해 제사를 지내라고 조언했다. - 

 엄마가 구술한 내용을 다시 이어 붙이다 보니 혹 내 기억의 왜곡되거나 일부 변질된 건 아닌지 걱정은 되지만 대강 이런 내용이었다.

 엄마는 이 이야기를 내게 한 번만 하신 게 아니다. 들을 때마다 나도 정성을 다해 정갈하게 잘 차려드려야겠다고 마음먹었을 정도였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라다 보니 나에게 김시습의 <금오신화>나 <아라비안 나이트> 정도는 특별하거나 기이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익숙한 이야기였다. 나만큼 이해도가 높은 사람이 별로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드니 어린 시절의 가정교육이 정말 중요하긴 한 모양이다. 

 지금 생각하면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자란 며느리들은 혹시나 제삿밥에 돌이 들어가거나 국에 머리카락이 들어가는 건 아닐까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싶다. 조리로 돌이 섞이지 않게 정성껏 쌀을 일고 머리에는 수건을 쓰고 국을 끓이던 시절. 각종 가사와 육아에 농사일까지 녹초가 되어 살아가던 분들에게 이런 유형의 이야기는 교육을 빙자한 폭력이라는 생각이 슬쩍 든다. <선녀와 나무꾼>도 이야기를 잘 들여다보면 도둑질을 합리화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더군다나 당장 입어야 할 옷을 훔치다니! 

 이 비슷하게 아무리 허름한 차림의 나그네라도 정성을 다해 대접해야 한다는 내용도 있다. 이 역시 엄마에게 수회에 걸쳐 들었다.

 - 날이 어둑해질 무렵 산골 그 어딘가 허름한 초가에 승려 한 분이 찾아든다. 밖은 함박눈에서 진눈깨비로 바뀌며 아주 궂은날이었다. 삿갓을 쓴 스님은 하루 밤 묵을 수 있는지 아낙에게 물었다. 아낙은 가족의 끼니를 걱정할 만큼 가난했으나 흔쾌하게 스님을 맞아들인다. 그리고 없는 살림이지만 집안에 있던 가장 좋은 것으로 정성껏 대접한다. 정갈한 식사만이 아니라 장작불을 때 따뜻한 잠자리까지 마련해 드린다. 

 언 몸을 녹이실 수 있도록 불을 때 놓고 방으로 들어가던 아낙은 문득 툇마루 아래 댓돌에 놓인 스님의 짚신을 보게 된다. 진눈깨비에 흠뻑 젖은 스님의 짚신이 얼어가고 있는 걸 본 것이다. 아낙은 짚신을 들고 부엌으로 되돌아가 아궁이에 다시 불을 지피고 신발을 잘 말린다. 

 다음 날 몸과 마음을 푹 쉬고 돌아가려던 스님은 댓돌에 놓인 잘 마른 짚신을 보고 감동한다. 자신에게 베풀어준 아낙의 정성에 감동한 것이다. 스님은 문득 하늘을 쳐다보더니 예언처럼 마음씨 고운 아낙에게 축언을 한다. 이 집안에서 왕손이 태어날 것이라는. 양반가도 아닌 평민의 집안에서 왕손이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낙은 딸을 낳는다.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다. 딸은 어릴 때 허드렛일을 돕는 궁녀로 궁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가 아는 대로 그 궁녀는 왕인 숙종의 눈에 들어 후일 영조의 어머니가 된다. -

 마지막은 내가 아는 역사적 사실이다. 도대체 왜정 때 학교를 다니셨던 우리 엄마는 이런 이야기를 어디서 들으셨을까? 아마 민간에 많이 회자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우리 친 증조할아버지는 바람기가 많은 분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바람기라고 하면 보통은 나쁜 의미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구한말 때는 동학꾼들도 그렇게 불렸단다. 그분이 왜 진천 그 어딘가에서 돌아가실 때가 되어서야 사람을 풀어 우리 할아버지에게 연락을 했는지는 정확히 전해지지 않는다. 우리가 들은 건 생 증조부님이 처자식을 화성 구포리 연화동에 두고 이곳저곳을 떠도셨다는 정도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내 생각에 가족 부양에 대한 책임감은 부족하신 분이 아니었을까 하는 정도의 추측이다. 물론 가문을 맡을 생각도 없으셨다. 나라에 대한 책임감이 가족에 대한 부양 의무를 앞섰다면 존경할 만한 일이니 할 말이 없긴 하다. 

 홀로 되신 두 어머니를 모시고 청소년기부터 고군분투하시던 우리 할아버지의 고생도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오죽하면 비봉 인근의 큰 부자셨던 당숙모님이 보다 못해 논 10마지기를 줄 테니 가족을 부양하는 데 쓰라고 하셨단다. 아버지는 그분 며느님을 큰어머니라고 부르셨다. 무려 이천 평에 가까운 논이다. 일가가 한 해를 너끈히 먹고 살 쌀이 나오는 땅인데도 할아버지는 단칼에 거절하셨다. 공짜로 얻는 것은 사실 공짜가 아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대부분은 오랜 경험에서 얻는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어려서부터 그런 경계심을 늘 지니고 사셨나 보다. 

 우리 할머니는 이 일로 툭하면 할아버지에게 구시렁거리셨다. 시비를 거신 것이다. 공짜를 바라지 않고 정직하게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으로 먹고살아야 한다는 할아버지의 신념이 우리에게는 특별해 보이는데 할머니는 꼭 그렇게만 느끼지 않으신 것 같다. 

 우리 할아버지의 특별함은 다른 것에도 있다. 과거 와리스 다리라는 소말리아 출신 슈퍼모델의 자서전을 읽은 적이 있다. 유목민의 딸로 태어나 런던에서 슈퍼 모델로 성공하기까지 그녀의 인생 역전도 만만치 않았다. 강제 결혼을 피해 런던으로 도망치는 과정에서 제일 힘겨운 적은 안타깝게도 그녀의 아버지였다. 딸을 나이 많은 남자에게 팔아버리려 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태어난 유목민 마을의 남자들은 모두 세 개 중 한 가지 이상의 문제는 다 가지고 있었다. 

 -도박, 여자, 술- 

 와리스 다리의 아버지도 나이 많은 남자에게 딸을 팔려고 한 이유가 도박에 정신이 팔려서였다. 이런 문제는 소말리아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면서 과거나 현재나 여자들을 힘들게 하는 내용들은 비슷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할아버지의 조손인 우리 남매들은 적어도 가정에서 이런 문제로 어려움을 겪은 적은 없다. 할아버지 자신이 가장으로 솔선수범하시며 가정을 지키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가 양자로 들어간 큰집은 가산도 거의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청소년기부터 대가족의 가장 노릇을 하셔야 했다. 먹여 살려야 하는 부양가족만 잔뜩 짊어지신 것이다. 아버지에게 할아버지 이야기를 듣다 보면 저절로 알게 되는 일이 있다. 올곧고 정직한 성품이 오히려 할아버지를 돕는 사람들을 곁에 두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에 대해 평생 존경을 넘어 경외의 마음을 품고 사셨다.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실 때면 ‘우리 아버님’을 반드시 붙이셨다. 당시 드물게 대학을 다닌 아버지에 비해 할아버지는 무학이셨는데도 말이다. 무엇보다 아버지 자신이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를 거론하실 때 자주 하시는 이야기가 있었다. 결핵에 걸리셔서 다 돌아가시게 된 할아버지를 국군 통합병원에서 군 복무하실 때 미국 약을 구하고 주사를 놓아 살리셨다는 것이다. 대학을 다닐 수 있도록 뒷바라지하신 할아버지에게 그렇게라도 은혜를 조금 갚으셨던 것이 좋으셨던지 자주 그 이야기를 하셨다. 

 할아버지는 어떤 방법으로 일가를 이루시고 가산을 불리셨을까? 오직 본인과 가족들의 부지런한 노동과 이재에 밝은 영민함이 근간이었다. 큰오빠 말에 의하면 우리 집에 농사가 많을 때는 밭을 제외하고도 논농사만 78마지기를 지을 정도의 중농 이상이었단다. 뱅골 집에 스물이 넘는 식구를 거느릴 정도로 넉넉한 살림살이였다는 의미다.

 할아버지 자녀들은 원래 열 한 분이었는데 그중 겨우 다섯만 살리실 수 있었다. 할머니는 생전에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아버지 바로 위로 먼저 태어난 아들이 있었노라고. 그러나 어릴 때 무슨 돌림병으로 죽었다고 하셨다. 어린 아들을 떠나보내서인지 할머니는 그 아들에 대한 아쉬움이 크셨던 것 같다. 그 아들이 생기기도 잘 생기고 영특해서 장손으로 부족함이 없었다고 말이다. 하긴 그 손녀가 이야기라면 사족을 못 쓰고 졸라댔으니 했던 이야기에 살을 붙였을 거라고 추론해도 할 말이 없기는 하다. 

 엄밀히 말하면 우리 아버지는 장남이 아니었을 텐데 형의 이른 죽음으로 장남이 된 경우였다. 내 생각에 아버지는 태어나면서부터 장남이라는 부담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이 무게는 아버지의 소년과 청년시절을 이끄는 힘도 되었을 터였다. 하지만 가문의 과도한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만만치 않은 압박도 느끼셨을 거라 생각된다. 

 더구나 집터까지 옮기며 소원하셨던 대를 이을 아들이었으니 말해 무엇하랴. 뒤늦게 얻은 아들이었던 만큼 집안 식구들 모두가 우리 아버지에게 얼마나 많은 기대를 하셨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식민지의 정점을 지나는 시기에 태어나 정세는 어지러웠다. 그러나 비교적 유복한 집안에서 노 할머니들과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란 아버지의 유년 시절은 그런대로 평온했을 것이다. 아버지 이름의 이중적인 의미처럼 부족한 것 없이 윤택하게 자랐다고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일가를 이룬 할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남다른 사랑이 있어 기대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노력을 아끼지 않으셨던 건 분명하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건강 상태가 심각한 것을 아시고 계셨다. 그런데도 아들이 삶을 개척할 기회를 아낌없이 주셨다. 그런 우리 할아버지에게 아버지는 평생 감사의 마음을 잃지 않으셨다. 세월에 꺾이고 고꾸라질 순간이 닥쳐와도 할아버지처럼 자식들에게도 교육의 기회를 줘야 한다는 생각이 기본적으로 아버지 삶을 관통한 것은 아닌지 생각해보게 하는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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